글: 유병광(劉秉光)
그의 배반으로 운대영(惲大英)은 잔인하게 살해되었고; 그의 고발로 채화삼(蔡和森)은 비밀리에 총살되었으며; 그의 기밀누설로 주은래(周恩來)는 하마터면 위해를 당할 뻔했으며; 그의 배신으로 중공 당중앙이 거의 전멸할 뻔했다. 그는 배신때 중공의 고급기밀을 많이 알고 있었으며, 배신후은 악착같이 중공조직을 파괴하고, 중공당원을 도살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중공역사상 가장 위험한 반도"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는 바로 1931년 한커우(漢口)에서 체포된 후 즉시 배신한 전 공산당원 고순장이다.
고순장(1904-1935), 일명 고봉명(顧鳳鳴)이며, 상하이 보산현 백양 사람이다. 원래는 남양연초공사의 노동자인데, "5.30" 운동때 뛰어난 활약을 보여, 중공당원으로 가입되었다. 상해노동자의 제3차무장의거에도 참가하고, 나중에 상해노동자무장규찰대의 총지휘를 맡으면서, 중공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4.12" 반혁명정변후, 고순장은 무한으로 옮겨 비밀투쟁에 종사하며, 반도와 특무를 제재하는 일을 책임졌다. "8.7"회의이후, 그는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그후, 고순장은 중앙특위에 참가하여, 주은래가 직접 지휘하는 중앙특과의 핵심분자가 된다.
특과에서 일하는 동안, 고순장은 적지 않은 반도와 특무를 적발하여 처리한다. 그의 성과로 당의 백구(白區)에서의 손실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업무의 특수성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공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눈안에 두지 않았고,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며 도박하는데 빠져 점차 부패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의 이미지에 크게 해를 끼치게 된다. 당시 중앙특과 정보과 과장을 지내던 진갱(陳賡)은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스럽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죽지만 않는다면, 고순장이 배반하는 날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중앙은 그로 하여금 장국도등을 악예환(鄂豫皖)소비에트구로 호송하게 하였다. 그는 임무완성후, 자기마음대로 한커우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놀이장에서 마술공연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그의 종적이 국만당의 특무에게 발견되고, 즉시 체포된다. 특무는 그의 몸에서 중공중앙의 중요한 문건을 수색한 외에 장개석에게 보내는 서신 하나를 발견한다. 이로써 볼 때, 고순장은 일찌감치 배반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고순장은 체포된후 바로 변절한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중공의 기밀을 모조리 털어놓았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국민당특무기관에 중공당조직과 당원을 팔아먹는다. 중통내부에 잠입해 있던 전장비(錢壯飛)는 그의 배신을 알게 된 후 바로 중공특과에 통지한다. 그리하여 고순장이 알고 있던 정보를 모두 무력화시킨다. 섭영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반드시 적이 손을 쓰기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주은래동지는 친히 이 모든 업무를 지휘했다. 중앙의 모든 사무기관을 이전시키고, 고순장이 잘 알고 있는 지도부의 인원을 모두 이사시켰다. 고순장과 연결되는 모든 관계는 차단시켰다. 2,3일동안 우리는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중앙과 주요지도자들이 적시에 이전하였기 때문에 국민당 특무기관에서는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다.
고순장은 충성을 다시 표시하고, 공을 세우기 위하여, 남경으로 압송된 다음 날, 특무기관에 남경중앙군인감옥에 갇혀 있는 중공지도자중의 한 사람인 운대영을 말해준다. 당시, 왕작림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운대영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신분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당조직이 여러모로 조치를 취하여 곧 풀려날 상태였는데, 고순장으로 인하여 그는 남경의 우화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오래지 않아, 고순장은 다시 특무와 함께 가서 중공의 초기 지도자인 채화삼을 체포한다. 채화삼은 광주로 압송되어 혹형을 당한 후에 비밀리에 총살당한다.
고순장은 미친듯이 중공조직을 파괴했다. 대거 중공당원을 붙잡아들이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중통에 대하여 공산당에 대한 여러 계책을 제안한다. 그리고 "특공인원훈련반"을 만들어 자신이 교관이 된다. 가르치는 내용은 정리 편집하여 특무훈련교재가 된다. 이 책은 국민당 중통, 군통의 특무들의 필독서가 된다. 일찌기 고순장의 호위를 맡은 바 있던 임금생에 따르면, "중통특무가 중공지하조직을 미친듯이 파괴하는 과정에서 고순장은 자주 친히 기획하고 지휘했다." 고순장이 악착같이 활약하여 중공의 조직은 백구에서 크게 손상을 입는다. 1931년 12월 1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임시중앙정부 주석 모택동은 지명수배령을 내려서, "고순장 반도를 붙잡아 없애는 것은 혁명전사와 공농군중들이 자각해야할 영광스러운 책임이다"라고 하였다. 중앙정부가 배신자 한 명을 위하여 지명수배령을 내린 것은 중공역사상 아주 드문 일이다.
고순장은 배신후, 개인적인 야심이 극도로 팽창한다. 그는 중통, 군동의 사이를 오가면서, 양쪽 모두에 공을 세우고 잘보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조금 지나자 중통쪽에서 냉대를 받는다. 1934년, 조용히 살고 싶지 않았던 고순장은 국민당과도 다르고 공산당과도 다른 "신공산당"을 조직하고자 한다. 그는 독자세력을 키워서 체계를 갖추고 독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군통의 특무두목 서은증이 싫어하는 짓이었고, 그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짓이라는 것을. 1934년 5월, 서은증은 중통고위회의를 개최한다는 이유로 부른 다음, 그를 별도조직을 만들려한다는 이유로 연금시켜버린다. 오래지 않아, 고순장은 정식 구금된다. 이때, 장개석은 고순장에게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정치적 야심에 대하여도 반감을 지니고 있어, 고순장을 극형에 처하는데 동의한다.
1935년 6월, 나이 겨우 31살된 고순장은 소주감옥에서 비밀리에 처결된다. 고순장이 어떻게 죽었는가? 여러가지 설이 있다. 총살집행을 책임졌던 여서경이라는 특무가 나중에 밝힌 바에 의하면, 고순장은 특무중에서는 유명한 자였고, 그는 화장술, 마술에 정통할 뿐아니라, 최면술 심지어 둔갑술까지도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하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특무는 고순장의 비파골(琵琶骨)을 뚫어 술법을 쓰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고순장의 처인 장문금의 회고에 따르더라도, 고순장이 마술, 최면술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어서 소주반성원으로 호송할 때 쇠줄로 그의 비파골을 뚫어서 묶어두었는데, 그가 도중에 술법을 써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들은 비교적 합리적으로 보인다. 변절한 자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사람을 죽인자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천고불변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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