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범소증(范紹增): 민국풍류장군

중은우시 2008. 9. 23. 15:37

글: 유계흥(劉繼興)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민국시대에, 군벌들 중에서 처첩을 많이 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첩을 가장 많이 두었을까? 천군(川軍, 사천군벌)의 장군 범소증이다. 그의 첩은 40명에 달하니, 고금에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범소증의 풍류는 하류는 아니었다. 첩에 대하여 감정을 중시했고, 다른 군벌인 장종창이나 양삼처럼 양가부녀를 강제로 범하거나, 첩들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등의 일은 없었다.

 

범소증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바로 "바보사단장(兒師長)"의 원형이라고 하면 그다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천군의 사단장을 지낸 범소증은 사천성 대죽현 사람이다. 일찌기 포가(袍哥, 민간비밀결사)에 속한 사람으로 녹림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멍청한 눈빛과 멍청한 몸짓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그를 "범합아(范哈兒)"라고 불렀다. 평생을 호탕하고, 의리있고, 강직하게 지내서, 강호에서 명성을 크게 얻은 편이다.

 

당시 총만 들면 대장을 할 수 있던 시절에, 범소증은 지방실력파임에 틀림없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충분히 용감하였고, 애정전선에서도 마음먹은대로 되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것을 즐겼다. 그리하여 몇년만에 그의 첩은 40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범장(范莊)의 건설

 

1930년대초, 범소증은 첩들이 살 집을 마련하고, 그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거액을 들여 지금의 중경대예배당의 건너편에 있는 민국로(民國路)에 부지면적이 상당한 공관 즉 범장을 짓게 된다. 이 화원식 건축은 설계가 신선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화원에는 정자, 괴석, 기화를 심어 푸른 나무가 햇볕을 받아 빛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헬스장, 당구장, 수영장, 전천후테니스장, 무도장을 두었다. 대문안의 양쪽에는 사자, 호랑이, 곰등의 동물을 키웠다. 조금 지나자, 그는 다시 내룡항(來龍巷)에 규모가 작은 공관을 세우고, 곁에는 다시 별장을 하나 더 만든다.

 

범장의 안에 사는 첩들은 모두 자기의 거처를 가지고 있었다. 미녀가 구름처럼 몰려 들었고, 범소증은 매번 공무에서 틈만 나면, 새로운 공관에서 첩들을 좌우로 끼고 살았다.

 

이렇게 많은 첩들을 관리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범소증은 이 측면에서 방법이 있었다. 그는 범장내에 총관사를 두고, 관사를 몇 사람 두었다. 그 아래에 자동차운전기사, 재단사, 정원사, 심부름꾼, 잡일꾼, 중국요리주방장, 서양요리주방장, 동물사육사등을 두었는데, 업무인원만 110명이 넘었다. 이들은 바로 첩들의 생활을 잘 보살피는 것이 업무였다.

 

가장 총애받은 십칠이태태(十七姨太太)

 

여러 미녀들 중에서 범소증이 가장 총애한 것은 십칠이태태(이태태는 첩이라는 뜻임)이다.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 테니스장이나 수영장등에 자주 두 사람이 노는 모습이 보였다.

 

이 열입곱째 첩은 미모를 타고 태어났다. 맑은 눈에 흰 이빨, 그리고 남자의 마음을 잘 읽었다. 매번 애교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범소증은 마음을 다 빼앗겼다.

 

자고로 미인에게 시비는 많은 법이다. 그녀의 풍류에 대하여 중경에 소문이 많이 돌았다. 호사가들은 이것을 가지고 <<십칠이태외전>>이라는 책도 지어냈다. 출판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로 구매하려고 해서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온 중경시내에 퍼졌다.

 

첩의 외도사건

 

첩의 외도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도 범소증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의 관대함은 다른 군벌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33년 봄, 범소증의 첩인 자국(紫菊)이 중경의 개명학교에서 공부하는데(첩을 학교에 보낸 것은 그녀의 문화소양을 끌어올리려는 뜻이었다), 청년교장인 왕세균과 연애를 하게 되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건이 발각되자, 범소증은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 왕세균은 범장으로 붙잡혀 끌려왔다. 두 사람에게는 곧 큰 벌이 내려질 찰나였다. 이때, 두 사람의 가족인 왕찬서, 진난정이 범소증에게 두 사람의 목숨만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왕세균의 모친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강호를 오랫동안 종횡했던 범소증은 비록 먹물은 별로 마시지 못했지만, 인정을 중시하고 의리를 중시했다. 그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자국은 어쨌든 자신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었다. 하룻밤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 이리저리 생각해본 후에, 그는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주기로 결정한다.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첫째, 자국을 양녀로 삼는다. 왕세충은 양자로 삼는다. 둘째, 식탁 몇개에 술좌석을 마련하여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준다. 셋째, 자국에게 대양 5000을 주어, 혼수예물로 삼는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왕찬수는 바로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범합공, 정말 멋집니다. 정말 멋집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가 중경에 퍼져나가자, 모두 범사단장은 정의(情義)를 아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난감한 사건을 이렇게 처리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첩외교

 

일찌기 청나라때, 중경은 상업부두도시였다. 그리하여 상업이 발달하고, 사람이 모여들었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 범소증은 시류를 잘 따랐다. 그는 첩들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해주기 위하여, 상해에서 교사들을 초빙했다. 그리하여 처첩들이 서방문화를 익힐 수 있도록 해주었다. 부인들은 서구화하였고, 특히 젊고 예쁘며,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조온화(趙蘊華), 하촉희(何蜀熙)의 두 첩은 나중에 중경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범소증이 이후 국민당내에서 승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국민당정부는 중경으로 이전한다. 일시간에 중경에 권력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집에서 쉬고 있던 범소증은 국민당요원들과 접촉한다. 특히 범장을 권력자들에게 내주었다. 범장에 거주한 바 있는 사람들로는 장개석, 송미령, 공상희 및 남경경비사령관 양호성 등등이 있다. 총참모장인 하응흠, 제3전구사령관인 고축동도 항전기간동안 가족을 모두 데리고 범장으로 이사왔었다.

 

범소증은 조온화 하촉희의 두첩을 보내어 매일 하응흠의 부인 왕문상, 고축동의 부인 허문용의 곁에서 보살펴부면서, 자주 신선한 음식물이나 새로운 옷, 금은주보등을 보내주었다. 부인노선은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범소증은 군단장, 집단군부총사령관으로 속속 승진한다.

 

탁월한 항전공헌

 

항전기간중에 범소증은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운다. 항전동원회에서 그는 관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내전을 했는데, 그것은 백성들을 해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일본침략을 방어하는 것이다. 내가 집안이 거덜나더라도, 죽을때까지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일본놈을 쫓아버리겠다"

 

민국28년초에 제88군단군단장을 맡고 있던 범소증은 부대를 이끌고 사천을 나서, 강서 동향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다음 해 여름, 다시 절강서부로 이동하여 작전을 벌인다. 겨울에 태호 장저지구에서 수비를 맡는다. 일본군 제22사단 사단장인 토바시(土橋)가 한번은 친일군대 2만명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그리하여 의창 일대에서 격렬한 밀고당기는 전투가 벌어진다. 범소증은 친히 전선에 나가서 독려했고, 결국 일본군을 물리쳤다. 민국 30년 구정때, 백성들이 범소증의 부대를 위문했다. 범소정은 장저의 각계군인위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일본인과 싸운 것은 백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역시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잘 싸우지 못하게 되면, 백성들을 우리에게 침을 뱉을 것이다"

 

1942년 5월 28일, 범소증은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제15사단장 사카이(酒井) 중장을 죽인다. 주정 사단장이 폭약이 터져 사망한 사건은 일본군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일본육군역사상, "재직사단장이 전사한 것은 육군창건이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5월 29일, 범소증은 제88군단의 장병을 이끌고 다시 일본군 40사단의 소장인 여단장 고노(河野)를 부상입혀서, 연속으로 휘황한 전적을 만들어 냈다.

 

내전에는 흥미를 못느낌

 

비록 전선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범소증은 권력을 가지고 노는 장개석에 의하여 실권이 없는 제10집단군부총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이는 겉으로는 승진이지만, 실제로는 강등이다. 범소증은 화가나서, 민국31년초에 중경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자주 진보계인사들과 어울리고, 사상이 점차 반장개석으로 바뀌어 간다.

 

항일전쟁의 승리후, 범소증은 고축동을 면담하여, 원래의 부대로 돌아가서 개간할 것을 청한다. 고축동은 공산당과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범소증은 내전에는 흥미가 없어져서, 상해로 가서 민맹, 민혁등 조직이 이끄는 민주활동에 종사한다. 그는 상해에서 방회와 천군의 옛 부하들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익사(益社)"를 조직한다. 그리고 스스로 이사장이 된다. 익사는 사업과정에서 중공의 지하조직과 연결된다. 그리고 약물과 종이등을 소북의 해방구로 운송하여, 인민해방전쟁에 도움을 준다.

 

1948년 3월, 국민당은 '국민대회'를 개최하는데, 범소증은 '국민대회'의 대표가 된다. 부총통을 선거하기 전에, 장개석은 범소증등을 면담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과(孫科)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한다. 범소증은 이미 이종인(李宗仁)을 지지하기로 했다고 공공연히 발언한다. 장개석은 범소증이 면전에서 반발하자 아주 곤혹스러워 한다. 오래지 않아 범소증과 양소천등은 국민당에 불리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즉시 상해경비사령관 선철오등에게 체포하고자 한다. 범소증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망쳐서 위기를 벗어난다.

 

새삶을 살다

 

1949년 가을, 고축동의 알선으로, 장개석은 범소증을 국방부 천동정진군 총지휘관에 임명한다. 이해 겨울, 범소증은 소속병사 2만여명을 이끌고 거현의 삼회진에서 의거를 일으킨다. 인민정부는 그의 과거 잘못을 묻지 않기로 하고, 그를 의거장군으로 대우한다. 그리고 그를 호북성 장사시 군분구부사령관으로 발령한다.

 

해방후, 범소증은 중남군정위원회 참사, 해방군 4야전군 50군 고급참모, 하남성체육위원회 부주임, 성인민정부위원, 성인민대표 및 정협위원등의 직위를 역임한다. 문혁중에는 하룡(賀龍)의 사건에 연루되어 몇년간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하룡에 불리한 자료를 얻어내려고 하자, 그는 하룡에게 한마디도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룡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사인방'이 분쇄된 후, 범소증은 명예회복을 한다. 그리고 전국정협위원이 되어, 급여를 보완지급받고, 주택을 늘여주어, 정주에서 노년을 보낸다.

 

1977년 3월 5일, 전설적인 삶을 살았던 범소증은 정주에서 서거한다. 향년 8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