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굉화(汪宏華)
제갈량과 방통은 모두 <<삼국연의>>의 최고급 모사(謀士)이다. 나란히 일룡일봉(一龍一鳳)으로 불린다. 대은사(大隱士) 사마휘(司馬徽)는 일찌기 이들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복룡(伏龍), 봉추(鳳雛), 두 사람중 하나를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재주와 뜻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유비(劉備)는 한 때 용봉을 둘 다 얻었는데, 왜 천하를 안정시키지 못했을까?
1. 사대모사의 재지에는 시간차, 공간차, 음양차가 존재한다.
<<삼국연의>>에는 4명의 비범한 모사(謀士)가 있다: 정욱(程昱), 서서(徐庶),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 그들은 모두 수경선생(水鏡先生) 사마휘와 내왕이 있었을 뿐아니라, 그 순서대로 재주가 '10배'나 차이가 난다고 스스로 겸손해 했다. 사실, 그들은 유비의 이성형제, 제갈의 동성형제, 조조의 동/이성혼합형제(조, 하후씨 포함), 손씨부자형제, 사마가족과 마찬가지로, 동문수학을 한 하나의 집단에 속한다. 그저 그들간의 관계가 비교적 느슨하고, 은형적이고, 철학을 신법가(新法家), 신유가(新儒家)에서 다시 유법혼합(儒法混合)의 정신측면으로 갈라져서 추진했을 뿐이다.
그들간의 소위 "10배"라는 것은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시간차이다. 고수들은 왕왕 멀리 보고, 참을성이 있어, 출도하는 것이 보다 늦다. 이들 4사람이 출도한 순서는 정욱, 서서, 제갈량, 방통이다. 둘째는 공간차이다. 고수일수록 통제능력이 뛰어나서 관리범위가 넓다. 그리하여 십리지재, 백리지재, 천리지재등의 말이 나온 것이다. 그들의 처음에 세운 공적도 확실히 이와 같다. 정욱은 동아현(東阿縣)을 취했고, 서서는 번성(樊城)을 취했고, 제갈량은 형주(荊州)를 취했고, 방통은 서천(西川)을 취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정욱, 제갈량의 평생업적이 서서, 방통의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이것은 또 무슨 연고인가? 원래 그들은 세번째 방면의 차이가 있다. 바로 음양차이다. 앞의 "10배"라는 것은 모두 표면적인 졸업시험성적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지모(智謀) 혹은 양모(陽謀)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실전에서, 어떤 사람들은 충효나 신의를 배신하고, 권모(權謀)나 음모(陰謀)를 쓴다. 4사람중에서 방통, 서서는 양모에 능하고, 제갈량, 정욱은 음모에 능했다. 그중 제갈량은 정욱보다 뛰어났다. 양모에 충실한 사람들은 왕왕 충순(忠順)하고, 음모에 정통한 사람은 왕왕 역반(逆反)한다.
여기서 설명할 것은 역모라는 것은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맹수홍수와 같지만, '민족'이라는 생명체에 있어서는 이것은 불가결의 음양순역 즉 신진대사이다. 그저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외에 병불염사(兵不厭詐, 병법에서는 속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손자는 심지어 자기의 양모도 모두 궤계(詭計)로 보았다. 그리하여 음양과 충역은 모두 그 자체로 우열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핵심은 균형있게 양자를 장악하고, 합리적으로 운용하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모는 공심술(攻心術)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양존음비(陽尊陰卑, 양을 받들고 음을 낮추다)의 봉건사회에서 음모는 스승이나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고, 그저 스스로의 깨달음이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익혀야 한다. 그러나 일단 보유하게 되면, 출기제승(出奇制勝)할 수 있고,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정욱, 제갈량은 바로 모략에서 전면적이어서 랭킹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방통은 처음에는 완전히 유비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먼저 동오(東吳)로 가 있었던 것은 제갈량, 서서와 3군데에서 서로 호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적벽에서 승리하면서 우회적으로 유비를 구한다. 그리하여 적벽대전이 끝나자, 방통은 직접 유비에 투신한다. 유비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최저층부터 시작하고, 노숙과 제갈량의 추천서를 내놓지 않는다. 과연 그는 뢰양(耒陽)에서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여 유비의 마음을 얻는다. 그러자, 제갈량도 어쩔 수 없이 방통이 자신보다 10배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방통이 만일 누군가의 사람이 되고자 했다면 그는 어쨌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문을 두드려 여는 재주도 없으면서 감히 "봉추"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초 조조(曹操)의 수채(水寨)에도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동오의 '면접시험'때에는 손권에 부닥쳤는데, 이것은 밉보이지 않으면서 몸을 빠져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제갈량에 대하여, 필자는 이미 <<삼국연의의 삼국오방(三國五方) 구조 파해>>등 글에서 상세하게 그가 출산하기 전에 이미 반유비, 탈천하의 웅심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사람들이 공명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으나,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에 숨은 의미이다. 다만 그들 4형제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것도 완전히 합리적이다. 여기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2. 제갈량은 먼저 방통을 청하고 나중에 방통을 폐하려고 한다.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서 형주를 차지했다. 그러나, '백성은 강하고 땅은 험한' 서천에 대하여는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에 대한 계책도 없었다. 어떻게 인의를 가장하는 유비를 설득시켜 유장으로부터 서천을 빼앗게 해야할지도 몰랐고, 서천으로 가서 다시 한번 적벽대전을 벌일 생각도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주유의 조문을 한다는 핑계로 동오로 가서 자기보다 한수높은 방통에게 요청한다. (여기서 제갈량의 또 다른 속셈은 유씨종친들 앞에서 자신은 친소관계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자신이 다른 뜻을 품은 것을 숨기고, 충성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하나는 형주를 지키고, 하나는 서천을 공격한다. 뒤에 유비의 오른팔, 왼팔이 된다.
방통은 확실히 제갈량보다 재능이 있었다. 그는 유비가 형주를 취할 때는 반드시 인의를 가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유장의 호감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장이 있는 서천으로 와서는 철저히 안면몰수하고 '압박'해야 했다. 이론적으로, 그는 그저 '역취순수(逆取順守)'의 네 글자로 유비를 가볍게 설득한다. 전공에 있어서, 그는 그저 황충, 위연이라는 제갈량이 버린 두 명의 말장(末將)을 이용하여 서천을 뚫고 들어간다.
그러나, 서천을 얻기 직전, 큰 공을 세우기 직전에, 사정이 전혀 다르게 바뀐다. 제갈량은 방통에게 사망협박서신을 보낸다. 이 조치는 정욱이 서서를 속인 것과 대동소이하다. 정욱은 서서의 효심을 이용하여 먼저 서서의 모친을 데려가고 다시 서서를 항복하도록 유인한다. 제갈량은 방통의 유비에 대한 충성을 이용한다. 유비는 방통을 아주 아꼈으므로, 먼저 유비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다시 방통을 없애야 했다. 두 음모가는 마치 배구선수처럼 먼저 공을 상대방의 두 사람 중간으로 스파이크를 넣어서 그들이 서로 양보할 때 실수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일의 경과는 이렇다: 광한사람 팽양이 유비에게 적측에서 누군가가 부강의 물로 위연, 황충의 부대를 몰살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성(罡星)이 서방에 있고, 태백이 이 땅에 임하니, 불길하다.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이 정보는 유비의 수만명 생명을 구했을 뿐아니라, 적측의 주모자인 냉포(泠苞)를 참하게 되니, 화흉위길(化凶爲吉)의 결과가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위기를 불러왔는가? 유비이다. 사천장수 냉포는 이전에 위연에게 생포된 바 있다. 다만 유비는 그를 석방했다. 위연은 "이 자는 돌려보내선 안됩니다. 한번 벗어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나는 인의로 사람을 대한다. 그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죽고 나살기식의 전선에서 아직 우세를 확립하지도 못한 시기에, 이렇게 상황에 부합하지 않게 함부로 인의를 남발하는 것은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는 짓이다. 인의는 모두 인의로 보답한다면, 역취(逆取)라는 것이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인의를 인의로 보답한다면, 조조가 땅 한조각이라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볼 때 유비의 인은 이미 우인(愚仁)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유씨집안의 유전병이 발작한 것이다. 이전에 조조를 대항할 때 진인가의(眞仁假義)를 잘 구분했던 때의 그 유비가 아니었다. 이번에 팽양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방통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막 위험을 벗어난 후, 제갈량은 마량(馬良)을 보내어 서신을 전한다: "제갈량이 밤에 태을수를 꼽아보니, 금년이 계사년이다. 강성이 서방에 있다. 건상을 보니, 태백이 낙성지분에 임해있다; 주장수의 몸에 흉다길소하니, 조심하라." 동일한 성상(星象)에 대하여, 제갈량은 두번째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방통은 제갈량의 선의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그리고는 나아가서 세번째 해석을 내놓는다: "방통도 태을수를 뽑아보았는데, 강성이 이미 서쪽에 있으니, 주공이 서천을 얻을 것이지, 주공에게 흉사는 없을 것이다. 방통도 역시 천문을 점쳐보니, 태백이 낙성에 임하였는데, 먼저 냉포를 참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흉조였다. 주공은 의심하지 말고 병사를 진군시켜야 한다." 하나의 성상에 3가지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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