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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삼국연의

역사상 초선(貂蟬)은 실재했는가?

by 중은우시 2007. 1. 16.

 

 

 

초선이라고 하면,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고전소설 <<삼국연의>>에 상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녀는 삼국시대의 미녀로서, 사도(司徒) 왕윤(王胤)의 집안에 있는 가기(歌妓)였는데, 왕윤을 도와 동탁을 제거하기 위하여 연환계를 써서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이간시켰고,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제거하게 하였으며, 나중에 여포의 처가 된다.

 

그러나, 정사(正史)를 살펴보면 초선은 나오지 않는다. <<삼국지. 여포전>>에는 그저 여포가 동탁의 시비(侍婢)와 사통(私通)하였다는 말이 나올 뿐 시비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소설가는 정녕 아무 것도 없는데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란 말인가?

 

성도(成都) 북쪽교외의 한 문화참의 대()씨성의 간부에 의하면 1971, 현지에서 철로지선을 만들 때, 일찍이 큰 묘를 파낸 적이 있는데, 묘안에 두개의 큰 비가 있었으며, 하나는 예서(隸書), 하나는 전서(篆書)로 되어 있었는데, 비문의 기재에 의하면 묘혈의 주인이 바로 초선이었다고 한다. 68세의 노인인 증흥발(曾興發)의 회고에 의하면, 1971 5월의 어느 날, 성도철로국의 어떤 공정대가 이 곳에서 철로를 놓았는데, 포크레인으로 파다가 길이 약 8미터, 넓이 약 6미터, 깊이 약 4미터의 큰 구멍을 발견하였으며, 사방의 벽은 모두 채색벽화로 되어 있었다. 이어서 두 개의 비석을 발굴한다. 증흥발은 예서로 된 비문을 집으로 가져왔는데, 비는 약 80센티미터의 네모난 것이었고, 두께는 약 6센티미터였으며, 청회색이었고, 50킬로그램쯤 되었다. 전서비는 마을의 아이들이 마구 쳐서 부숴버렸고, 예서비는 나중에 다른 사람이 가져가버렸다. 성도시 38중학의 은퇴한 역사교사인 임요청은 그가 당시 친히 이 비문을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초선의 장녀의 비였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부인은 초선의 장녀라. 부인을 따라 촉에 들어오고…”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왕국유선생은 지상문헌과 지하문물은 서로 방증이 될 수 있고 하였다. 지금까지 초선에 관한 역사문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당나라 사람의 기록에서 일찍이 사서에서 조선(刁蟬)에 대하여 기재한 내용을 발견했다. 당나라 <<개원점경(開元占經)>>(이 책은 현재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의 권33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형혹(熒惑)이 수녀(須女)를 범한다. 점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 <<한서통지(漢書通誌)>> 조조가 뜻을 얻지 못하여, 먼저 동탁을 유인하고자 조선(刁蟬)을 바쳐 그를 미혹되게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서통지>>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위의 십여글자를 가지고 고증해볼 수밖에 없다.

 

<<개원점경>>은 당나라 개원연간에 만들어진 일종의 점성학 책이다. 여기서 형혹이라는 것은 화성(火星)을 말한다. 화성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여 사람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 수녀라 함은 이십팔수중 여수(女宿)를 의미한다. 4개의 별이 있는데, 위치는 직녀성의 남쪽이다. 현대천문학에서는 물병자리의 네개 별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바는 화성이 여수로 운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서통지>>에서 말하는 것은 조조가 조선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희곡에서는 왕윤이 초선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모두 동탁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혹시 조조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조조가 조선을 바친 것을, 왕윤이 초선을 바친 것으로 바꾸지는 않았을까?

 

현재 중요한 문제는 소설가들이 말하는 초선이 이미 실전된 <<한서통지>>에서 말하는 조선과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하는 점이다. 이 미녀의 성은 초()이고 이름이 선()인 것으로 보인다. 씨성은 <<만성통보. 소운>>에서 초발(貂勃), 제나라의 신하. <<성원>>에 나온다고 되어 있다. <<전국책. 제책6>>에는 초발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는 말이 나온다.

 

<<개원점경>>에서 인용한 <<한서통지>>조선(刁蟬)의 성 () <<통지.씨족략4>>조씨(刁氏). <<풍속통>> : 제나라 대부 수조(竪刁)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조씨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청나라때 고염무의 <<일지록>> 23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씨족의 책에서 진한이전을 언급하는 것은 대부분 믿기 어렵다.(, )씨는 <<성보>>에서 제나라 대부 수도(竪刀, 竪刁)의 후예이다. 호삼성이 말하기를 수도가 어찌 후예가 없겠는가? 한서. 화식전>>에 도간(刀間)이 있다. 고서에서는 도()와 초()가 통하고, 제상왕때에 초발이 있다 황여성이 전씨의 글을 인용한데서는 ()에는 초()의 발음이 있다. 나중에는 구별하여 조()라고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의 성씨 초()는 조()로 쓰기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소설가가 쓴 왕윤이 초선을 바쳤다는 내용은 즉, 사서 <<한서통지>>에서 언급한 조조가 바쳤다는 바로 그 조선이다. 소설가가 말한 초선은 역사상 확실히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미녀는 일찍이 동탁을 처리하는데 조조를 도와준 적이 있었던 것인데, 나중에 소설에서는 왕윤으로 바꾸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