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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삼국연의

방통의 양모(陽謀)와 제갈량의 음모(陰謀) (II)

by 중은우시 2008. 12. 8.

3. 방통은 유비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죽음으로 현자에게 양보한다.

 

용봉의 의견차이로 유비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한편으로 그는 방통이라는 능력이 뛰어난 모사를 아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든 앞일을 신처럼 예측하는 제갈량도 믿는다. 만의 하나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유비는 형주로 물러나기로 결정한다. 다음 날, 그는 자기의 꿈을 방통에게 얘기한다. "내가 밤에 한 신인을 만났는데, 손에는 쇠몽동이를 쥐고 내 오른쪽 엉덩이를 때렸다. 내 엉덩이가 아직도 아픈 것같다. 이번에 가는 것이 좋지 않지 않을까?" 이전까지 사도(邪道)를 믿지 않던 방통이 어찌 이런 연약하고 무능한 언행을 참아넘길 수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장사가 전투에 나섬에 죽거나 다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어찌 꿈을 꾼 일로 의심을 품을 것입니까?" 그리고 또 말한다: "주공은 제갈량에 미혹되어 있다. 그는 방통이 혼자서 큰 공을 세우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러 이런 말을 해서 주공의 마음을 흐트려 놓은 것이다. 마음에 의심이 드니 꿈도 꾸는 것이다. 무슨 흉할 일이 있는가? 방통의 이 말을 진심이다. 주공은 더 이상은 다른 말을 하지 말고, 원래 정한 바대로 진공하자"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첫째는 용감하고, 둘째는 충성스러우며, 셋째는 유물론적이며, 넷째는 공을 탐하는 소인과 같이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통이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그의 유비에 대한 충성심은 급전직하한다. 더 이상 유비를 위하여 힘을 쓰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유비는 우인우의(愚仁愚義)할 뿐아니라, 우신(愚信)하기까지 한다. 어디 하나 쓸모가 없는 자인 것이다.

 

특히 언급해야 할 일은 <<삼국연의>>에서 여러번 나오는 점성술은 나관중이 보기에 모두 사람을 미혹시키는 방술이거나 공심술이다. 팽양은 먼저 부강의 지리를 분석한 후, 유비가 믿지 않을까봐 성상을 결합해서 말한 것이다. 방통은 성상을 필승의 신념을 주려는 심리적인 암시로 활용했다. 만일 점성술이 진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제갈량과 방통은 왜 부강의 리스크를 예측하지 못했는가? 그들 둘이 팽양에 미치지 못한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삼국연의>>의 모사는 맹세를 할 때 "죽음"을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일단 이 말을 꺼내면 바로 죽을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곽가(郭嘉)는 북벌때 조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승상의 대은에 감복합니다. 비록 죽더라도 만의 하나를 갚지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방통은 곽가와 마찬가지로, 내심으로는 주공에 반대하지만 겉으로는 충의를 가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개인생사와 국가앞날의 사이에서 후자를 택한다. 비록 곽가는 유비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지만, 최소한 그의 신유가사상이 조조의 신법가사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알았다. 방통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는 제갈량이 나중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줄은 몰랐지만, 최소한 그의 "유가법가혼합"이 유비의 신유가보다 뛰어나고 미래의 발전공간이 더욱 크다는 것을 알았다.

 

방통이 충의의 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든 속으로든 직접적으로 주공에 반기를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도 천하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제갈량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한다. 방통은 체조운동선수처럼, 앞으로 나가는 관성이 너무 커서 멈출 수가 없을 때, 임시조치로 절묘한 뒤집기를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유비에 충성하고 그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유비를 차도살인(借刀殺人)하는 것이다. 동작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남자와 전사로서의 존엄을 유지한다. 전장터에서 죽을 지언정 도망병이 되지는 않는다. 이때의 방통은 물러나서 목숨을 온전히 보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유비처럼 생을 탐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2. 자기의 죽음으로 서천정벌의 본질을 바꾸고자 한다. 침략전을 복수전으로. 3. 자기의 죽음의 귀책을 유비에게 돌렸다. 왜 그는 오래 타던 말이 종래 그런 적이 없었는데 돌연 말굽을 잃는가. 그도 의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던가? 아니다. 그는 유비가 이러한 미신이 있는 것을 알고 그의 방식대로 놀아준 것이다. 그리하여, 유비는 그에게 관심을 표하기 위하여 그와 말을 바꾼다. 유비의 말을 타고 죽는 것은 결국 그 책임을 유비에게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유비는 제갈량에게 잘못을 추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꿈에 신인이 엉덩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서 제갈량을 의심한다는 것이고, 제갈량만이 그의 마음 속의 신인이라는 것이다. 4. 그는 죽음을 '낙봉파(落鳳坡)'로 선택하는데, 이것은 숙명론적인 유비를 안위시키는 것이다: 나의 명은 죽을 때가 되었다. 그러니 당신을 너무 자책할 것이 없다. 5. 방통은 왜 반복적으로 제갈량의 서신이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을까? 왜 나무가 가득한 좁은 길로 군대를 이끌고 갔을까? 그리고 위연의 전대(前隊)와 멀리 떨어졌을까. 자신은 닭모가지 비틀 힘도 없으면서 가장 위험한 후대(後隊)에 남았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위연에 바싹 붙어서 행군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원래, 방통은 행군의 모습으로 제갈량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기꺼이 전공과 자리를 당신에게 양보하겠다. 당신의 손에 죽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험악한 마음씀씀이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이로써 볼 때, 제갈량은 확실히 방통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자가 아니다. 만일 거기에 무슨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제갈량이 먼저 장거리심리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방통은 이를 정확하게 막아낸다. 미사일의 진정한 작용은 방통으로 하여금 유비가 우인우의한 이외에 겁이 많고 멍청하게 믿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군에 반항하려는 결심을 굳혔다. 방통은 미사일 소리만 듣고 쓰러진척 한 것이다.

 

사실상, 방통과 같이 천군만마를 지휘할 수 있는 초급모사가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를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뛰어난 모사라고 하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승리를 취할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방은 무명의 사천장수 장임(張任)이었음에야. 예를 들어, 제갈량은 그보다 뛰어난 사마의(司馬懿) 앞에서도 항상 도망칠 수는 있었다.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의 화살에 가슴을 꿰뚫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일대봉추가 정교하게 계획한 자살방식이었다는 것을. 세간에 이보다 더한 대지약우(大智若愚), 사신취의(捨身取義)의 행위언어가 있을까? 의문의 여지없이, 방통은 당시 유일하게 사천을 차지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다만 그는 여명이 오기 직전에 의연히 재능은 자기보다 한단계 아래이지만, 지향(志向)은 한단계 높은 제갈량에게 릴레이식으로 양보하고만다.

 

나관중의 수법은 뛰어나다. 표면적으로 보면, 성상(星象)의 3가지 해석이 모두 맞는 것으로 되지만 사실상 모두 인위적인 조종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더 이상 성상을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4. 공명은 마찬가지의 자태로 자기를 회복하고, 사마천하를 이루게 한다.

 

영웅의 견해는 서로 비슷하다. 공명이 동문친구인 방통의 뜻과 흉금을 모르겠는가? 그저 그는 눈물을 닦은 후 바로 사천으로 들어간다. 동시에 반유비의 실질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장비와 조운을 전출보내고, 관우 혼자만 형주를 지키게 한다. 관우부터 시작하여 유비와 이성형제의 끈을 잘라낸다. 제갈량은 최종적으로 방통의 바람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 먼저 유장, 유비를 멸하고, 서천에서 유비 촉한의 인정(仁政)보다 선진적인 유법혼합신정을 펼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갈량이 나중에 똑같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했을 때, 그는 방통을 본받아 이성적으로 현인에게 양보한다: 겉으로는 촉한에 충성하면서, 속으로는 사마의에게 투항한다. 그는 사마의의 양모는 자기보다 100배가 뛰어나고, 음모는 자기보다 10배가 뛰어나다는 것을 안다.

 

많은 모사들, 곽가로부터 정욱까지, 서서로부터 제갈량까지, 방통까지, 특기와 가치관은 아마도 각자 달랐을 것이다. 다만 모두 하나같이 사나이들이다. 물러서지 않고, 강인한 사람들이다 일생을 후회없이 살고 모조리불사른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의문을 지녔다. 유비는 일룡일봉을 얻었는데, 왜 천하를 얻지 못했을까? 원래 그는 그저 봉의 털, 용의 뿔만을 만졌을 뿐이다. 진정으로 그들을 얻은 적은 없다. 사마소(司馬昭)만이 승룡가봉(乘龍駕鳳, 용을 타고 봉을 부리다)의 능력을 지녔다. 등애(鄧艾)가 말한 "봉혜봉혜, 고시일봉(鳳兮鳳兮, 故是一鳳)"이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종회(鐘會)가 정군산에서 제갈량의 현신을 감응한 것을 기억하는가? 이것은 바로 등애가 방통식의 봉이고 종회가 제갈량식의 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일충일역이다.

 

"용봉은 항상 있다. 그러나, 천하를 얻는 주공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