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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팔선(八仙)은 역사상 실존인물인가?

by 중은우시 2008. 11. 20.

 

 

 

글: 양국선(楊國選)

 

팔선은 민간에서 좋아하는 신선이다. "팔선과해, 각현신통(八仙過海, 各顯神通,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는데, 각자 서로 다른 신통력으로 건너다)"이라는 성어는 중국에서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팔선은 역사상 실존한 인물인가? 팔선의 신화전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어떤 사람의 연구에 따르면, "팔선"이라는 단어는 철괴리(鐵拐李)등 팔선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그들은 한(漢), 육조(六朝)때부터 이미 "팔선"이라는 단어가 있었으며, 원래는 한진(漢晋)이래로 신선가들의 환상 속의 한무리 신선이었다. 성당(盛唐)때는 음중팔선(飮中八仙)이라는 말도 나온다. 한당시대에 "팔선"은 그저 통상적인 명칭이었고, 철괴리, 종리권(鍾離權)등 이름과 성을 가진 팔선과는 아직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현재 공인된 팔선은 철괴리, 종리권, 남채화(藍采和), 장과로(張果老), 하선고(何仙姑), 여동빈(呂洞賓), 한상자(韓湘子), 조국구(曹國舅)를 말한다. 이는 명나라 중엽때 비로소 확정된 것이다.

 

조경심의 <<팔선전설>>에 따르면, 원나라때 심지어 명나라전기까지는 팔선이 도대체 누구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하여 아직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다. 원나라때 마치원(馬致遠)의 <<여동빈삼취악양루>>에서 여덟명의 신선이 나오는데, 하선고의 이름은 없고, 서신옹(徐神翁)이 대신 올라있다. 또 다른 희극에서도 '중남경녀(重男輕女)"의 경향을 보인다. 하선고 대신 장사랑(張四郞)이 들어가 있다. 어떤 경우는 하선고가 들어가고 조국구가 빠진다; 심지어 장과로, 하선고가 빠지고 풍승수(風僧壽), 원호자(元壺子)가 들어있기도 하다. 다만, 서신옹은 팔선에서 자주 이름을 드러내는데, 나중에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선고로 대체되었다. 명나라때 오원태의 <<동유기>>와 탕현조의 <<한단몽>>이 나온 이후 팔선은 현재 유행하는 명단으로 고정되게 된다.

 

팔선은 사람들이 아무 근거없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역사인물을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도대체 어느 역사인물인지에 대하여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철괴리는 일설에는 성이 이씨이고 이름이 홍수(洪水)이며, 수나라때 사람이라고 한다. 노신은 <<중국소설사략>> 제16편 <<명지신마소설>>에서 다시 철괴리를 언급하는데 이름을 현(玄)이라고 했다; 조익의 <<해여총고>>에서는 철괴리의 본래 성은 유(劉)라고 했고, 어떤 소설에서는 그의 성이 악(岳)이라고도 하고, 요(姚)라고도 한다.

 

장과로의 원래 이름은 장과(張果)이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당나라때 정처해의 <<명황잡록>>등의 책이다. 장과라는 사람은 <<구당서>>, <<신당서>>에 모두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다. 그는 황당하게 요임금때 태어났고, 장생불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관적과 생년을 모른다고 한다. 무측천과 당현종은 이를 믿었던 것같다. 사신을 보내서 그를 산에서 나오도록 청하고 일찌기 궁중을 드나들기도 했다.

 

하선고의 이야기는 송나라때 사람들이 쓴 <<집선고>>에 나온다. 그녀는 당나라때 영릉 사람이다. <<속통고>>에서는 그녀가 무측천때 사람이며, 광주 증성에서 태어났고 하태(何泰)의 딸이다.

 

한상자는 대명이 자자한 문학가 한유(韓愈)의 조카손자이고, 진사출신이다. 관직은 대리승(大理丞)에까지 올랐다. 그가 신선에 된 전설이 최초로 나오는 것은 당나라때 당성식의 <<유양잡저>>이다.

 

조국구에 대하여는 <<속문헌통고>> 및 명나라때 진인석의 <<잠확류서>>에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 승상 조빈의 아들이고, 조태후의 동생이다. 그런데, <<송사>>에 기록된 조빈의 아들이고 조태후의 동생은 조일(曹佾)이다. 그런데 그가 신선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외에는 조국구가 신선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조익은 <<해여총고>>에서 이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냈다.

 

어떤 사람은 "여동빈, 종리권, 남채화는 순수히 민간전설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이 세 사람도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가 있다. 팔선의 내력중에서 이야기가 가장 많이 전해지고 이견이 가장 많은 것은 여동빈이다. 역사상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여동빈의 성은 여(呂)이고 이름은 암(巖)이며 당나라말기때 사람이라고 한다. <<전당시>>, <<사종>>에는 모두 여동빈의 시가 실려있다. 조경심은 <<팔선전설>>에서 송나라때 여동빈에 관한 기록 다섯가지를 열거했고, 송나라때, 나대경의 <<학림옥로>>, 홍매의 <<이견지>> 및 <<집선전>>등의 책에 모두 기록이 있다고 지적했다. 명나라때 여동빈에 관한 기록은 더욱 많아진다. 어떤 설에 따르면 그는 당나라때 예부시랑인 여위의 후손이고, 당나라말기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어떤 설에서는 그가 함통에 진사급제를 했고, 현령까지 지냈다고 한다. 그의 관적에 대하여도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나라 경조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송사. 진박전>>에서는 그가 당나라 관서사람이며, 1백여세를 살았다고 되어 있다. 그의 자(字)인 "동빈"에 대하여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풍길증은 <<문회보>>에 실은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시국이 혼란하고 속세의 무상함을 깨달아, 관직을 버리고 처를 데리고 은거했다. 노부부는 산동(山洞)에 거주했는데,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존중했다. 그리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팔선중에서 여동빈과 장과로 두 사람은 정사에 기록이 나온다.

 

종리권은 <<전당시>>권31전에서 당나라 함양사람이라고 칭했다. 호는 화곡자(和谷子)이다. 일찌기 노인을 만나서 선결(仙訣)을 전수받고, 나중에 공동산에 들어간다. <<집선전>>에서는 그러나 그가 당나라말기에 종남산에 들어갔다고 적었다.<<전당시>>에는 종리권의 시 한수가 전해진다. 그는 스스로 "천하도산한종리권(天下都散漢鍾離權)"이라 했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은 그를 "한종리"라고 오해하고 있다. <<역대신선사>>에서는 그를 한나라때 신선으로 분류했는데, 한나라때 대장군 종리권이라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 어떤 사람은 그를 한나라때 장군 종리매(鍾離昧)라고 억지로 주장하기도 해서, 가면 갈수록 황당해졌다.

 

남채화에 관하여는 육유의 <<남당서>>등에 모두 기록이 있고, 당나라말기의 은사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여름에 솜옷(絮杉)을 입고, 겨울에는 자주 얼음눈위에 누워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주 장안에서 노래했고 스스로를 '남채화'라고 하였다. 원나라때 <<남채화>>라는 잡극에서는 그녀의 원명이 "허견(許堅)"이며, 남채화는 예명이라고 하였다. <<전당시>>에는 허견의 시가 있는데, 그를 여강사람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팔선의 내력에 대하여 청나라때 이미 적지 않은 학자들의 주의와 고증을 이끌어냈다. 건륭가경학파의 조익은 <<해여총고>>에서 한상자는 "처음에는 그가 이술을 행한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하며 억지로 팔선에 집어넣았다고 했다. 조국구가 신선이 된 전설은 <<송사>>의 조일에 관한 기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등등을 언급했다. 노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팔선의 이야기에 대하여 평가한 바 있다. 이들 이야기는 최초에는 인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일부 민간이야기를 수집하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사회에서의 영향력은 크다고 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중국출판부서에서는 <<사유기(四遊記)>>를 간행한 바 있다. 그 중에 <<동유기(東遊記)>>가 있고, 이는 팔선과해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사실, 팔선의 변화과정은 아주 재미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팔선의 자리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았고, 자주 다른 신선이 와서 빼앗으려고 했고, 당선자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올라앉으려고 했다. 보기에 그들이 무슨 철밥통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사적이 탁월하고, 민중들이 좋아하여 이름은 역서에 남기고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