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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신비와 공포의 상서(湘西) 간시(赶屍)

by 중은우시 2010. 8. 25.

출처: <<무술의세계>>, 대륙교문화전매 편저

 

묘족(苗族)의 집단거주지중 하나인 상서(湘西, 호남성 서부)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가계(張家界)가 있다. 또한, 민간에는 신비막측한 '간시(赶屍)"라는 무술(巫術)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직업이다. 교통이 불편했던 해방전에 상서는 십만대산에 둘러싸여 있고, 길은 구불구불하고 험준하다. 낙엽귀근을 중시하는 상서사람들은 일단 타향에서 객사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관을 들고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간시라는 오래된 직업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상서간시는 놀랍고 신비스러운 색채를 띄게 되었고,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이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무술에 관하여 상서출신의 유명한 작가인 심종문(沈從文)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진주(辰州)를 지나는데, 그 곳은 진사(辰砂)가 나는 곳이며, 또한 간시를 할 줄아는 사람이 있다. 눈복이 있다면, 죽은 시신들이 도로를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동차가 가까이 오면, 갓길로 피해주기까지 한다. 살아있는 사람과 완전히 똑같다." 이 말은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묘사해준다.

 

간시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수천년전에, 묘족의 조상인 아보(阿普, 묘족말로 노인, 할아버지를 뜻함) 치우(蚩尤)가 병사를 이끌고 황하의 가에서 적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참가한다. 전쟁터에는 시신이 즐비하고, 피는 흘러 강을 이루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 후방으로 물러나는데, 사병들이 부상당한 병사를 모두 들고 갔다. 아보 치우는 곁에 있던 아보 군사에게 말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죽은 형제들을 버려두고 갈 수가 없다. 네가 법술로 이들 형제들을 고향으로 데려가줄 수 없겠는가?" 아보는 말한다: "좋다. 우리가 옷을 바꿔입자. 네가 '부절(符節)'을 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해라, 나는 뒤에서 끌고 가겠다." 이리하여 아보군사는 아보치우의 모습을 하고는, 전사한 형제들의 시신 중간에서, 묵념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신령에게 기도를 드린 후, 그들 시신들에게 크게 소리친다: "죽은 형제들이여. 이곳은 그대들이 몸을 눕힐 곳이 아니다. 지금 억울하게 죽은 것은 실로 슬 픈 일이다. 고향의 부모는 여전히 너희를 기다리고, 예쁜 처와 어린 아들은 너희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너희의 혼백은 방황할 필요가 없다. 일어나라." 원래 땅위에 쓰러져 있던 시신들이 한꺼번에 모두 일어났다. 그리고 아보 치우가 높이 들고 있는 '부절'을 따라 뒤에서 차례차례 남쪽으로 걸어갔다. 적군의 추격병이 쫓아왔다. 아보치우와 아보군사는 함께 손을 잡고 큰 안개를 만들어 적군이 미혼진에 빠지게 만들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전에, 사람들은 자주 상서의 산촌에서 시신이 길을 걷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날이 밝기 전에, 작은 객점에는 한무리의 시신 일행이 들어온다. 시신은 모두 넓고 큰 흑색 시포(屍布)를 입고 있다. 이들 흑색시포를 입은 시신의 앞에는 손에 동라(銅鑼)를 손에 든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살아있는 사람을 현지 사람들은 간시장(赶屍匠)이라고 부른다. 그는 한편으로는 소에 든 작은 음라(陰鑼)를 두드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체무리를 앞으로 걸어가게 만든다. 그는 손에 섭혼령(攝魂鈴)을 흔들어, 밤길가는 사람들을 피하게 하고, 개가 있는 집에서는 개를 가둬두도록 알리는 것이다. 시체가 둘 이상이면, 간시장은 밧줄로 시체를 하나하나 묶는다. 7,8척의 거리를 두고 하나씩 묶는다. 한밤중에 길을 갈 때, 시체의 머리에는 모자를 씌우고, 이마에는 누런종이부적에 글자를 써서 붙여둔다. 길에는 "사시객점(死屍客店)"이 있다 .이 신비막측한 사시객점은 사시와 간시장만 투숙하고, 일반인은 투숙하지 않는다. 문은 일년내내 열려 있다. 두 문짝의 뒤쪽은 시체를 놓아두어 쉬게 하는 곳이다. 간시장은 시체를 끌고 가며 날이 밝기전에 '사시객점'에 도착하고, 어두워지면 조용히 떠나간다. 시체는 모두 문짝 뒤쪽에 차례차례 벽을 따라 서 있는다. 큰 비가 내려서 가기 힘들면 객점에서 며칠 밤낮을 머물기도 한다.

 

현대민족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상서의 민간에는 자고이래로 간시라는 이 직업이 있었다. 이 직업을 배우려면 반드시 2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담량이 커야 하고, 다른 하나는 신체조건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며, 반드시 스승을 모셔야 한다. 간시장은 함부로 제자를 받지 않는다. 제자는 가장이 먼저 문서를 작성한 후, 간시장이 면접을 본다. 일반적으로 나이 만16세이상, 키 170센티미터 이상을 요구한다. 또 하나의 아주 특수한 조건이 있는데, 용모가 추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볼때 간시장은 먼저 응시자에게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게 한 다음 회전을 하게 하고 돌연 그 자리에 서게 한다. 그리고 나서 즉시 동서남북을 구분하게 시킨다. 만일 구분해내지 못하면 불합격이다. 곧이어 간시장은 응시자에게 물건을 찾게 하고, 짐을 지게 한다. 마지막에 또 하나의 면접시험이 남는데, 그것은 바로 간시장이 오동나뭇잎을 하나 깊은 산 속의 무덤 위에 놓아두고, 한밤중에 응시자에게 찾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그가 간시장을 할만한 담량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세 관문을 순조롭게 통과한다면 간시장의 제자가 될 수가 있다. 제자가 익혀야 하는 재주에는 부적을 그리는 것, 36가지 간시공(赶屍功)이 있는데, 여기에는 참립공(站立功, 세우는 기술), 행주공(行走功, 걸어가게 하는 기술), 전만공(轉彎功, 방향을 트는 기술), 하파공(下坡功, 내리막을 내려가는 기술), 과교공(過橋功, 다리를 건너는 기술), 아구공(啞狗功, 개가 짖지 못하게 하는 기술)등이 있다. 이는 모두 시체를 콘트롤하기 위한 것이다.

 

평상시에, 간시장은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농사에 종사한다. 간시업무를 맡을 때에만 그들은 옷을 갈아입고, 간시를 하러 떠난다. 간시장은 일을 맡긴 사람의 요청에 따라, 특별히 만든 누런종이를 꺼내어, 죽은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사망년원일, 성별등을 이 누런종이에 쓴다. 그 후에 부적을 한장 그려서, 누런종이에 붙인다. 마지막으로 이 누런종이를 자신의 몸 속에 감춘다. 간시장은 아주 특별하게 입는다: 날씨가 어떻든간에, 짚신을 신고, 청포장삼을 입으며, 허리에는 흑색요대를 하며, 머리에는 청포모자(靑布帽)를 쓴다. 허리주머니에는 부적을 넣어둔다.

 

관련문헌기록에 따르면, 상서간시에는 "삼간(三赶), 삼불간(三不赶)"이 있다고 한다. 머리가 잘린 경우(머리와 몸은 반드시 꿰매야 한다), 교살형을 당한 경우, 참롱참사(站籠站死)한 경우는 모두 데려갈 수 있다. 이유는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어서, 억울하므로, 고향과 친척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법술로 혼백을 불러내서, 부적과 주술로 그들의 시신을 누른 다음, 다시 법술로 그들에게 산을 넘고 고개를 건너게 하거나, 심지어 배를 타고 물을 건너게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병사하거나, 강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메어 자살한 경우, 벼락을 맞거나 불에 타서 시신이 온전하지 못한 경우는 데려갈 수 없다. 그중 병사한 경우는 혼백이 이미 염라대왕에게 끌려갔기 때문에 법술로 그들의 혼백을 되찾아올 수 없다고 한다. 강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맨 혼백은 대체되어버렸거나, 대체되는 중이다. 새 혼백을 불러내면 구망혼이 대체될 수가 없으니 구영혼이 새로 살아나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그외에 벼락을 맞은 경우는 죄악이 큰 경우이다. 그리고 큰 불이 나서 불에 타 죽은 경우는 왕왕 피육이 불완전하다. 이런 시신은 끌고갈 수가 없다. 간시는 원래 전쟁터에서 죽은 시신을 끌고가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관청에서 억울하게 죽은 시신을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을 돕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현대과학지식이 보급되면서, 그리고 민속학자들이 깊이있게 조사한 결과 고대 묘족의 간시무술의 각종내막을 이제는 사람들이 점차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천년을 전해온 민간무술로 묘족의 역사문화, 민족문화, 종교문화와 민속문화를 이해하는데 모두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