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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중국인은 "용(龍)의 전인(傳人)"이 아니다.

by 중은우시 2008. 12. 27.

글: 월초(越楚)

 

요즘 원악(袁岳)이 제안한 "팬더를 용을 대신하는 중국의 표지로 삼자"는 글이 한바탕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팬더를 중국의 표기로 하는 것이 적합한지 여부에 대하여는 본인이 감히 평론할 생각이 없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중국인은 지금까지 "용의 전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위 "X의 전인"이라는 말은 미국의 인류학자인 Thomas Hunt Morgandml <<고대사회>>라는 책에서 말한 것이다. 즉, 우리는 자고로 X를 유일한 "토템으로 숭배"한다는 것을 말한다. "토템"이라는 말은 인디안말인 Totem을 말한다. "친척"과 "표지"라는 의미를 지닌다. 만일 중국인들이 모두 "용의 전인"이라면, 이것은 용이 반드시 신화학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의 조상', 즉, 고대의 선주민들이 공인한 유일한 토템신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역사상 비록 적지 않은 북방민족과 진한 이래의 왕조는 모두 용을 숭배하였지만, 한번도 전민족이 용을 토템신으로 하여 제사를 지낸 역사는 없다.

 

중국은 자고이래로 부녀와 신령의 교합으로 씨족의 조상을 배태하였다는 민간전설이 전해져 온다. 예를 들어, "현조생상(玄鳥生商)"등이 있다. 다만 "용령(龍靈)이 조상을 임심시켰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전해져 오지 않는다. 무당이 제단에 모시는 신령은 실제로 복희와 여와이다. 그들은 그러나, "난봉(鸞鳳)의 전인"이다. 용은 무당의 제단에 아무런 지위도 없다. 소위 "복희믄 망의 몸이고, 여와는 뱀의 몸이어서, 두 용이 결혼하여 중화민족을 번성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진한이후 용의 독존적인 지위가 확보된 후에 문인들이 견강부회하여 지어낸 것이고,후세의 관념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이를 증빙으로 삼을 수는 없다.

 

중국의 원고시대에 조(鳥), 용(龍), 견(犬), 호(虎)등 사대동물의 영혼이 숭배되었다. 특히 조령(鳥靈)과 용령(龍靈)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중국의 "용봉문화"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섬서성 보계의 북수령의 앙소문화유적지에서 출토된 "용봉문(龍鳳紋)"의 채도새경병은 아주 강력한 증거이다. 용과 봉이 모두 7,8천년전의 신석기시대에 나타나고, 모두 중화민족의 표지와 상징이 되었다. 즉, "용봉정상(龍鳳呈祥)"이다. 역사상 오랜 기간동안 "봉"은 태양신의 화신으로서 계속하여 "양강(陽剛)"을 대표했다. 용은 "음유(陰柔)"를 대표했다. 진한이후가 되어서 이런 음양관계가 뒤바뀌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만여년전부터 3천년전에 중국민간의 문화주체는 농경문화였다. 그 토템도 자연히 농경문화를 반영한 조령(鳥靈) 숭배였다. 중국남방의 농사유적지의 고고학적인 발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봉조(鳳鳥) 도안이 이미 7,8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의 장강이남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봉조의 천하였다. 지금까지도 용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진한이전까지의 수천년간, 중국남방의 농경민족은 계속하여 "태양조" 즉 난봉(鸞鳳)을 토템으로 숭배했다. 그리고 용령은 배척되고, 폄하되었다. 그리하여, 중국남방의 광대한 농경민족은 자고로 "용의 전인"은 아닌 것이다.

 

중국인은 항상 스스로를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염제와 황제도 모두 "용의 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 상왕조의 토템도 용이 아니었다. <<백호통의>>에서 염제씨족의 신은 축융은 "그 정수가 새가 되고, 흩어지면 난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염제씨족의 토템은 난조이지 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문시조"의 하나인 염제는 "난봉의 전인"이라고 할 것이다. 고대서적에서 비록 또 다른 인문시조인 "황제"가 "헌원황룡체(軒轅黃龍體)"라고 적고 있지만, 황제씨족이 숭배한 것은 "북두성"이지 용이 아니었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제의 모친 부보는 벼락빛이 북두성을 도는 것에 감응을 받아 임신했다"고 되어 있다. <<사기>>에도, "황제는 용을 몰고 승천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보면, 용은 그저 타고 다니는 것이지 신성불가침의 신령이 아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황제와 치우가 전투를 벌일 때, 황제가 먼저 파견한 것은 응룡(應龍)인데, 대패한다. 나중에 "사람머리에 새의 몸"을 한 구천현녀(九天玄女)를 내보내서 비로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구천현녀는 바로 봉토템의 화신이고, 이는 황제와 봉과의 관계는 용과의 관계보다 훨씬 밀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공>>에는 "양조유거(陽鳥悠居)"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하왕조가 "양조(난봉)"를 토템으로 삼은 농경민족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민족은 "현오생상"(시경)이므로, 자연히 난봉토템이지 용토템은 아니다. 현존하여 일본천옥박고관에 보관되어 있는 상나라때의 "상조뉴동고"를 보면, 거기에 그려진 것은 "새의 발톱에 사람의 몸을 한 난봉토템신이 왼쪽에는 작은 물고기가, 오른 쪽에는 작은 용이 그의 하반신에 입을 맞추고 있다. 용이 이처럼 작게 그려진 것이다. 상민족은 자신들을 "용의 전인"으로 생각했을 리가 없다. 중국고왕조중에는 "용의 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용령숭배는 자고이래로 북방민족에서 성행했다. 특히 초원유목민족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도 스스로를 "용의 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고대 흉노민족은 비록 매년 3번 용에 제사지냈지만, 용에 제사지내는 곳을 "용성(龍城)"이라고 불렀고, 그 왕정을 "용정(龍廷)"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토템은 '늑대'였다. "창랑생인(蒼狼生人, 창랑이 사람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고, 그들은 스스로를 "늑대의 전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북방민족들 중에서도 용을 토템으로 삼은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용령이 진정으로 조령을 이기고 천하통일을 하게 된 것은 개략 진한시대이후였다. 이때부터 황권의 표지와 상징이 된다. 군주제왕들은 모두 스스로를 "진룡천자(眞龍天子)"라고 자처했다. 진시황도 "조룡(祖龍)"이라 칭했고, 한고조 유방은 모친이 교룡과 교합하여 낳았다고 하며, 그래서 생긴 모습이 "높은 코(隆準)에 용안(龍顔)"이었다고 한다. 왕망은 "당선성룡(當仙成龍)"이라고 하였고, 한나라 광무제는 "적룡을 꿈꿨다"는 것 등등이 있다. 제왕이 스스로를 "진룡천자"라고 하게 되니, 왕자왕손은 자연히 용자용손(龍子龍孫)이 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용의 전인"인 것이다. 역대왕조의 신민들은 흐리멍텅하게 스스로를 "용의 전인"이라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이것은 그저 맹종이자 자련(自戀)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