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사랑의 거리: 항아(嫦娥)는 후예(后羿)를 사랑했을까?

by 중은우시 2008. 7. 27.

글: 홍촉(洪燭)

 

사랑의 거리는 오래된 이슈이다. 거리는 아름다움을 낳지만, 거리는 고통도 낳는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정적(情敵)이고, 뼈와 가슴에 남을 괴로움이다. 최초로 이와 관련된 전설은 견우직녀의 이야기이다. 그들 간의 거리는 신의 뜻에 의한 것이지, 인력으로 항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시적인 이름을 가진다: 은하수(銀河). 그들은 은하수의 양측에서 실제로는 운명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운명의 타협방안은 바로 이 서로 사랑하는 한 쌍에게 매년 칠석에 오작교를 놓아주어서 한번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사랑의 최고경지는 바로 거리의 돌파이다. 그것은 정신상의 승리라고 할 수도 있다. 견우직녀는 은하수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은하수는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잔혹하고 가장 불행한 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의 민간전설에서 영원한 사랑의 형장(刑場)이 되었고, 견우직녀는 이별의 무기징역을 받아서, 가장 진성한 사랑의 죄수가 되어 서로 바라보고 서로 지켜주며, 그들은 묵묵히 받아들인 영혼의 고통은 오랜 시간이 흐른후에도 인간에게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랑에 미친 남녀들은 이 통절한 심정의 정신유산을 승계하고 있다. 신화에 더욱 가까운 애정일수록, 희생이 필요하고, 대가를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진귀함을 증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이다. 가장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랑은 대부분 비극이다. 가장 슬픈 사랑이야기는 모두 거리때문에 발생한다.

 

은하수라는 것은 천문학상의 단어일 뿐아니라, 인류애정영역에서의 고난의 좌표이다. 육체적인 거리보다 더욱 무섭고 극복하기 힘든 것은 영혼의 거리이다. 공간의 거리보다 더욱 무섭고 뛰어넘기 힘든 것은 시간의 거리, 내지는 생과 사의 거리이다. 이들은 은하수로 갈라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에로스(사랑의 신)의 장난과도 같다. 인류의 의지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비교하자면, 빈부의 격차, 미추의 거리 및 여러가지 사회요소는 모두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번뇌일 뿐이고, 너무나 보잘 것없는 것들이다. 견우직녀와 기뵤하자면 우리는 확실히 행복한 후손들이다. 현대사회에 살면서,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다른 각종의 선진 교통도구를 타고 다른 도시(그곳이 지구의 반대편일지라도)에 살고 있는 애인을 찾아갈 수 있다.

 

날로 발달하는 애정의 속도앞에서, 소위 은하수는 이미 더이상 공간의 장애가 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거리가 완전히 소실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점차 우리 영혼의 내부에 스며들어서, 우리의 애정에 대한 믿음을 갉아먹는다. 견우직녀처럼 일생을 통하여 꿈을 이루는 것은 확실히 인간의 신화이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플랫폼에서 헤어지는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매번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창을 마주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손짓과 표정으로 작은 이별의식을 진행하는 것을 본다. 사실 그들의 손짓이나 표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눈빛이다. 거기에는 너무나 풍부한 언어를 담고 있다. 눈물을 담고 있는 눈빛, 웃음을 머금고 있는 눈빛, 슬프거나 안도하는 눈빛, 뿜어나오는 눈빛은 뜨겁게 얽혀 있다. 다만 그 중의 내용은 자기 자신만이 진정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통하여 깨닫는다. 커플의 이별과 일반 친구의 이별은 차이가 있다. 그들은 언어와 손짓으로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눈빛과 마음으로 잔을 부딪친다. 영혼의 부딪침은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는 그 순간처럼, 전류와 같은 떨림을 가져온다. 이것은 사람들이 수없이 반복해오면서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다.

 

이 광경은 일찌기 나에게도 일어난 적이 있고, 나는 그런 영혼이 연의 줄처럼 당길수록 길어진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이같은 통속적이지만 청춘을 보유한 화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이러한 일은 매분매초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고, 서로 다른 플랫폼,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발생한다. 그래도 중복되는 것같지 않다. 이 순간에 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사랑의 힘을 이것보다 더욱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헤어지는 순간에,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 설마 전세계의 눈빛을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커플들이 서로 마주보는 시선이 기차에 의하여 멀어지다가 중단되면, 사랑의 거리가 발생한다. 공간의 거리는 수십킬로미터, 수백킬로미처 내지 수천킬로미터로 계산할 수 있다. 시간의 거리는 며칠밤낮, 몇개월, 몇년으로 계산할 수 있다. 

 

이런 거리의 장단은 그들의 눈빛이 반짝이는 정도로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는 그들의 이별상태에서, 견우직녀의 그림자를 본다. 나는 심지어, 이런 것도 연상된다: 견우직녀도 일찌기 이런 눈빛으로 갈수록 멀어지는 은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세상에 어느 커플이 이별을 경험해보지 않았겠는가? 어떤 짝은 이미 습관이 되었을 것이고, 어떤 짝은 단 한번이 영원으로 되었을 수도 있다.

 

애정을 개념으로 하자면 헛된 것이다. 그러나, 만나고 이별하는 것을 애정의 운명을 연습하는 것이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된다. 우리는 만남을 통하여 애정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별을 통하여 애정의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금화의 양면에 서로 다른 꽃무늬와 도안을 하였지만, 가치는 같은 것과 같다.

 

기차가 떠나가면서, 바퀴에 마찰된 철궤가 점점 냉각되고, 차가운 빛이 반짝인다. 우리는 마치 은하수의 축소판을 보는 것같다. 커플들의 가슴울림은 공기중에 남겨진다. 나는 돌연 사람들이 왜 플랫폼을 월대(月臺)라고 부르는지 알았다. 이것은 달을 가지고 비유한 것이다. 달은 어둡고 밝고 둥글고 이그러짐이 있다. 사람에게는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이 있다. 커플들은 플랫품에서 아쉬워하며 이별하지만, 이것은 정신적인 월식(月蝕)을 맞이하는 것이다. 매번 플랫폼에 설 때마다, 나는 항아가 달로 도망친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것은 중국고대의 또 다른 이별에 대한 민간전설이다.

 

항아가 후예를 벗어나기 위하여 달까지 도망친 것인지, 아니면 영약을 잘못 먹어서 어쩔 수 없이 후예를 떠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것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 것은, 그것이 항아가 과연 후예를 사랑했느냐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만일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오랫동안 함께 하고자 한다면, 천당이라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일영웅(射日英雄, 해를 쏜 영웅, 전설에 따르면 후예는 해에 살고 있는 새 10마리중 9마리를 쏘고 하나 남은 것이 삼족오라고 한다)인 후예와 절대가인 항아는 원래 영웅미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별은 그들의 정적이 되었고, 이 애정모델에 커다란 재난이 닥친다.

 

필자는 그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왜냐하면 항아는 어쨌든 후회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고인들이 "항아응회투영약, 벽해청천야야심(嫦娥應悔偸靈藥, 碧海靑天夜夜心)"이라고 읊지 않았을 것이다. 항아가 달에서 과거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견우와 직녀가 서로 바라보고 눈빛을 보내는 것과 비교할 수 있지만, 심정은 다를 것이다.

 

후자는 희망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돌처럼 굳건히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전자는 철처지 절망적인 것이고, 자연히 상심이 더 클 것이다. 항아는 일시적으로 천당선경을 탐내는 회복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사랑의 영원한 이별을 가져왔고, 항아와 후예는 서로 후회막급이 된 것이다. 견우직녀는 그저 원앙이 되고자 했을 뿐, 신선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비록 은하수가 가로놓여 있지만, 영원히 후회하지 않았다.

 

이 두 쌍의 신화상의 커플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이별을 보여준다. 더로 다른 두 가지 사랑의 거리를 보여준다. 아마도, 그 자체는 두 가지 성격의 사랑일 것이다. 동방미녀 항아는 왕모낭낭의 영약(역시 옥비녀를 가지고 은하를 만들어서 견우와 직녀를 갈라놓은 그 왕모낭낭이다!)을 훔쳐먹었는데, 이것은 서방의 성경상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이야기와 비슷하다. 마치 여인의 '원죄'를 증명하는 것과도 같다.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몰래 먹은 것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불러와서,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녀는 비록 낙원은 잃었지만, 아담을 잃지는 않았다. 아담과 이브는 비록 징벌을 받았지만, 헤어지지는 않았고, 단지 하느님과 헤어졌을 뿐이다. 이는 최소한 서로간의 사랑에 부끄러움은 없다. 천당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일 뿐이다.

 

항아는 비록 적막한 천당을 얻었지만, 자기의 영웅을 잃었다. 그녀는 외롭게 유랑하면서 발견했을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천당이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사랑이 없는 곳이라면, 그곳이 달 위라고 하더라도, 사막과도 같다는 것을. 사랑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낙원이었던 것이다. 이브가 잠시 잘못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금지된 것을 먹었는데, 이브와 비교하자면, 항아가 부담한 댓가는 너무나 참혹하다. 그녀가 바꾼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항아와 후예와의 사이에 놓인 은하수에는 오작교가 없다. 견우직녀간의 거리는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이를 운명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사랑을 비축하여, 순간적인 휘황과 바꾸었다. 상아와 후예간의 거리는 무정한 것이다. 생과사의 거리보다 멀다. 1만광년보다 멀다.

 

이제 나는 다시는 달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겠다. 그곳은 상심의 곳이다. 나는 삐끗하여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보게 될까봐 걱정된다. 후예가 달을 쳐다볼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것을 생각해본 사람은 아마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저 항아의 느낌만 관심가졌을 뿐이다. 나는 은하수를 바라보는 일도 적다. 비록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그저 천문애호가의 모습으로 할 뿐이고, 아무런 표시도 내지 않고 망원경앞에 엎드린다.

 

칠석은 은하수의 명절이다. 어려서부터, 노인은 나에게 이 날에는 하늘을 쳐다보라고 시켰다. 아. 하늘은 모두 등불을 내걸고 색색의 매듭을 한 것같다. 나는 은하수의 밀물썰물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빛나는 별들 속에서 두 개의 갈수록 가까워지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고자 할 뿐이다. 오작교의 이야기는 까치를 인류가 가장 좋아하는 길상물로 만들었다. 다른 어떤 새들보다 나는 호감을 가지고 있다. 까치 바로 다음은 기러기(鴻雁)이다. 사랑하는 커플의 서신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 속의 계수나무는 이미 오래된 시계와도 같이, 그저 항아의 곁에서 고독한 밤을 보낼 뿐이다. 오작교가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은하수라는 오래된 상처를 순간적으로 봉합할 수 있다는데 있다. 나는 견우직녀가 오작교 위에서, 분명히 개선장군의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그들 사랑의 전투이다. 그들은 매년 364일의 실패감을 견디면서 바로 이 하루의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위대하다. 사랑의 힘으로 신의 의지를 이긴 것이다. 그들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커플일 뿐아니라, 시공을 이긴 한쌍의 영웅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의 이별과 만남, 고통과 환희, 기도와 인내, 수망(守望)과 견지(堅持)으로 인간의 사랑에 고난에 항거하는 모범을 보인 것이다. 신이 사는 곳의 커플은 장생불사이다. 사랑하는 커플의 신화는 만고에 전해진다. 견우직녀를 위하여 축복하는 것은 수천만의 사랑하는 짝들을 위한 축복이다. 인류의 사랑을 위한 축복이다. 사랑의 거리에 대한 승리에 대한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