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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골동

"원청화(元靑花)"를 둘러싼 논쟁

by 중은우시 2008. 11. 5.

 

 

 

글: 중화유산(中華遺産)

 

"원청화"는 말 그대로 원(元)나라때 생산된 청화자기(靑花瓷器)이다. 중천에 뜬 해와 같은 골동품경매에서 최근들어 이 보기드문 수장품은 천만위안 심지어 억위안이상의 엄청난 가격에 낙찰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나 있을까? "원청화"가 도대체 존재했는지 아닌지는 학술계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슈라는 것을. 사실, 1950년대에 이르러 "원청화"라는 단어가 비로소 나타났다.

 

이전에는 유리창이건 아니면 다른 지방의 골동품가게이건 아무도 원나라때에 청화자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무슨 경천동지의 발견이 있어서 전문가들의 견해를 뒤집었는가? 수장계는 어떻게 180도 태도를 반세기의 시간을 들여서 바꾸게 하여 "원청화"를 하늘 높이 받들게 되었는가?

 

홍작가라는 한 민간학자와의 만남은 필자로 하여금 엄청난 가격의 "원청화"가 아름다운 한바탕 신기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1994년 준의(遵義)에서 식당을 열고 있던 전(田)선생은 전체를 복잡한 문양으로 그려넣은 청화원앙이존(靑花鴛鴦耳尊)을 만났다. 골동을 좋아하던 그는 이것이 '오래된 물건(老貨)'이라고 생각했고, 아마도 원나라때의 청화자기일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그는 자기가 경영하던 사천음식점을 가지고 이 청화자기를 바꿨으며, 이름을 "원청화원앙속련금이존(元靑花鴛鴦束蓮禽耳尊)"이라고 지었다. 전해듣기로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 청화자기에 25만위안을 내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원청화에 대하여 전해내려오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놀라운 돈을 번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2005년 7월 12일 런던 크리스티에서 경매자들에게 높이 27.5센티미터, 직경 33센티미터의 청화인물도관인 귀곡하산도관(鬼谷下山圖罐)을 내놓았는데, 이 수장품은 중국도자기의 세계경매사상 최고가격인 1,568.8만파운드(약 2.3억인민폐)에 낙찰되었다. 그날 황금가격으로 계산하면, 이는 2톤의 황금가격에 해당하였다.

 

귀곡관의 거래가 이루어진 후 얼마되지 않은 11월 28일, 홍콩 크리스티는 다시 인민폐 4,998.96만위안에 성공적으로 또 다른 인물고사도청화관 "원청화금향정도관(元靑花錦香亭圖罐)"을 낙찰시켰다. 이는 그해 중국자기경매사상 최고가 3위에 해당했다.

 

그리고 일찌기 또 하나의 "쌍호로문병(雙葫蘆紋甁)"의 청화자기는 1900년에 수장가가 10파운드로 매입했는데, 2005년 경매에서 334.5만파운드에 팔렸으며, 35만배의 투자수익을 얻었다.

 

열기가 더해지는 경매가 계속 이어졌고, 가격도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것같았다. "귀곡관" 혹은 원청화와 비슷한 것들도 모두 따라서 가격이 올랐다.

 

원래, 이런 분위기하에서 어떻게 한 민간도자연구자의 대담한 가설을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엽기적인 심사를 가지고 만나서 얘기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청화의 배후에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난언지은(難言之隱)"이 있을 줄은 몰랐다. 무슨 "고증불립(孤證不立, 증거가 한 개뿐인 것은 증명된 것을 보지 않는다)"라든지, 무슨 "고고보고서"의 전후모순이라든지, 무슨 역사기록의 공백이라든지, 무슨 공예재료의 의심이 전부 해결되지 않았다든지...

 

"원청화"라는 물건은 졸지에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먼저 노선생과 어떻게 하여 "원청화"의 신분을 의심하기 시작했는지를 얘기나눴다.

 

영국, 혹은 유럽인들은 18세기부터 중국에서 생산된 자기에 대하여 거의 미친듯한 열기를 보였다. 온갖 방법을 강구하여 진품을 가져갔고, 한편으로 수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연구했다. 그는 국외에서 수백번 박불관에 들어가서 동일한 수장품의 경력을 관찰했다: "나는 정말 하나의 기물의 매 한 획 한 필까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 '태기'가 있는지도 알았다."

 

"데이비드의 그 유명한 원화표준기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수백번 가서 보았다. 보고 또 보고나서 그것은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다."

 

수장이나 감상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무슨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홍작가가 원청화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두개의 세계에서 공인된 원청화표준기의 "운룡문상이병(雲龍紋象耳甁)"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상 원청화가 백년도 안된 기간내에 세계에 이처럼 큰 선풍을 몰고 온 것은 바로 이 두 개의 큰 병에서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중국고대도자기의 수장과 연구를 하던 영국인 Sir Percival David로부터 시작한다. 홍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이 수장가의 평생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했으며, 서방인들이 중국도자기에 대한 감상학과 역사적 영향을 연구했다.

 

그가 수집한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David는 여러차례 중국에 보물을 찾으러 왔고, 중국의 모은행을 통하여 대량의 청나라궁중소장 자기를 구매했다. 그리고 각지의 골동품상인들로부터 각종 골동을 대량 구매했다. 이는 바로 오늘날 데이비드중국예술관의 수장품의 기초를 이룬다. 이번 보물찾기에서 고대도자기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 이후 그는 중국 복건에서 영국에 온 오뢰희(吳賚熙)를 알게 된다. 그리고 오뢰희의 수중에 두 개의 원나라때 청화대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는 기꺼이 이를 사들인다. 이 두 개의 큰 병은 오뢰희가 하는 말에 따르면 북경 지화사(智化寺)에서 보관하던 물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리창의 골동품상들이 모두 구매를 거절하였다. 병의 입구는 몇 개의 낙관이 있는데 아주 특별하다. 이 몇개의 푸른안료로 쓴 "공양관(供養款)"은 일반적인 청화문양과 달랐다. 아마도 대병의 제조자가 신명에게 바치는 기물로 만든 관지(款識)인 것같다.

 

신주로옥산현순성향덕교리형당사봉성(信州路玉山縣順誠鄕德敎里荊唐社奉聖)

제자장문진희사향로,화병일부(弟子張文進喜捨香爐,花甁一副)

기보전가청길,자녀평안(祈保全家淸吉,子女平安)

지정십일년사월양진근기(至正十一年四月良辰謹記)

성원조전호정일원수타공(星源祖殿胡淨一元帥打供)

 

5행 62자의 낙관에서 하나의 아주 중요한 연대, "지정십일년"이 있다. 이는 중국 원나라 말기의 한 연호이다. 바로 이 순제 지정은 강대한 황조를 자기의 손 안에서 망하게 한 사람이다.

 

왜 골동상들은 이 두 개의 대병을 사려고 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낙관에 있었다. "원무청화(元無靑花, 원나라때 청화자기는 없다)"는 것은 바로 골동계의 정설이었다. 원래 전통적인 골동상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이�게 글로쓴 "지정십일년"이라는 관지의 대병이 원나라때 물건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다. 오뢰희는 이것을 영국으로 가지고 왔고, 그리하여 이 두 개의 대병은 David의 수장품이 된 것이다.

 

1929년, 영국학자 Hobson은 이 수장품을 본다. 이 저명한 중국고대도가지연구자는 중국골동품상과 같은 선입견이 없었다. 그는 대병의 목에 있는 연도관을 알아차리고, 즉시 흥분하여 <<노가구>>라는 잡지에 자신의 발견을 공개했다. 문장의 표제는 바로, <<명나라이전의 청화자기>>였다. 그러나 이 글은 학술계와 수장계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시간은 다시 흘러 1950년이 되었다. David는 그의 모든 도자기를 런던대학에 기부하고, 런던대학의 아시아아프리카학원은 David중국예술기금회를 설립하며, 이들 희세진품을 전시하게 된다. 이곳이 바로 홍작가가 여러번 David병을 관찰한 곳이다.

 

1950년대까지, 미국학자 존 포프는 Hopson의 발견을 모아서, 그는 이 대병과 멀리 이란과 터키의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던 몇몇 중국청화자기를 연결시켰다. 이런 대조작업은 그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였고, 두 편의 논문을 완성한다. <<14세기 청화자기: 이스탄불 토브카프궁박물관이 소장한 중국자기>>와 <<아드빌이 수장한 중국자기>>라는 제목이었고, "지정형원청화(至正型元靑花)"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손가락으로 물 위를 찌르면, 물결은 하나하나 퍼져나가는데, 아주 머리까지 퍼져간다. 홍작가는 이렇게 포프의 원청화에 대한 영향을 비유했다. 그렇다면 홍작가는 왜 포프의 연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표준기"는 당연히 아주 엄숙한 칭호이다. 바꾸어 말하면, 높은 정확도와 표준의 기구가 될 수 있어야 표준기로 불릴 수 있다. 도자연구자에 있어서, 표준기는 당연히 충분한 증거로 그것의 연대신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신세내력을 포장해서는 안되고, 소위 '백락'의 뛰어난 식별안목만으로도 안된다. 만일 하나의 원나라때의 표준기라면 명확한 요구(窯口)가 판명되어야 한다. 반드시 그것이 어느 요에서 어느 시대에 구워졌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David병은 확실히 이처럼 신세내력을 깨끗하게 갖추지 못하고 있다. 전세품(傳世品, 대대로 전해진 물건)은 일반적으로 탄생연대를 판별할 참조물이 없으므로, 통상적으로 "표준기"가 될 수 없다.

 

다시 이 두 개의 대병을 조사해보면, 홍작가는 그들이 여러가지 하자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모양이 바르지 못하다. 그중의 한 병은 바닥이 편평하지가 않아서, 밑을 받치고서야 제대로 세울 수 있다; 두 개의 귓부분의 흔적을 보면 당시에는 두 개의 조환(弔環)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요에서 꺼낼 때인지 아니면 나중에 사용할 때인지 떨어져 나갔다; 이외에 문양으로 볼 때, 두 개의 대병은 한 쌍이 아니다; 그리고 명문에 나타난 글자에서도 적지 않은 의문이 있다. 예를 들어, "성원조전"이 어디인가? '호정일원수'는 도공의 이름인가 공양인의 이름인가? 글자체에서 민간속자가 나타나는데 이것으로 이것이 보통의 민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설마 원나라때 이런 큰 자기가 이미 민요에서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단 말인가?; 이것은 전문가들이 공인하는 바와 같이 원나라때 청화자기는 모두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