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골동

사모무(司母戊) 정(鼎) 출토의 진상

by 중은우시 2008. 10. 21.

 

 

 

글: 악남(岳南)

 

최근에 CCTV는 "역사를 귀감으로 삼자"라는 프로그램에서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청동기의 왕 - 사모무정의 출토경위와 유전에 관한 이야기를 방영했다. 이 국가보물과 관련이 있는 늙은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일생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 사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깥을 돌아다녔을 뿐이다(웃음)....다행이 이 정이 외국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 인터뷰를 했던 그 오배문(吳培文)이라는 농민은 일부 진상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는데 습관이 들지 않은 사람이나. 아니면 아예 자기 머리가 없었던 자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그중에 허석림(許石林)이라는 자는 <<이 하남농민은 나를 감동케 했다>>는 글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칭송하고 나섰다. 그는 글에서,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노인의 얼굴에는 조금도 생각했던 것처럼 득의만면한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상상한 것처럼 자부심을 가진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은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마치 땅 속에서 고구마를 캐거나 배추이파리를 따는 것과 같았다. 조금 쉬다가, 돌연 약간은 부끄러운 듯, 노인의 얼굴에는 졸지에 어린아이같은 천진한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순박한 하남사투리로 말했다. 하늘을 가리키는 것도 같았고, 혼잣말 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유명해 졌겠는가?'"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다: "오배문의 인생운명은 모두 사모무 대방정의 발굴과 보호에 있었다. 우리가 현재의 도덕이나 문화분위기속에서 그의 행동을 바라보면, 거의 불가사의하다고 느끼게 된다."

 

허석림의 글대로라면, 예전에 사회의 하류인물을 끌어모아서 사모무 대방정을 도굴했던 오배문은 무죄일 뿐아니라, 오히려 공로가 있다는 말이 된다. 요순처럼 나같은 대중들이 배워야 할 모범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유명한 사모무 방정은 어떻게 출토되었는가? 배경과 사실은 또 어떠한가? 오배문은 과연 인민들이 배워야 할 모범인가? 그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역사적 진상을 보기로 하자.

 

1899년, 청나라 국자감제주인 왕의영은 북경에서 글자가 있는 갑골문을 발견, 감정 및 수장하기 시작했다.

1909년, 고문학 학자인 나진옥이 갑골은 확실히 하남 안양 소둔촌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름 해에 이곳이 바로 <<사기>>에서 말하는 "환수남(洹水南), 은허상(殷墟上)"의 '은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상나라때 '무을(武乙)의 수도'였던 것이다.

 

1928년 10월,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는 연구원 동작빈(董作賓)을 파견하여 고고발굴단을 이끌고 안양 소둔촌 은허에 대한 과학적 발굴을 시작했다. 중국근대고고학의 막이 열린 것이다.

 

이전 30년간, 은허 갑골문은 수장자들에게 중시되고 고가로 수장되었으므로(글자 1자에 2냥은자), 현지 농민은 사사로이 도굴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량의 골동상, 외성인 및 외국인들이 안양으로 몰려들어 높은 가격에 출토된 갑골과 청동기등의 유물을 사갔다. 중앙연구원이 정식으로 안양 은허에 대한 과학적인 발굴을 시작할 때, 파내어진 글자 있는 갑골은 약 5만편 이상이었다. 청동기는 부지기수였다. 이들 진귀한 문물은 모두 팔려나갔다. 일본, 미국, 영국, 카나다등 12개국가와 지역으로 흘러들어갔다. 안양 은허와 전국각지에서의 문화재도굴은 아주 심각하다는 것때문에 1930년, 국민정부는 <<고물보존법>>을 반포하여 명확히 정한다: "본법에서 말하는 고물(古物)이라 함은 고고학 역사학 고생물학 기타 문화와 관련있는 일체의 고물을 말한다" "고물을 발굴하는 것은 중앙 혹은 성시직할시의 학술기관에 한한다" "여하한 개인이나 증서가 없는 학술단체는 임의로 발굴할 수 없다"는 등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1932년, 국민정부는 "중앙고물보관위원회"를 만든다. 그리고 <<중앙고물보관위원회조직조례>>를 제정하여, 문화재에 대한 보호의 강도를 강화하고, 도굴은 어느 정도 억제된다.

 

바로 중앙연구원 고고발굴단이 은허로 들어와 발굴하기 시작할 때, 이곳의 농민은 이미 여러해의 도굴경험과 전통이 있었다. 그들이 찾는 고물의 범위가 점차 늘어났다. 어떤 고물이든 모두 도굴대상이 되었다. 중앙연구원의 발굴단이 오는 것을 보고, 정부가 문화재도굴을 엄금하는 규정을 만든 것을 보고, 그들은 도굴로 떼돈을 벌 수 있는 시절이 지났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는 동시에, 일부 농민은 중앙연구원의 발굴인원과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대항을 했고, 인신에 위협을 가했다. 험악한 국면하에 중앙연구원 고고발굴단은 할 수 없이, 풍옥상에게 병사를 보내어 무기탄약을 차고 현장을 보호하도록 요청하게 된다.

 

그러했지만, 이익에 눈이 먼 자들은 여전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밤중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할일 없는 자들이나 깡패들을 끌어모아서 전답이나 숨겨진 골짜기 등에서 쥐새끼처럼 사방으로 뚫고 들어갔다. 또 다른 일부 농민은 자기의 집안, 심지어 부엌 아래까지 파서 몰래 도굴을 했다. 전체 은허는 마을부터 전답까지 곳곳에 구멍이 났다. 1937년 봄, 도굴이 너무 심하였고, 농민들은 공공연히 표어를 붙여놓았다: "인민의 생계를 절단내는 동(작빈), 양(사영)을 타도하자" "관리들이 불놓는 것은 허용하고, 백성이 등불붙이는 것은 불허하는가?"등의 구호를 내걸었고, 기세가 대단했다. 이에 대하여 동작빈이 백성들이 도굴해내고 남은 고물을 사진찍으면서 그 뒤에 "백성의 등"이라고 적어서 자조와 분노를 표현했다.

 

1928년부터 시작하여 중앙연구권 역사언어연구소가 주재한 은허발굴은 모두 9년동안 15차례나 진행되었다. 항전이전인 1937년 6월에야 끝이 난다. 고고인원은 모두 10개의 왕릉을 발굴하고, 왕릉주위의 2000여개의 작은 묘와 조갱(鳥坑), 수갱(獸坑), 차마갱(車馬坑)등 제사갱(祭祀坑)을 발굴했다. 출토된 갑골은 24918편이다. 상나라때의 대묘는 규모도 크고, 장관이었다. 도굴을 당하기는 했지만, 수천수만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동기, 오기, 골기, 석조등 출토문물이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39년 국민당군대가 궤멸하면서, 안양은 일본군이 점령한다. 은허는 국민정부가 돌보기 어려운 진공지대가 된다. 이렇게 하여 국가가 망한 특수한 배경하에서 사모무정은 도굴과 유린을 당하게 된다.

 

이해 3월의 어느 날 깊은 밤, 은허지역내에 있는 무관촌의 농민 겸 소상인인 오배문은 돌연 2년전 은허발굴단 주재인 양사영(양계초의 아들)을 생각한다. 일찌기 서북강동구의 오가백수분아래에서 상나라때의 왕릉을 탐측했고, 촌장과 발굴에 관하여 협의했었던 일이 기억난 것이다. 나중에 오씨집안에서 동의하지 않아서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단서를 가지고, 오배문은 칠흑같은 밤에 낙양산을 가지고, 형제인 오희증과 함께 백수분아래에서 멀지 않은 곳부터 파보기 시작한다. 며칠 밤동안 고생을 겪으면서, 마침내 배장묘와 매장된 문화재를 발굴한다. 다음 날 밤, 오배문 형제는 어둠 속에서 너비 2척, 길이 6척의 대갱을 찾아낸다. 한밤중에 지하 10미터 가량의 땅에서 돌연 송아지만한 크기의 동정이 진흙속에 묻혀 있었다. 두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닭이 울 무렵, 두 사람은 황급히 땅을 다시 묻어놓았다.

 

다음날 밤, 오씨형재는 십여명의 농민을 데리고 그 곁으로 가서 흙을 파낸다. 입에는 등잔을 물고, 밧줄로 정을 묶어서 겨우겨우 이 큰 물건을 끌어올린다. 왜그런지 몰라도 정에는 귀(耳) 하나가 없었다. 오씨형제는 많이 따질 겨를이 없었다. 정을 자기들이 미리 준비한 마차에 싣고 오배문의 집으로 갔다. 다시 똥무더기 아래를 파서 숨겨두었다. 오래지 않아,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한 골동상이 소식을 듣고 무관촌으로 오배문을 찾아온다. 그리고 20만대양을 줄테니 팔라고 한다. 그러나, 운수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이 정을 나누어 십여개 조각으로 만들어 운송해야 한다고 했다. 오씨형제는 마음이 동했다. 현지에서 몇몇 고수를 불러서 대정을 쪼개려고 하였다. 몇번 두드려도 두꺼운 대정은 쪼개지지가 않았다. 또 다른 사람들이 톱을 가지고 왔다. 있는 힘을 다하여 겨우 정의 귀(耳) 하나를 잘라낼 수 있었다. 이때 한 마을 어른이 멀쩡한 정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을 보고, 귀가 하나 떨어져 나간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나서서 제지시켰다. 오배문도 정을 부서뜨린 후에 골동상이 사지 않으려고 할까봐 겁이 나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대정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오씨형제가 고민하면서 하루빨리 처리하려고 할 때, 안양비행장에 주둔하던 일본경비대가 이 소식을 듣는다. 대장인 미즈노(水野) 대좌가 사람을 무관촌으로 보낸다. 협박과 돈의 유혹하에 재산을 목숨처럼 여기던 오배문은 죽어라 내놓지 않고, 나중에 이전에 도굴했던 소형 청동정 하나를 내놓고 무마시킨다. 일본인들이 간 후에, 오씨형제는 다시는 정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을 돼지우리에 숨겨둔다.

 

항전에 승리한 후, 산하를 되찾았다. 문화재보호는 다시 중시되게 된다. 1946년, 안양고물보존회의 사람들은 사모무정이 도굴된 경위와 숨겨진 지점을 찾아내고, 신속히 중앙정부에 보고한다. 국민정부지시에 따라, 오배문에게 기한내에 정을 내놓으라고 지시한다. 내놓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거나 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한다. 오배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을 무조건적으로 내놓게 된다.

 

사모무정이 다시 발굴된 후, 먼저 안양현정부에 보존한다. 같은 해 10월말, 국민정부 주석 장개석의 60회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국민당 주예북사령관 왕중렴은 차로 이 정을 남경에 보내어 생일선물로 삼는다. 장개석은 이것을 중앙박물원에 보존하도록 지시한다. 1948년 여름, 이 정은 남경에서 처음으로 전시되고, 장개석이 친히 참관하여 사진을 남긴다.

 

국민정부가 패퇴할 때, 중량문제로 이를 대만에 가져가지 못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이 정은 맘경박물원에 보존하고 있다가, 1959년 중국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한다. 지금 보는 이 정의 두 귀는 나중에 보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