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청화자기는 중국역사상 대외무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품이었다. 이 중국특색을 지닌 제품은 당시 세계전역에서 팔렸다. 청화자기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당나라때이다. 현존하는 당나라때의 청화자기 및 고고학적 발굴로 드러안 자기파편을 보면, 당나라때의 청화자기의 품질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송나라때에도 청화자기는 그다지 큰 발전이 없었다. 여전히 모색단계였다. 원나라때 일부 유명한 청화자기제품이 세계에 전해진다. 품질도 이미 크게 제고되었다. 명나라는 청화자기가 신속히 발전했던 전성기였다. 중간에 비록 쇠락하기도 했지만, 청나라 강희제때에 청화자기는 최전성기에 이른다. 청나라중후기에 청화자기는 쇠락한다. 이미 국제적으로 대단했던 명성은 사라진다. 필자는 청화자기를 연구하는 전문가는 아니다. 본문은 그저 명나라청화자기의 일부 변화부터, 역사중대사건의 청화자기 내지 중국에 대한 영향을 탐색해보고자 할 뿐이다.
청화자기는 비록 분명한 중국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은 해외에서 왔다. 원나라때 청화자기가 이전 왕조때의 기초위에서 크게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해외에서 온 안료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명나라중기, 전기도 마찬가지였따. 전문가들은 이 안료를 "소마리청(蘇麻離靑)" 혹은 "소격니청(蘇激泥靑)"등으로 부른다. 그것은 망간의 함량이 비교적 낮고, 철의 함량이 비교적 높은 코발트이다. 그리하여 아주 아름다운 푸른색 무늬의 도안의 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소마리청"의 발음으로 보면 이 안료는 소말리아에서 왔다고 본다. 다른 학자는 수마트라에서 왔다고 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소마리청"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와 시리아 일대에서 온 것을 보고 있다.
명나라 영락제때의 청화자기 제작수준은 아주 높았다. 이것은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과 관련이 있다. 해상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아랍지역의 "소마리청"을 중국에 가져오기 쉬워진 것이다. 선덕제이후, 명나라조정은 여러번에 거려 "관양자기(官樣瓷器)의 제작을 금지"했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청화자기는 여전히 소량생산되었다. 조정의 이 명령으로, "소마리청"의 수입은 거의 중단된다. 청화자기를 굽는 안료는 주로 이전의 재고품을 사용했다. 15세기중후반에 명나라 청화자기는 다시 생산이 늘어난다. 그러나 이때는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재고로 남아있던 "소마리청"을 다 써버렸다. 청화자기의 안료로 보면,15,16세기 교체기의 수입 안료는 많지 않아서, 주로 국산 청색안료를 썼다. 실제로 국산 청색안료도 일찌기 사용되고 있었지만, 함량이 수입된 "소마리청"과는 달랐다. 구워낸 결과도 수입 "소마리청"을 썼을 때보다 못했다. 그리하여, 수입이 보장되면, 국내의 자기제작자들은 국산 청색안료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수입 "소마리청"이 비싸지 않았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16세기의 대부분 시간동안, 가정제때부터 만력제때까지, 청화자기의 기술은 약간 진보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청화자기를 굽는데 사용한 안료는 그 이름도 유명한 "소마리청"이 아니라, 일종의 "회청(回靑)"이라고 불리우던 안료이다. 소위 "회청"은 "회회청(回回靑)"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소마리청"과 마찬가지로 아랍에서 왔다.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소마리청"과 "회청"은 사실 동일한 코발트안료의 서로 다른 칭호이다. 다만 서로 다른 점이라면, "소마리청"은 해상무역을 통해서 오고, "회청"은 서역과 중앙아시아의 육로무역을 통해서 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기를 연구하는 전문가라면 이 문제에 대하여 여기까지 연구하면 답이나 결론을 찾은 것이고, 임무를 완성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제를 더욱 확대해보고자 한다. 명나라전기에 해상에서 온 "소마리청"은 왜 명나라중후기에 육로로 온 "회청"으로 대체되었을까? 이런 대체는 중국의 청화자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명나라의 역사에는 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명나라전기는 정화가 해상을 제패한 시기이다. 해외에서 중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수입하기 편리했다. 그리하여 "소마리청"이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15세기후기 명나라 성화(成化)연간에 이르러서야 다 쓸 수 있었다. 수입한 "소마리청"을 다 쓴 후에, 명나라정부가 다시 수입하고자 했을 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해상비단길에 강도가 나타났다. 바로 포르투갈인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서, 아랍과 인도에 도착했다. 유럽인들에게는 시대의 획을 긋는 발전이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는 사실 아랍에서는 살인약탈을 자행했고, 인도에서도 군사기지를 건립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싱가포르를 점령해서, 현지정부를 전복시키고 포르투갈인의 정권을 수립한다. 바꾸어 말하면, 유럽인이 해상비단길에 나타나면서, 수벽년동안 이 항로에 있는 아시아국가들간의 정상적인 무역이 철저히 파괴된 것이다. 한 무리의 유럽강도들이 정상적인 국제무역질서를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완전히 무력을 사용하여, 자신들이 무역을 독점해버린다. 이것은 15세기 후반에 나타난 일이다. 명나라의 "소마리청"이 소진되자, 부득이 국산청색안료를 사용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국내청색안료의 효과는 당시 좋지 않아서, 명나라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16세기의 대다수의 기간동안, 야만적인 포르투갈인들이 해상비단길을 점거하고 있어, 명나라는 부득이 해상무역을 피하고, 육로로 "회청"을 수입하게 된다. 그러나, 육로로 "회청"을 수입하는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시기의 명나라사료를 살펴보면, 명나라관청에서 "회청"의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심지어 절도방지조치까지 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력후기에 이르러, 육로로 "회청"을 수입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청화자기는 중국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유럽인들이 해당비단길을 점거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 명나라에 준 영향의 하나는 재정수입이 하락하고, 그리하여 만력시기에 장거정의 개혁중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만, 국내의 개혁에만 머무르고, 날로 열악해지는 외부환경은 바꿀 수가 없었따. 재정실력이 하락하면서, 육로로 "회청"을 수입하는 것도 결국은 원가가 갈수록 비싸져서 결국은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
유럽인들이 수백년간 형성된 아시아의 해상무역환경을 파괴한 후, 나타난 또 다른 영향은, 멀리있는 아랍 인도와의 무역이 거의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동남아무역도 큰 영향을 받는다. 원래 해상무역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백성들은 정상적인 무역질서에 종사할 수 없어 생계를 잃고, 할 수없이 해적으로 전락한다. 명나라중기, 중국연해의 일부 백성은 해적의 무리에 가입하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정상적인 무역질서가 회복되기 전에는 명나라정부가 무역을 개방할 수 없었다. 해적과 왜구를 진압하는 것이 시급한 현안이 되었다. 해적이 평정된 후에, 명나라는 해상무역을 개방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항로를 장악하고 있어, 자유무역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결국 예전만같지 못하게 된다. 사실 당시의 포르투갈인들은 그저 더욱 위험한 해적일 뿐이었다. 이 야만적인 유럽인들에 의하여 일어난 해상혼란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지켰던 아시아국가는 일본뿐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영향력을 빌려, 쇄국정책을 진정으로 실시하여,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처럼 식민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당대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당시에 철저히 쇄국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들이 나중에 힘을 떨칠 수 있는 필요조건이었다고 본다.
유럽해적이 해상비단길의 해양무역을 파괴함으로 인하여 명나라의 재정능력이 하락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타난 또 하나의 결과는 동북의 만주족에게 기회를 주게 되었다. 명나라가 허약한 틈을 타서, 자신의 이익을 더 많이 추구하게 된다. 명나라의 진압능력이 부족하여 바로 평정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후환을 남기게 된다. 이외에 전체 16세기에, 중국의 해외무역은 그래도 진행되었다. 다만,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유럽인들은 실제로 필요한 상품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금은으로 중국과 무역했다. 중국의 화물은 계속 수출되었고, 금은은 중국이 필요로 하는 물건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물가상승, 통화팽창이 일어나고, 이는 백성의 생계를 위협했다. 그리하여 민간의 변란도 일어나고, 농민반란으로까지 번졌다. 내우외환이라는 말로 이 시기를 형용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명나라 중후기에 문(文)에는 장거정이, 무(武)에는 척계광이 있었다. 자연과학에는 이시진, 송응성이 있었다. 그들의 저작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자연과학성과였다. 인문영역에서도 우수한 지식인들이 풍부했다. 중국사회의 문명화정도가 세계에서 최선진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도래가 미칠 심각한 영향에 대하여 인식이 부족했다. 유럽인들의 본성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다. 외래민족에게 습관적으로 사용해오던 수단은 유럽인들에게 별 소용이 없었다. 명나라는 적시에 이들 야만적인 유럽인들에 대응할 효과적인 수단을 찾아내지 못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키는 것은 소용이 없고, 반드시 적극적으로 공격해야 했다. 일본식의 쇄국정책은 중국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지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명나라는 예상외로 만주족에 멸망당한다. 이것은 아주 통한의 교훈이다. 본문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한 원인까지 따져보지는 않겠다. 그저 청화자기의 변천과 당시 세계의 대사건을 연결시켜보면, 우리의 명나라의 운명에 대한 인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명나라 이후, 청나라의 청화자기는 안료를 주로 국내산을 사용한다. 국외안료는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재능을 활용하여 마찬가지로 뛰어난 국내안료 사용방법을 만들어낸다. 유럽인들이 자기의 제조비법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중국의 청화자기는 예전의 풍광을 잃게 된다. 지금에 와서 옛일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중국과 문화 > 중국의 골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오(南澳) 1호: 중국의 해저유물 (0) | 2010.05.19 |
---|---|
중국의 골동품소장열기 (0) | 2010.02.03 |
문화재반환의 "원죄" 문제 (0) | 2009.03.12 |
"원청화(元靑花)"를 둘러싼 논쟁 (0) | 2008.11.05 |
사모무(司母戊) 정(鼎) 출토의 진상 (0) | 2008.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