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굉량(宏亮)
서론
여러 산으로 둘러싸인 적봉(赤峰)시는 몽고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적봉시로부터 다시 북쪽으로 160여리를 가면, 한 현성(縣城)이 나오는데, "옹우특기(翁牛特旗, 기는 몽고지역의 지방단위)"라고 부른다. "옹우특"이라는 것은 몽고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에는 작위를 받은 왕들이 많이 모여있던 곳이다. 한어의 "왕들"이라는 두 글자의 몽고발음은 "옹우"와 비슷했다. 그리하여 옹우특기라는 이름은 바로 한어에서 몽고어로 음역되었다가 다시 몽고어가 한자로 음역된 결과 탄생하였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이 옹우특기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농민이다. 그의 이름은 장봉상(張鳳祥)이다. 그의 집안은 조상대대로 농민이었다. 옹우특기에서 10여리 떨어진 새심탑랍촌(塞沁塔拉村)에 살고 있다. 새심탑랍은 몽고어에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석갱(石坑)의 출현
장봉상이 17살때, 즉 1971년에 농사일을 하는 도중에 국보 하나와 인연을 맺게 되며, 기나긴 평범하지 않은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평소처럼 농삿일을 하고 있었고, 태양은 높이 걸려있었다. 나무아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대로 돌맹이를 들었다가, 아무 생각없이 한편으로 살펴보면서 한편으로는 집어던졌다. 그리고 다시 집어보니 작은 돌맹이였고, 달걀만한 크기였다. 그는 갖고 놀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연 화라락 소리가 나면서 흙이 무너져 내렸다. 아래에는 작은 석판이 있는데 반짝반짝 빛이 났고, 덮개가 덮여 있었다. 사람들이 일부러 쌓은 석갱같았다.
장봉상은 하루종일 치웠다. 돌맹이를 들어내면 다시 돌맹이었다. 재미도 없고 실망도 했다. 바로 이때, 돌연 그는 녹슨쇠덩어리 하나를 발견한다. 마음 속으로 혹시 보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더 찾아봤지만, 제대로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아서, 아주 실망을 했다. 그리하여, 잠시 마음이 동했던 녹슨쇠덩어리도 곁에 던져둔다. 그리고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저씨를 만난다:
"제가 이 쇠덩이를 주웠는데, 아주 큽니다"
그때 쇠는 근당 2푼, 4푼을 했는데, 그 쇳덩이는 2,3근은 되어 보였다. 그래서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집어온 것이었다.
아저씨는 "네가 집어온 건 쓸모가 없다. 녹도 슬었는데,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장봉상은 "이거 아무래도 사탕 두개하고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아저씨는 손에 든 가래로 힘주어 내려쳤는데도 깨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버려버렸다.
아저씨의 태도를 보고, 장봉상이 하루종일 고생해서 얻은 것은 그냥 길가에 버려졌다. 이렇게 되었으면 그것로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초의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 녹슨쇠덩어리를 그냥 버려버릴 것인가? 아니었다. 한참을 생각한 장봉상은 버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버렸다가 줍고, 줍고는 다시 버렸던 것을 장봉상은 녹이 슬어버린 쇳덩이로 생각하고 집에 가져왔다. 주워온 것인데, 집안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고,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장송상은 그 "녹슨쇠"를 집귀퉁이에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그저 자그마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고물상이 나타나면 폐철로 팔아서 몇푼의 돈을 바꾸려고 하였으며, 그 돈으로 사탕이나 몇개 사가지고 동생들과 나눠먹을 생각이었다.
장씨집안에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장봉상이 장남이었다. 가장 어린 동생은 당시 겨우 4살이었다. 이 어린 동생이 놀수 있게 위하여, 이 녹슨쇠라고 생각했던 것을 새끼줄에 묶어서 동생이 장난감처럼 쓰게 해주었다. 어린 동생은 매일 이 녹슨소ㅣ를 끌고, 어들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너무 좋아하니까, 식구들은 고물상에 팔려는 생각을 접었다. 십여일이 지났다. 아무도 생각을 못하였는데, 어린아이가 며칠을 끌고 다니다보니, 점점 원래의 색깔이 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는 녹슨 쇠같았던 것에서 묵록색의 밝은 색이 드러났다. 이것은 절대 녹슨 쇳덩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람을 괴롭히는 보배
촌사람들은 모두 이건 좋은 물건이라고 말했고, 아마도 옥인 것같다고 하였다. 어린아이가 부숴뜨리지 않게 하라고 권했다. 이건 고물이 아니다. 보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 마을이 들썩였다. 비록 아무도 뭐에 쓰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마지 않았다. 모두 이 물건은 절대 쇳덩이가 아니라고 말했고, 고물은 더더구나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옥을 조각해서 만든 보배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란은 요란으로 끝났다. 도대체 무엇이며, 뭐에 쓰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어떤 사람은 잘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자고 했다. 어떤 사람은 대대로 가서 감정을 받아보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이제 장씨집안은 부자가 되었다고도 했다.
이날부터, 장봉상 일가는 다시는 그 물건을 아이의 장난감으로 쓰지 않았다. 온 집안사람들이 보배로 생각했다. 장봉상의 부친은 2척의 붉은 베를 찢어서 꼭 싸두었고, 옷장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열쇠로 잠궈서 아무도 훔쳐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당시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무슨 골동품감정이니, 수장이니 하는 것이 없었다. 그때는 1971년이었다. 막 문화대혁명기에 들어섰고, 전국에서 도시건 농촌이건 "사구(四舊)"를 파괴하는 풍조였다.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농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도시에서도 제대로 문화재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녹슨쇠에서 옥으로 바뀌었는데,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봉상의 보모는 국가에 감정을 부탁하자고 했고, 돈되는 것이면 팔고, 돈안되면 놔두자고 했다. 나중에 그의 부친은 이것을 들고 생산대를 찾았다. 한옥룡서기를 찾았는데, 그는 "문화관으로 가보라. 돈되는 것인지 아닌지 보게..."라고 했다.
왜 장봉상일가는 먼저 이 옥을 들고 생산대를 찾았을까?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같다. 당시의 생산대는 농통의 행정과 지령을 실행하는 직접적인 생산경영단위였다. 생산대의 책임자는 상급책임관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장봉상과 부친은 생산대서기의 말을 듣고는 바로 십여리를 달려가서, 기문화관의 공무원을 찾았고, 옥을 보여주었다. 당시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당시 문화관에서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문화재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이 물건은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그들보고 가지고 되돌아가라고 하였다. 장씨부자는 희망을 품고 왔는데, 문화관에서 받아주지도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장씨부자는 할 수 없이 실망을 안고 그 물건을 들고 되돌아왔다.
시간은 1971년 10월이었다. 비록 이 물건을 문화관에서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장씨집안 사람들이 이 물건에 대한 애착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신경써서 보관했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나중에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기간동안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온갖 아이디어가 다 나왔다.
하마터면 국보급의 담배대주둥이가 될 뻔하다.
장봉상의 외삼촌도 찾아왔다. 그는 잘라서 담뱃대주둥이(煙嘴)를 만들면 5촌길이로 하여 너댓개는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옥으로 만든 담뱃대주둥이는 큰 소 한마리와 바꿀 수 있었다. 당시 그들 생산대의 큰 소 한마리도 담뱃대주둥이를 주고 바꿔온 것이었다. 외삼촌은 자기도 한 개를 달라고 했다. 이 옥이면 4,5개는 만들 수 있고, 소 한마리가 180위안인데, 소 여러마리가치는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당시 소 다섯마리라면 생산대의 전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아이디어대로 되었다면, 장봉상일가는 당시에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고, 생산대 안에서 부자로 통했을 것이다. 당시 국가도 가난하고, 농민도 가난했다. 이 아이디어는 장봉상일가에게는 괜찮은 생각이었다. 장봉상 일가도 마음이 동했다. 그리하여 현성을 찾아가서 몇번 알아보았다.
나중에 그의 부친은 "됐다. 이건 어쨌든 보물이 아니냐. 망가뜨려서는 안된다. 자르지 말자." 이것은 확실히 축하할만한 결정이었다.
화장실에 놓여진 국보
담뱃대주둥이로 만들어지지 않게 됨에 따라, 소로 바꾸겠다는 기쁨도 사라졌다. 장씨집안은 그래도 희망를 버리지 않고 이 물건을 돈으로 바꾸고자 했다. 한참이 지난 후, 장씨부자는 다시 '보물'을 들고 대대지부서기를 찾아갔다. 어쨌든 국가에 헌납하려 한 것이다. 지부서기는 "너희가 지난번에 기문화관에 갔을 때, 아마도 사람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같다. 이번에 너희는 다시 문화관장을 찾아가라" 지부서기의 말을 듣고, 장봉상일가는 다시 이 물건을 안고 옹우특기문화관으로 갔다. 이번에 가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부관장인 왕지부가 그들을 맞이했다. 자기들은 감정할 능력이 안되니 전문가에게 감정해주겠다고 했다. 이를 받은 후에도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도 몰랐다. 수장하는 곳은 조건이 열악했다. 버려진 화장실에 놓아두었다. 당시 수장품은 모두 이 곳에 두었다.
이 옥이 기문화관에 들어갔으니, 제 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를 기다리는 장봉상일가는 거의 매일 이 물건이 도대체 무슨 물건인지 도대체 가격은 얼마나 나가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기다린 시간만 1,2년이 흘렀다. 이 기간동안 장씨집안사람들은 문화관에 여러번 찾아가서 결과를 물어봤다. 그러나, 매번 문화관은 제대로 답변을 주지 ㅇ낳았다. 그리하여 장봉상 일가는 조급해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문화관은 이 물건을 받은 후에 창고에 집어넣고 말았던 것이다.
신세의 수수께끼는 여전하다.
사실 고고라는 것은 연대를 정하려면 방증이 필요하다. 직접 지층에서 발견하거나 했으면 연대추정이 쉽다. 이 물건은 발견된 이후 현장이 파괴되었다. 왜냐하면, 비전문가가 그냥 파낸 것이므로 어느 지층에서 나오고 다른 문화재 어떤 것과 함께 나왔는지 등등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두 마음이 조급했다. 문화관에서는 시급히 전문가를 찾아서 감정하려고 했고, 하루빨리 결론을 얻고 싶었다. 장봉상일가가 조급한 것은 돈으로 바꿀 수 있느냐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경제적 곤란을 조금이나마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당시의 관장인 왕지부는 이 물건은 문화재라고 생각해서 남겨두었다. "내 월급을 당신에게 줄테니 우선 쓰십시오" 당시 그의 급여는 1달에 37위안이었다. 그는 장씨부자에게 30위안을 주었다. 원래 고물상에게 바꾸어 사탕이나 몇개 얻으려고 생각했던 장봉상에게 이 30위안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철이 아니라 옥이었다. 담뱃대주둥이만 만들어도 소 몇마리는 챙길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 30위안은 기대와는 차이가 컸다.
당시 농민들은 정말 가난했다. 옹우특기는 전국에서 가장 빈곤한 현의 하나였다. 자기의 급여를 가지고 장려금을 지급한 왕지부관장은 장씨부자의 계속된 열의와 성의에 감동했다. 당시 관장이 자기의 월급을 지급할 정도로 성의를 가지고 대했는데,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 관장은 지금 살아있지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또 하나의 의문은 기문화관은 왜 오랜기간동안 이 옥을 창고에 방치해두고 있었을까?
중화제일룡
옹우특기문화관의 부연구원 가홍은은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들고 보았는데, 이 물건은 원시시대의 것일리는 없다고 보고, 상,주시대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법이나 조각수준으로 보아서 원시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게 좋은 조각기은 금속시대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금속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잘 깍을 수 있겠는가? 원시시대에는 금속이 없고, 석기만 있는데, 돌로 돌을 깍고, 공구도 돌이고 금속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당시에는 감히 그렇게 얘기할 수가 없었다. 증거가 없었고, 불충분했다"
이 물건이 옹우특기문화관에 들어온 후, 시, 기의 고고전문가들은 여러차례 연구를 했다. 그러나 증거부족으로 이 물건은 여전히 문화관의 창고에 조용히 처박혀 있었다. 비록 오가는 사람들이 보기는 했고, 옥기인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언제적 물건인지는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년여를 놔두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어느 시대의 물건인가? 도대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얼마인가?
1974년이 되어, 중국과학원고고연구소의 유관민 선생이 이 물건을 본 후에 아주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에 속하는 물건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현지문화관이 중시하게 되고, 대청에 전시되게 된다.
유관민선생이 말하는 홍산문화는 몽고의 적봉시의 홍산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고고학의 문화명명관례에 따라, 하나의 문화가 가장 먼저 발견된 유적지의 지명을 딴 것이다. 1938년부터, 홍산에 있는 신석기문화유적지는 고고학계에 잘 알려져 있었다. 건국이후, 홍산유적지 및 인근지구의 다른 동일한 신석기시대유적지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와 발굴을 진행했고, 많은 진귀한 문물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이를 정식으로 홍산문화라 명명한 것이다.
자주 내몽고 적봉지구에 찾아왔던 유관민선생은 이 보물의 가치를 발견하는데 큰 공로를 세월다. 그는 여러 발굴작업도 진행했고, 그는 옹우특기의 이 사건후 친히 새심탑랍에서 현장조사도 실시했다. 최종적으로 지금은 고인이된 고고학의 태두 소병기 선생이 이 옥기의 형상과 재질을 가지고 원시사회인 신석기시대의 "옥룡(玉龍)"으로 판정했다. 지금으로부터 5000-6000년전의 유물인 것이다. 비록 이 옥기는 창고에서 나와서 중요한 문화재로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기문화관내에 있었다. 외부에서는 이 보물을 알지 못했다. 이해는 1974년이다. 이 보물은 언제나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인가?
만성한묘, 증후을묘와 진시황병마용등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머리 변방에 있는 홍산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옥룡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1983년, 우하량유적지가 발견된 후, 거기서 옥기가 다량 발굴된다. 이러한 옥룡도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당시 옹우특기문화관의 부연구원인 가홍은이 간략한 보고서를 낸다. 1984년, 그는 다시 글을 써서 문물이라는 정기간행물에 발표한다. 이후 많은 문화재전문가가 일련의 연구성과를 쓰게 되고, 전체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온다.
용행천하홍산열(龍行天下紅山熱)
15년을 기다려서, 이 소식은 청천벽력처럼 고고학계를 놀라게 하고, 역사학계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저명한 현대작가이자 역사문물연구학자인 심종문 선생을 놀라게 한다. 장기간 문화재연구에 종사한 감각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용봉예술>>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록 80여세의 노인이지만, 이 옥룡의 소식을 듣고는 기쁨을 참지 못하였고, 관례를 깨고, 병석에서 옹우특기문화관의 인원을 만나게 된다.
1986년, <<인간화보>>에 전체 페이지를 이 옥룡의 사진으로 장식한다. 더 나아가 이 옥룡의 역사적지위의 중요성도 인정받는다. 이렇게 하여 어린아이가 끌고다니던 녹슨쇠는 홍산벽옥룡(紅山碧玉龍)으로 명명되고, 세상의 주목을 받는 무가지보가 된다. 여러번 국내외에서 전시도 한다. 깔끔한 조형과 깨끗한 질감으로 국내외의 감탄을 자아냈다. 옹우특기에서 출토된 이 옥룡은 문화관에서 15년간 조용히 방치되어 있다가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른 것이다. 현재 옥룡은 정식으로 국가박물관에 들어갔다. 국가가 영구히 보관하는 1급문화재가 된 것이다. 적봉시 옹우특기는 "옥룡의 발상지"라는 칭호를 듣고, "옥룡의 고향"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도 얻게 된다.
사람들은 이 옥룡을 "화하제일룡" "중화제일룡"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천하제일룡"으로 부르기도 한다. 화하은행의 총재는 적봉사람이어서, 은행의 표지도 이 옥룡의 형상을 채택했다고 한다.
비록 오늘날 이 옥기의 제작기법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상상되지 않는 의문이 있지만, 이것때문에 홍산문화에 대한 열기가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많은 민간수장가들도 크고작은 홍산옥룡을 수장하고 있다.
꼬릿말
그렇다. 사람들이 각종 느낌으로 홍산문화가 전해주는 문명의 서광을 바라볼 때, 누군가가 옥룡의 출토지-옹우특기의 새심탑랍촌을 기억해줄 것인가? 당시 녹슨쇠로 생각하고 끌고다니던 어린아이를 기억할 것인가? 당시의 청년은 이미 외손자를 두었다. 당시 어린아이도 이미 결혼을 했고,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국내외의 전문가, 학자들이 방문할 때, 장봉상은 이렇게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전부 손해봤다고 말하고,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국가에 준 것이니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후대자손들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이니 행복합니다"
지금도 장봉상은 여전히 새심탑랍촌에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10미터높이로, "중화제일룡"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비석의 꼭대기에는 수십배확대한 홍산벽옥룡의 모양이 멀리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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