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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왜 이홍장을 명예회복시켜야 하는가?

by 중은우시 2008. 10. 10.

글: 성시전기(城市傳奇)

 

청말의 일대중신으로서, 이홍장은 19세기하반기의 중국역사무대에서 시종일관 고금 중외 조야 만한의 각종 모순의 소용돌이중심에 있었다. 그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 배회하던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되돌아보면, 이홍장의 이상, 이념은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보다 높이 있었고, 멀리 보았다. 그는 두 가지 아주 중요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바로 세계국면에 대한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당시에 처한 환경에 대하여 치국방략을 제출하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한가지 주장을 했다. "중국은 수천년동안 미증유의 강적을 만났다. 중국은 삼천년이래로 미증유의 대변국에 처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동치연간에 제출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장정불이 아주 높게 평가했다. 그는 19세기중국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이 가장 높고, 가잘 멀리보았던 한마디라고 보았다.

 

이홍장이 말한 "3천년래의 미증유"라는 것에서 삼천년은 서주(西周) 개국이후 이홍장까지의 3천년이다. 서주개국에서부터 만청까지 몇 개의 왕조가 바귀었고, 몇번이나 이민족의 침략이 있었으며, 중국이 이렇게 저렇게 고생을 겪었지만 모두 오늘의 이 대변국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흐릿하게나마 이것이 큰 변국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에는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 대변국이 실제로는 근대화라는 것을. 근대화는 1840년 영국에서 완성된 산업혁명이후, 전체 세계의 공업화 조류를 이끌었다. 근대화의 조류가 석권하면서, 중국이라는 오래된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1840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완성되고, 1856년 크림전쟁이 있은 후, 러시아는 1861년 농노개혁을 실행한다;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때, 미국은 남북전쟁을 끝낸다; 독일은 페르시아가 1866년 오스트리아를 이기고, 1871년 프랑스-독일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긴다, 그리하여 전체세계는 모두 이 시기에 근대화를 향하여 매진했다. 이홍장은 세계의 발전을 볼 수 있었고, 세계국면의 중대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이는 그 시대에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이홍장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가장 멀리까지 보았고, 가장 확실히 보았다.

 

다음으로, 이홍장의 치국이념이다. 그는 하나의 주장을 내놓았는데 바로 "밖으로는 오랑캐와 화해하고, 안으로는 변법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밖으로 오랑캐와 화해한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서구열강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대내적으로는 변법자강을 시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기본이념이다. 이홍장은 말했다. 우리는 평화적인 국제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각국과 싸우지 말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 후에 시간을 확보하여 국내의 개혁과 변법을 가속화시키고, 국내의 자강을 강화하여, 자신의 발전에 필요한 시간을 번다. 그러므로, 그 때 이홍장은 양무운동을 강하게 추진하고, 기업을 만들고, 군대를 만들었다. 그는 신속히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 시대에, 이런 비교적 실질적인 방침을 채택한 것은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유리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갑오해전(청일전쟁)때 북양해군이 철처하게 패배한다는 점이다. 당시 북양대신, 직예총독의 요직에 있던 이홍장은 벗을 수 없는 책임이 있다.

 

이전에, 서방과 밀접한 왕래가 있던 이홍장의 사상은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그는 당시 절대다수의 관리들이 보지 못했던 중국과 서양의 차이를 보았다. 그의 창도하에 '양무운동'이 벌어진다. 그리고 많은 정도에서 중국과 서양의 군사장비의 차이를 좁혔다. 유감스러운 점은 당시의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다. 그리하여 각 파벌이 서로 권리를 다투어서, '양무운동'의 전체적인 효과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우매하고 낡고 썩은 서태후는 전체 중국의 국방건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갑오해전이 개전되기 3년전인 1891년, 서태후는 호부의 상소문을 돌렸다: "남북양은 외국의 총포, 선박, 기기를 구매하는 것을 2년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호부에서 돈을 내어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라" 항상 서태후의 명이라면 다 따랐던 이홍장은 이때는 참지 못하고 의견을 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성조의 해양방어를 신중히 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큰 뜻에 어긋나지 않나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갑오전쟁이 개시되기 직전인 1894년, 서태후는 60세생일을 개최한다는 명의로 두 번에 걸쳐 해군군비를 빌려갔다. 제1차는 437만냥이고, 제2차는 750만냥이다. 갑오해전에 대하여 이홍장은 벗을 수 없는 과오가 있다. 그러나 패전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여전히 당시의 부패정치체제와 국가지도자인 서태후의 국방의식박약에 있었다.

 

돈의 문제는 기실 한 국가의 양무에 종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1874년, 일본이 대만을 침입했다. 이는 이홍장을 아주 긴장시켰고, 이홍장의 한가지 관념을 바꾸게 하였다. 이전에, 이홍장은 일본과 중국은 모두 황인종으로 동문동종(同文同種)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단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홍장의 기본외교사상은 동양이 연합하여 서양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홍장은 조정이 모두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1872년 혼자서 일본과 <<중일수호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는 중국근대사상 보기드문 평등조약이다. 다만 그는 이때 발견한다. 일본은 결국 대만을 침범하고자 하고, 유구를 집어삼키고자 한다. 이홍장은 일본의 야심이 너무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은 수족지환(手足之患)이지만, 일본은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고 보았다. 일본은 20년후에 반드시 중국을 망하게 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홍장은 1870년대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로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양방어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이홍장이 가리키는 해양방어는 개괄하는 방면이 많다. 해군뿐이 아니라, 연해의 포대건설까지 들어가고 기계제조도 포함되며, 인재배양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해양방어에 들어간다. 실제로 이 해양방어(海防)는 중국근대화의 큰 이슈였다.

 

이홍장은 이를 위하여 조정에 <<주판해방절>>를 올린다. 이 글을 정부에 올린 후, 청나라정부는 당시 가부를 답하지 않았다. 군기대신과 총서대신은 토론만 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중에 결국은 서태후가 결정한다. 서태후는 너희들이 결정하지 못하면 내가 결정하겠다라고 하면서, 6부와 각지의 독무대신들에게 토론을 시키고 1년내에 의견을 올리라고 한다.

 

1년후 의견이 모두 모였다. 이들 관료들은 각양각색의 의견을 모두 내놓았다. 그러나 한가지인 것은 해양방어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의견을 내는 자가 없었다. 서태후의 매부인 순친황 혁현, 광서황제의 생부를 포함하여, 모두 상소문에서 "해양방어는 가볍게 할 수없는 일이지만, 더더구나 식음을 전폐할 수는 없다"고 하여 양쪽 모두에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종당이 아주 중요한 글을 올린다. 좌종당은 만일 돈을 내서 해양방어를 하려면, 아예 그 돈을 나에게 달라. 내가 신장으로 가서 싸워서 신장을 되찾아 오겠다. 좌종당이 요구한 것은 서쪽정벌이었다. 이 두가지 의견에 대하여 도대체 돈을 어디에 써야 할 것인가? 동쪽인가, 아니면 서쪽인가? 군기대신은 이를 놓고 토론을 벌였는데, 모두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서태후가 어떤 입장인지 몰랐으므로 아무도 의견을 먼저 내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군기대신 문상(文祥)이 결정한다. 그는 서쪽정벌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신강은 건륭제가 얻어온 강산이므로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땅은 반드시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하나의 지도사상이 있었다:토지가 바로 판도이고 국토이다. 해양은 그저 물이다. 돈을 물에 쓰는 것은 가치가 없다. 그리하여 그는 좌종당을 지지한 것이다. 문상은 두손을 모두 잡아야 하고, 전력을 다하여 서정을 하고 해방도 같이 돌본다고 하였다. 그러나 돈을 나눌 때, 주로 돈을 좌종당에게 준다. 그후 해관이 매년 내는 세금에서 400만냥을 빼서 남북양 해양방어에 쓰게 한다.

 

이홍장은 심보정을 찾는다. 이 400만냥은자는 누구에게 주어도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심보정은 당시 이홍장이 대만문제에 있어서 그에게 군대를 파견해주어, 심보정이 국면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데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심보정은 400만냥의 은자를 한쪽에만 주어도 부족한데 양쪽에 줄 수는 없다고 보고, 남양과 북양의 400만냥 은자를 모두 이홍장이 쓰도록 주었다. 이홍장은 이 돈을 모아서, 1888년에 비로소 북양수사를 건립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지금의 시각으로 다시 분석하면, 역사는 가설이 없다. 다만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거기서 경험과 교훈을 찾기 위한 것이다. 한 국가의 발전전략, 국방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당시의 집권자는 서태후, 문상을 포함하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근대중국에서 가장 큰 위기는 해상에서 왔다. 다섯번의 침략전쟁, 두번의 아편전쟁, 중국-프랑스전쟁, 갑오전쟁(청일전쟁), 팔국연합군의 침입이 모두 바다에서 왔다. 다만 우리는 돈을 서북변방에 쓰고 있고, 동남연해는 적들의 침입에 무방비로 개방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북에 돈을 주로 쏟아부었다. 이것은 국가국방전략의 실책이다.

 

그러나,많은 사람은 말한다. 만일 좌종당이 신강을 회복하지 않았다면, 돈을 모두 모아서 해양방어에 썼다면, 그래서 신강을 잃었다면 어떡할 것이냐고. 그래서 역사에 가설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록 시모노세키조약의 배상금이 2억3천만냥이지만 일본에 배상할 수 있었다. 왜 1억냥의 돈을 들여서 수군을 만들지 못하겠는가? 해군방어를 제대로 했다면, 국가의 변방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홍장을 공격하고, 그가 양무를 한 것은 자기 개인실력을 건립한 것이고, 그렇게 하여, 조정이 다루기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모두 이렇게 공격하고 있지만, 아무도 중국이 약한 상황하에서 어떻게 국가주권을 지키고 영토완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말하지 않는다.

 

나중에, 북양해군이 갑오해전에서 비록 당시에 '삼갑'이라는 견고한 선박과 좋은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유효한 전술로 응전하지 못했다. 전쟁 얼마전에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항구에서 먹고마시며 놀았던 제국해군이 궤멸했다. 이리하여 결국 대청제국의 해군은 다시는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만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평소에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말이 맞다는게 입증된 셈이다: "평소에 땀은 적게 흘리면, 전쟁때 피를 많이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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