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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이홍장의 권모술수

by 중은우시 2007. 2. 8.

글: 뇌이(雷이)

 

1860년 청나라 정부는 "이인부족려(夷人不足慮, 서양오랑캐는 우려할 만하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중외화호(中外和好, 중국과 서양제국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의 방침을 확정하였고, 서양오랑캐의 세력을 빌려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당연히, 이와 같은 전략의 180%전환은 구체적인 시행이 그리 쉽지는 않았고, 일련의 '적응'과정을 거쳐야 했다. 상부로부터 하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고, 서로 다르게 이해했고, 서로 다르게 전략을 집행했다. 게다가 집행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서양오랑캐'중 누구에게 힘을 빌려서 태평군을 진압할 것인가? 협력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할 것인가? 군대지휘권은 누가 장악하도록 할 것인가? 협력의 구체적인 방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서양군'이 '태평군'을 어느 정도로 진압하게 허용할 것인가? 등등의 구체적인 문제는 미해결로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중앙정부는 구체적인 방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가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방정부와 지방관리들은 비교적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유재량권'이 있었다.

 

"차사조초(借師助剿, 서양군사를 빌려 태평군을 죽이는데 도움을 얻는다)"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곳은 당연히 자기으 ㅣ이익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방이었다. 즉, 상해를 중심으로 한 동남지방의 관리호족이었다(태평천국이 남경에 웅거하고 있었음). 사실 조정의 대외정책이 변경되기 전에도, 서양인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상해의 관료지방세력은 이미 서양군대의 힘을 빌려 방어하고 있었따. 1860년 상해에서 군사업무를 맡고 있던 오후(吳煦)는 미국인 와드(F.T.Ward, 중문명은 華爾)를 고용하여 양창대(洋槍隊)를 조직하였다. 와드의 이 부대는 "상승군(常勝軍)"이라고 불리웠고, 상해부근에서 태평군들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무기가 뛰어났으므로 승전을 이끌었고, 청나라 정부를 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862년 9월하순 와드는 태평군과의 전투중에 전사한다. 이후 청나라 정부는 미국인 H.A. Burgevine(중문명은 白齊文)으로 하여금 상승군을 이끌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지방관리는 중앙정부의 동의를 받지도 않았다. 이를 보면 지방세력이 이미 중앙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외국군대를 끌어들일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도 알 수 있고, 외국세력이 지방에 뿌리깊게 침투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차사조초"의 정책은 일부 대신의 반대에 부딛쳤다. 증국번도 완전히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1862년, 증국번은 양강총독(兩江總督)을 맡고 있었는데, 중병(重兵)을 장악하고 있던 그는 조정의 중대한 정책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는 곤란했었다. 그래서 상소문에서 먼저 자기의 힘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태평군을 소멸시킨 후 나중에 다시 "차사조초"의 일을 생각하자고 하였다. 이것은 완곡한 반대였다. 당시 중요지구의 태평군은 이미 소멸되었으므로 더 이상 서양오랑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양오랑캐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대한 상해일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상해는 통상항구이므로 서양인의 이익이 많이 관련되고, 상해는 방어할만한 험준한 방어벽이 없고, 청나라 군사력도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계속 강조한 것은 '오랑캐병사'를 빌리는 것은 태평군을 '방어'하는데 있는 것이지, 태평군을 '진압'하는데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강소절강의 관리들이 서양병사를 빌려 강녕(남경), 소주, 항주일대를 수복하자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그는 큰 반감을 보였고, 이는 과거시험을 총잡이로 대신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는 지방관리들이 이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신(증국번)의 군사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발생한 잘못이라고까지 하였따. 그러면서, 외국오랑캐의 힘까지 빌려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 태평군을 진압할 군대가 없다는 점은 치욕이라고 하였다. 이는 겉으로 '자책'하는 글을 빌려, 속으로는 외국오랑캐의 힘을 빌리는데 '반대'한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홍장이 상해에 도착한 후, 증국번은 서신을 통하여 여러차례 그에게 서양인들과 협의하는 경우의 원칙과 전략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로써 증국번은 서양인들과의 협의가 중요하고 주의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서양인들과 교류한 경험이 전혀 없던 이홍장은 바로 서양인들과 직접 대면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증국번에 한번 서신을 보낸 바 있다.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증국번의 가르침을 요청했다. 그는 상해의 지방관리세력은 서양인들에게 잘보이려하고 있으며, 너무 유약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부 반대자들은 너무 강경하다고 언급하여, 그가 서양인들과 협상하는 원칙은 강과 유의 중간노선을 걸을 것임을 얘기했다. 그는 강유(剛柔)의 중간을 걷고, 통제와 회유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평형을 이루려고 한 것인데,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홍장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 Ward는 그를 만나기를 거절했고, 위세를 보였다. 얼마후 Ward 및 상승군과 몇차례 접촉을 해본 후에, 이홍장은 증국번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을 '멍청이'라고 조롱했고, 상승군은 기껏 백수십명이며 모두 외국의 깡패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승군의 전투력은 확실히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홍장은 그들을 회유하여 자신이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자기가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차례의 접촉후 상승군은 아주 정예부대이기는 하지만 다루기가 쉽지 않고, 제멋대로인 것을 알았다. 청나라의 관리들은 그동안 그들을 방종했고, 제대로 다루지를 못했었다. 게다가 중국관리들중에서는 이홍장과 반대입장에 선 오후(吳煦)와 양방(楊坊)만이 그들과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하였다. 오후와 양방은 상승군에게 청나라군대에 비하여 몇 배의 양식과 군자금을 제공했다. 이로 인하여 상승군이 태평군을 진압하는데는 유용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의 권위와 청나라 정부에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기회를 봐서 그들을 제압하고자 하였고, 이를 계기로 오후와 양방의 직무와 병권을 박탈하고자 하였다. Ward가 죽고, Burgevine이 상승군을 이끌게 되면서 결국 이홍장에게 기회는 왔다.

 

Burgevine는 성격이 Ward보다 독단적이어서 오후, 양방과도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오후, 양방은 군자금을 지급하지 않고 미루고 있었다. 1863년 1월, Burgevine는 송강에서 부대를 이끌고 상해로 돌아왔으며, 양방이 개설한 은호(銀號)로 가서 돈을 달라고 했으나 양방이 거절했다. 결국 Burgevine는 그들를 구타한 후 은화4만위안을 빼앗아 갔다. 이홍장은 이를 들은 후에 "배치명령을 따르지 않고, 청나라 관리를 구타하고, 군자금을 약탈했다"는 이유를 들어 Burgevine의 직위를 해제했다. Burgevine는 당연히 이를 따르지 않았고, 북경으로 가서 항소했으며, 미국공사와 영국공사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함께 청나라 정부에 그의 직위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한 성의 순무가 직권범위내에서 내린 정상적인 결정을 억지로 취소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을 들어, 문제를 아래로 미뤘고, 상해에서 다시 처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복직을 허용하지 않았따. 이홍장은 <<Burgevine사건직무취소건>>이라는 글에서 "외국인은 성격이 괴이하고, 명령을 듣지 않으며, 원래 통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중국관리가 함께 지휘하는 것을 제기했다. 당연히 그는 오후, 양방등의 인물이 이에 관여하는 것도 반대했다. 이것은 이홍장의 권모술수가 뛰어난 것을 보여준다. Burgevine의 구타사건에 대하여 엄히 처리할 것을 건의하면서 동시에 오후, 양방에 대하여도 책임을 물어 엄히 처벌할 것을 건의했다. 왜냐하면, Burgevine의 여러 잘못은 모두 오후, 양방과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모야서 이 군대를 만들고 사람을 바꾸고 사령관을 교체하는 것을 주도했다. 그리므로 관리감독할 직책이 있음에도, 실제로 지휘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임시로 직위해제되었다.

 

이홍장은 강온의 수단을 겸비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Burgevine를 처벌하고 상승군을 정돈할 것을 건의하는 동시에 <<외국병사포상건의건>>을 올렸다. 그래서 일부 외국영사관의 관리와 군인들을 포상할 것도 건의했다. "이로써 우리 정부가 공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중국과 외국이 일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뜻에서" 라고 했는데, 실제는 외국의 Burgevine직위해제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승군"을 정돈하고, 병권을 회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Burgevine를 직위해제한 후 병권은 영국인의 손에 들어갔다. 영국측에서는 '상승군'이 계속 미국인의 지휘를 받는데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일찌기 '상승군' 내에 적지 않은 영국군을 심어두었다. 병권을 회수하기 위하여 이홍장은 Burgevine을 직위해제한 후 10여일만에 영국의 주중국육군사령관인 Sir Charles Staveley(중문명은 士迪佛立)와 험난한 교섭을 거쳤다. 여러차례의 논쟁을 거쳐, 이홍장과 그는 마침내 '상승군'을 중국과 역국이 공동으로 접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상승군지휘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십여개 조문인데, 종합하면 다음의 몇 가지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병권귀속 이슈에 있어서, 영국은 단독지휘요구를 포기했다. 협의에서는 중국의 관리의 인사명령을 받도록 하였고, 중국/영국이 공동으로 정규장교를 파견하여 이끌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영국의 지휘가 잘못되었을 경우 중국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요구사항은 포기했다. Staveley는 '상승군'이 전투에 나가려면 반드시 먼저 영국, 프랑스와 협의하여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이 점은 이홍장이 단연코 거부했다. 나중에 백리이외의 작전에 대하여는 먼저 영국, 프랑스와 협의하도록 규정했고, 가까운 거리내의 작전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둘째, 병사수의 문제에 있어서, 영국은 '상승군'이 최소한 5천명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홍장은 한편으로는 상승군을 이용하여 태평군을 소멸시키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원이 지나치게 많게 되는 것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비용도 많이 들고, 회군(淮軍)을 유지하는데도 문제가 있어서 꼬리가 너무 커서 흔들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었고, 숨은 문제를 남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량의 인원감축을 주장했다. 마지막에는 쌍방이 3천을 한도로 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군자물자조달에 문제가 있으면 적절히 감축하기로 하였다.

 

셋째, 군비조달문제에 있어서 군비는 해관의 자금에서 매월 수취하기로 하였따. 이홍장의 주장하에 비용은 감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도록 하였고, 무기를 구매할 때는 반드시 강소순무의 문서에 따라야 하고, 상승군 지휘관이 임의로 구매할 수 없도록 하였다.

 

넷째, 상승군은 송강성에 주둔하며, 지방업무에 간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

 

다섯째, 병사들을 징계할 때는 반드시 중국지휘관의 의견을 듣도록 하였다.

 

이홍장이 조정에 올린 <<상승군정돈건>>에서는 이번 협상을 통하여 점차 병권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며, 이후 처리하는데 약간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상승군'이 태평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인 강대한 전투력에 주목했다. 그리고 날로 교만해지고, 다루기 힘들어지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하였으나, 외국과 관련되는 일이라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Burgevine사건이 발생하자 그 기회를 틈타 손을 쓴 것이다. 그의 서양군에 대한 원칙, 태도는 조정하고 회유하는 중에 억제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홍장이 이 일을 처리한 사례를 보면, 그의 깊은 심계와 권모술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보보위영(步步爲營, 한걸음 한걸음 나아감), 유진유퇴(有進有退, 적당히 나가기도 하고 적당히 물러서기도 함)를 통하여 상해에서 오랫동안 뿌리박았던 지방세력인 오후와 양방을 제거하고, 자기사람을 심는데 필요한 기반을 닦았으며, 상승군의 성장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후환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것이다. 실로 일석삼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