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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이홍장의 유산분배

by 중은우시 2008. 2. 14.

글: 진명원(陳明遠)

 

청나라말기의 중신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청나라조정을 대표하여 북경에서 치욕적인 <<신축조약>>을 체결한 이후 음력 9월 27일(양력 11월 7일)에 우울하게 병사했으니, 향년 78세이다. 양계초는 "나는 이홍장의 재주를 존경하고, 나는 이홍장의 식견을 아까워하며, 나는 이홍장의 처지를 슬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홍장이 정치를 하는 기간동안, 각종 경로를 통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청나라말기의 사대부들 사이에 전해지는 대련이 있다. "재상합비천하수, 사농상숙세간황(宰相合肥天下瘦, 司農常熟世間荒)" 이는 합비출신의 이홍장과 상숙출신의 옹동화를 빗댄 말이다. 재상은 항상 살찌는데 천하는 마르고, 사농은 항상 익었는데, 세간은 황량하다는 것이다.

 

법정상속인은 3명

 

이홍장의 가족은 그다지 많지 않다. 처첩은 4명이고 법정상속인은 아들 3명이다.

 

<<이씨종보>>에 등록되어 있는 이홍장의 아들은 모두 6명인데, 그중 3명은 요절했다.

 

원부인 주씨(周氏)는 아들 경육(經毓)을 낳았는데, 경육은 요절한다. 주씨도 함풍11년(1861년)에 병사한다.

 

계실(繼室) 조소련(趙小蓮)은 태호의 명문가출신이고, 진사 조균의 딸이다. 이외에 측실(側室) 막씨(莫氏), 시첩 동매(冬梅)가 있다.

 

장남 이경방(李經方, 1855-1934). 그는 이홍장의 여섯째 동생 이소경(李昭慶)의 집에서 양자로 들였다. 그래서 사자(嗣子)라고도 부른다.

 

차남 이경술(李經述, 1864-1902), 계실부인 조소련이 낳았다. 적출이므로, 이홍장이 서거했을 때 그는 숙의후(肅毅侯)라는 작위를 세습했다. 그러나, 그는 1년후 죽고 만다. 향년 37세였다. <<합비이습후유집>>은 그의 작품이다. 그가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인 이국걸(李國杰)이 상속받았다.

 

삼남 이경매(李經邁, 1877-1938), 첩인 막씨의 소생이다. 이경매의 앞뒤로 막씨는 각각 아들 하나씩을 낳았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이경원(李經遠), 이경진(李經進)이다. 족보에 모두 "상(觴)"이라고 적고 있어, 태어나자마자 얼마되지 않아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딸은 각각 곽은후(郭恩), 임덕화(任德和), 장패륜(張佩綸)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이홍장의 유산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이홍장 직계의 <<분가계약>>

 

1904년 4월, 이홍장의 직계자손은 <<분가계약>>을 체결한다. 지금도 합비 대흥집의 이홍장형당에 진열되어 있다. 미국학자인 원서의(풀섬)은 이경매의 아들인 이국초의 집에서 이 계약을 보았고, 주인의 동의를 받아, <<이홍장전>>에 수록했다. 영문번역에서 나온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장전(庄田) 12곳, 분전(墳田) 1곳, 언제(堰堤) 1곳, 안휘 동성현 성내의 재산 4곳, 안경의 부동산 14곳은 모두 이홍장의 원부인인 주씨의 사당을 위한 비용에 충당한다. 재산은 이경방이 관리한다.

 

둘째, 합비현 찰현의 장전 1곳은 이곳에 묻힌 이홍장의 두 첩 및 이경방의 원부인을 위한 비용에 충당한다. 재산은 이경방이 관장한다.

 

셋째, 합비현 장전 2곳은 이경술을 위한 제사용으로 남겨둔다(그 중 1곳에 그가 묻힘). 이경술의 아들인 이국걸이 관리한다.

 

넷째, 합비현 전답2곳, 장전 3곳, 묘지 1곳은 이경매가 죽은 후의 그의 제사용 및 묘지로 남겨두고, 이경매 본인이 관장한다.

 

다섯째, 합비현, 소현, 육안주, 곽산현의 나머지 전답 및 노주부, 소현, 척조촌, 육안주 및 곽산현의 가옥은 모두 이홍장의 제전(祭田) 및 항산(恒産)으로 쓴다. 이상의 전답 가옥은 영원히 분할, 저당 혹은 매각하지 않으며, 수입은 제사와 노주부의 사당을 유지보수하는 외에 나머지는 부동산을 추가구입하는데 쓴다. 이국걸이 관리한다.

 

여섯째, 계약체결후 10년후, 이홍장의 제전 및 항전의 수입이 2만담을 넘으면, 상술한 비용지출외에 모든 잔여부분은 3명의 법정상속인이 균분하여 가진다. 이 규정은 변경될 수 없다.

 

일곱째, 합비현 동향 이문안의 묘지 및 제전은 계속 보류하며 분할, 저당, 매각할 수 없다.

 

여덟째, 상해의 4만5천냥백은의 가치가 있는 중서합벽식의 가옥은 매각하며, 그 중 2만냥은 상해 이씨사당의 비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2만5천냥은 상해외국조계에 땅을 사서 건물을 짓는데 쓴다. 그 가옥은 3명의 상속인들이 공유하는 것으로 하고, 공동으로 관리한다.

 

아홉째, 강소성 양주부의 전당포 수입은 강녕 이홍장사당의 비용에 충당한다.

 

열째, 강녕(남경), 양주의 두 곳 가옥은 매각하여, 매각소득은 상해의 공유거처를 확장하는데 쓴다.

 

열한째, 이홍장의 생전지시에 따라, 강녕학관은 손자 이국걸에게 주어 거처로 삼으며, 양주의 가옥은 이경매에게 주어 거처로 삼는다.

 

이홍장의 유산은 수백만냥백은으로 추정됨.

 

위의 <<분가계약>>에는 부동산만 포함되어 있고, 금은보석등 동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저, 안휘, 강소, 상해등지의 토지, 건물과 전당포 1곳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부동산의 규모, 가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홍장의 유산규모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다.

 

이외에 상해도서관에 있는 이홍장에 관한 자료에는 또 하나의 <<이씨적선당부동산계약집>>이 있는데, 이홍장은 초상국, 전보국, 개평석탄광산, 중국통상은행등에 적지 않은 주식을 지니고 있었따.

 

이홍장이 성공한 후, 그들 6형제는 일찌기 안휘의 고향에 전답을 대량으로 구매했고, 크면 수백무, 작으면 백십무에 이르는 장원식 주택을 만들었다. 이씨가족이 보유한 토지는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가장 많았을 때 250만무(畝, 1무는 200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토지는 일반적으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관리하게 하였다. 합비, 육안, 곽산등지의 '창방(倉房)'만도 수십개이다. 이홍장 명의의 전답은 매년 5만석을 거두었다. 통계에 따르면, 이씨가 합비동향에서 점유하고 있는 경작지는 약 60만무인데, 현지 경지면적의 2/3에 해당한다.

 

이들 1차사료에서 보면, 이홍장은 아주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양계초에 따르면, "세상사람들은 이홍장의 재산이 천하제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믿을 게 못된다. 개략 수백만금의 재산이 있는 것으로 보면 정확하다" 수백만냥의 백은이면 개략 지금 돈으로 하자면 10억위안(한화1300억원)에 이른다.

 

이홍장은 뇌물을 받았는가

 

이홍장의 인품은 세상사람들에게 논란거리이다. 그가 <<중러밀약>>을 체결하는 기간동안 러시아인들로부터 300만루불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대신의 회고록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이기는 하므로, 보완증거는 없다. 사학자인 진욱록 선생은 '하나의 증거만으로는 입증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이 좀 더 근거자료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홍장전집>>을 편찬할 때, 수십명의 학자들이 십여년간 사료를 정리하였지만, 새로운 증거는 찾지 못했다.

 

1894-1895년의 청일전쟁 기간동안, 많은 관리들은 이홍장이 주화매국한다고 탄핵했고, 모두 그의 재산문제를 언급했다. 어사인 안유준은 이홍장이 전쟁을 피하고 화의를 주장하는 이유를 "이홍장이 1500만백은을 일본의 모 기업에 투자하여 경영하고 있고, 성선회가 대리로 사장을 맡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과 불화가 생겨 이들 재산을 잃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들 주장은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나중에 흐지부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