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리홍장의 미국방문

by 중은우시 2008. 12. 7.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리홍장(李鴻章)의 본명은 장동(章桐)이며, 자는 점보(漸甫), 자불(子黻)이며, 호는 소전(少荃)인데, 만년에는 스스로 호를 의수(儀叟)라 하고, 별호는 성심(省心)이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이문충공전집>>이 있다. 리홍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경사를 읽었으며, 착실하게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도광27년, 즉 1847년 정미과 2갑 제13명으로 진사에 합격한다.

 

리홍장이 북경으로 과거를 치러 가는 도중에 인구에 회자되는 <<입도(入都)>>라는 시 10수를 지었다. 그 시는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 중, "일만년래수저사, 삼천리외욕봉후(一萬年來誰著史, 三千里外欲封侯)"라는 구절이 있다. 그는 시로써 자신의 뜻을 세웠는데, "편교해내지명사, 거방경사유도인(遍交海內知名士, 去訪京師有道人)"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홍장이 청년시대에 품었던 꿈이 그가 나중에 관료생활을 하면서 실현될 줄을.

 

리홍장이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있을 때, 외교사무에서, "외수화융, 내수변법(外須和戎, 內須變法, 밖으로는 외국과 평화롭게 지내야 하고, 안으로는 변법을 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의 양무총강을 주장했다. 즉,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려보면서 날로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하에서 최대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외교수단을 활용해야 하며, 중국이 양무를 통하여 스스로 부강하게 될 때까지 가급적 최대한의 평화시기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일생동안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여러번의 중대한 대외교섭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국제적으로 비교적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광서22년, 즉 1896년, 리홍장이 미국을 방문할 때, 한 미국기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얼굴은 사람들이 주목할만한 자상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두 눈이 빛나며, 예지의 빛이 반짝인다. 눈빛에는 유머와 기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옛날식 안경을 끼고 있으며, 광대뼈는 튀어나오고 마르지 않았다. 검은 피부는 겉으로 보기에 건강해 보인다...그는 오만함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한번도 어떤 요구를 한 적이 없지만, 항상 만족을 얻어냈던 그런 사람이다. 그는 부드럽게 다른 사람과 말한다.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긴장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는 부녀에게는 특히 예의바르고, 어린아이들도 아주 좋아한다.

 

이홍장이 그란트장군의 묘를 찾아갔을 때, 더더욱 미국인들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묘사했다: "...이 귀빈의 거동은 아주 감동스러웠다. 그는 아주 경건하게 똑바로 서서, 아주 비통한 목소리로 '안녕히 계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17년전에 그란트 장군과 만났던 장면을 회고했다. 당시 그들은 아주 말이 잘 통했다. 왜냐하면 그는 장군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전장터에 나갔던 사람이다. 그의 이 고별의식은 그의 수행인원과 미국측 수행인원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경의를 담은 가장 진정한 추도사이며 가장 의미심장한 고별사였다: '안녕히 계시오. 나의 형제여'"

 

리홍장이 미국에서 받은 접대의 규격, 예우와 환영의 정도는 당시 많은 나라의 동급의 관리들과는 전혀 달랐다. 일부 미국을 방문했던 국가원수, 정부수뇌들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리홍장의 미국인에 대한 호의와 이로 인하여 얻어낸 미국인들의 호감은 나중에 팔국연합군사건의 협상때 보답을 받는다.

 

단, 리홍장은 미국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이민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기회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방미를 끝내고 그는 일부러 미국서부를 피해서, 카나다를 귀국노선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미국기자들의 주의를 끈다. 이 일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리홍장은 미국매체들에게 중국이민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그저 미국의 신문계에서 중국이민자들을 위하여 약간의 힘을 보태줄 것을 바랍니다. 나는 신문이 이 나라에서 아주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스비다. 신문업계에서 중국이민들 도와주시고 배화법안을 폐지시키거나 최소한 <<Geary Act>>을 대폭 수정하도록 호소해주십시오" "...중국이민자들은 캘리포니아주등에서 아직 미국헌법이 그들에게 부여한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민의 신분을 완전히 인정받기를 요구하고 있고, 미국이민자로서 상응한 권리를 향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Geary Act>>은 그들에게 다른 국가의 이민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들의 합법적권익의 보장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 동포를 대우하는 곳을 지나가고 싶지 않습니다....배화법안은 세계에서 가장 불공평한 법안입니다...여러분은 여러분들이 미국인이라는데 자부심을 느끼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국가는 세계에서 최고수준의 현대문명을 대표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민주와 자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배화법안이 중국이민에게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나는 미국의 신문계가 중국이민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며, 배화법안이 취소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리홍장은 중국의 아편무역을 폐지시키기 위하여도 여러가지 노력을 했다. 이를 위하여 1894년 8월 27일, 세계금연연맹 집행비서인 영국인 조세프 G 알렉산더를 만났는데, 당시의 <<런던데일리뉴스>>에는 이렇게 보도했었다: "...그는 가장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중국정부는 일관되게 아편무역에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이런 무역은 열강이 전쟁을 통하여 중국에 강제한 것이다. 중국정부는 조약에 따라 부득이하게 인도아편이 중국에 수입되는 거을 허용했다...이총독을 취후에 명확히 선언했다: 너희도 아마 잘 알 것이다. 만일 너희가 우리의 인민에 아편의 해를 끼치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즉시 그들이 아편을 얻지 못하도록 금지할 것이다. 나(조세프)는 그에게 말했다. 영국의회는 이미 투표로 통과했으며, 전문위원회가 중국으로 가서 아편이 어떤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해로운지를 조사할 것이라고. 그러자 그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황당하지 그지없는 말이다' 아주 분노하고 멸시하는 것같았다. 그리고는 어조를 완화시켜 말했다: '누구든지 알고 있다. 아편은 해롭다는 것을' 내가 일어서서 작별인사를 하자, 그는 여전히 우호적이고 열정적이 말로 영국국민들의 중국이 아편의 해독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보여준 인자함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이 집행비서는 인터뷰를 마친 후에 자기의 느낌을 적었다: "...중국의 정치가들은 이 국가의 국민들의 평화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만일 전쟁이라는 수단을 막을 수 있는 여하한 조치라도 있다면, 그들은 보복을 위하여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리홍장은 서방과학을 중시했고, 중국의 제1차 유학생을 미국에 보내어 현대과학기술지식을 익히게 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예일등 명문학교에 들어갔다. 첨천우(詹天宇)는 이들 유학생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외에 중국의 전보사업도 이들 유학생들이 개척한 것이다. 리홍장은 새로운 사물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했다. 한번은 유학후 귀국한 청년관리들을 모아서 좌담회를 개최했다. 돌연 수학에 흥취를 보였고, 서양유학생을 붙들고 '포물선'에 뭔지를 물어보았다. 젊은이는 함수부터 방정식까지 힘을 들여 반나절을 해석했다. 리홍장은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학생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한마디를 했다: "중당대인도 오줌을 누시지요?" 리홍장은 왜그렇게 묻는지 몰라서 대답했다: "싸지, 당연히 싸지." 유학생은 이어서 답변했다: "그겁니다. 중당대인. 오줌을 쌀때 바로 포물선이 됩니다" 그제서야 리홍장이 무슨 말인지를 깨달았다.

 

비록 생전의 대부분의 시간을 극력 '제국주의'가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미국 하버드대학의 한학자 비정청(費正淸, John King Fairbank)도 만년에는 학자적 양심이 발동했는지, 공정하게 평가하는 말을 했다: "열강이 중국을 분열시키지 않은 것의 일부 원인은 중국이 교모하게 하나의 국가로 다른 국가를 견제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교묘하게 한 국가를 이용하여 다른 국가를 견제함으로써 팔국연합군이 중국을 나눠가지지 않도록 한 인물이 바로 리홍장이다.

 

리홍장의 일생을 살펴보면, 뛰어난 부분이 있다. 당연히 부끄러운 일도 있다. 그러나 황권체제하에서, 리홍장이 잘한 부분들이건 잘못한 부분들이건, 그 자신이 비애일 뿐아니라, 당시 만청왕조의 비애이기도 하다.

 

리홍장은 그가 체결한 일련의 매국조약과 청일전쟁의 패배에 책임을 부담하고 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이들 매국조약의 체결과 청일전쟁의 실패는 근본원인이 그 개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공업화된 서양제국과 일본섬나라의 중국에 대한 침략과 전쟁에 있어서, 승패는 이미 전쟁전에 결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