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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이홍장의 눈물

by 중은우시 2007. 7. 9.

 

 

 

17세기중엽부터 제2차세계대전까지, 자본주의의 출현과 발전으로 서방열강은 모두 대외적인 식민지확장, 타국의 자원약탈, 세계시장의 점령이라는 발전의 길을 걸었다. 19세기이전의 서방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침략한 전쟁이든, 20세기상반기에 발생한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든, 그 목적은 모두 해외식민지쟁탈, 해외자원쟁탈, 해외시장점령이었다. 1840년의 아편전쟁부터 1949년의 신중국성립까지 100여년의 기간동안, 중국도 서방열강의 대외식민지확장과 자원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반봉건반식민지의 상태로 전락했다.

 

이홍장은 안휘(安徽) 합비(合肥) 사람이고, 1823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농사지으면서 글을 읽었다. 고조부에 이르러 "근검으로 집안을 세우고, 전답 2경을 가지게 되었다" 이홍장은 20세때 부친의 명을 받아 북경으로 과거시험을 치러 떠난다. 도중에 <<입도팔수(入都八首)>>라는 시를 지어 "편교해내지명사, 거방경사유도인(遍交海內知名士, 去訪京師有道人, 두루 해내의 저명인사들과 교류하고, 북경에서 지식인들을 만난다)"라는 욕심을 나타낸 바 있다. 이홍장은 자기의 재주와 청나라정부에 대한 충성을 가지고 서생으로서 군대를 지휘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전공을 세우면서 관직이 계속 승진하였다. 그는 의병의 선혈로 자신의 관모를 물들이며 승진해갔고, 마지막에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었고, 25년간 정치를 주물렀다.

 

이홍장은 중국이 현재 약하므로 "먼저 부유해진 후에 강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무운동을 벌이고, 중국 최초의 철도, 최초의 제철소, 최초의 기계제조공장, 최초의 근대화된 군관학교, 최초의 근대화된 해군을 만들었다. 그는 중국 대외개방의 제일인, 중국외교의 제일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당시의 서양사람들은 이홍장만 알았지, 청나라조정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중국이 체결한 매국조약을 보면 가장 많이 서명한 사람도 바로 이홍장이다. 여러 해동안, 이홍장은 투항주의의 대표자,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했다.

 

역사(특히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홍장은 최소한 세번 눈물을 흘렸다.

 

제1차는 1895년 갑오해전(청일전쟁)때 북양수군이 전멸하자 이홍장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해야했고, 나라의 권리를 잃고 나라를 욕보이는 <<마관조약(馬關條約, 下關條約이라고도 하고, 일본에서는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부름)>>을 체결하여,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와 부속도서를 할양하고, 백은 2억냥을 배상하며, 중경, 사시, 소주, 항주를 통상해안으로 추가개방하고, 내륙수로의 항로를 개척하고, 일본이 통상해안에 공장을 개설하는 것을 허용하고, 제품은 면세로 중국내륙에 운송판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홍장이 어찌 몰랐을 것인가. 이런 조약을 체결하면 백성의 원망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일본에서 칼에 찔린 후, 수행원에게 피묻은 관복을 보존하라고 시킨 것이다, 바로 "이 피로서 국가에 보답하였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귀국후에, 이홍장은 국내 상하로부터 성토를 당하고, "중국인들 모두가 그를 죽이라"고 소리치게 된다. 조정에서도 그가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하고, 백성들은 그가 뇌물을 받았다고 하였다. 즉, 일본인의 돈을 받고 국가영토를 팔아먹었다고 욕했다.

 

이홍장은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의 직위에서 면직당했다. 그후, 군기대신 전원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서, "중국의 패전은 전적으로 우리가 서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홍장의 과실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홍장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것이다.

 

20년간 힘들여 기른 북양해군은 일본에 손색이 없었다. 같은 철갑선, 같은 화포, 그런데 왜 일본에 이기지 못했을까? 장병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워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조정이 부패하고 무능했었기 때문이다. 이홍장은 이 말을 끄집어낼 수가 없었고,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2차는 1896년이다. 북경 동안문외 현량사에 살고 있던 이홍장은 조정의 명을 받아 러시아 황제의 즉위식에 참석한다. 이미 73세였던 이홍장은 이 기회에 미국과 유럽의 각국을 방문하고자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190일간 9만리 길을 여행하게 된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이홍장은 옛친구인 그란트의 묘소를 방문한다. 그란트는 일찌기 1868-1876년에 미국대통령을 지냈고, 이직한 후 처인 줄리아와 세계여행을 다녔는데, 1879년(광서5년)에 중국에 왔다. 홍콩에서 광주로 왔고, 다시 상해를 거쳐 천진으로 왔다. 이홍장은 북양대신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당고항(塘沽港)으로 가서 전군을 이끌고 그를 영접했다. 그란트는 일찌기 미국의 남북전쟁시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이홍장도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전공이 있어, 서방인들에 의하여 "동방의 비스마르크"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당고에서 처음 만났는데, 만나자 마자 친구가 되었다.

 

그동안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란트는 이미 한 줌의 흙이 되어 묻혀 있었다. 이홍장은 그저 맨해튼의 섬위에 있는 그란트묘소에 조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란트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자신의 처지도 힘든 점을 생각하며 이홍장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중당(中堂, 이홍장을 가리킴. 원 뜻은 재상급의 관리)께서 그란트 묘소에 도착하니, 이미 풀로 덮여 있었고, 쓸쓸했다. 수행하는 사람이 생화 화환을 바치고 묘소에 경례를 했고, 서방의 예에 따랐다. 이홍장은 청나라 주미공사에게 그란트 묘소에 은행, 홍매화 각 1그루씩을 심어서 그의 뜻을 전하도록 하였다."

 

그란트의 묘는 맨해튼섬의 서쪽에 있는 허드슨강가에 있는 높은 돌로 된 건축물이다. 안에는 그란트부부가 묻혀 있다. 묘소의 뒤에는 나무 숲이 있다. 가을 바람이 불 때면, 나뭇잎이 온갖 색으로 변한다. 백화가 서로 뛰어나다고 다투는 형국이다. 묘소의 뒤에는 이홍장의 지시에 따라 심은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하나는 고화석이라고 부르는 은행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 유명한 홍매화이다. 두 그루의 나무는 쇠난간으로 둘러쳐져 있다. 은행나무는 키가 커서 하늘로 솟아 있다. 홍매화는 아무래도 풍수가 맞지 않아서인지 푸른 잎도 나지 않고, 향기도 뿜어내지 못하고 있다.

 

제3차는 그의 생명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었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했다. 서태후는 들고갈 수 있는 물건을 챙겨서 진비(珍妃)를 우물에 빠뜨려 죽이고, 광서제를 데리고 북경을 빠져나갔다. 세이무어(Seymore)가 이끌던 팔국연합군은 자금성을 점령했다.

 

북경성이 함락되던 날 서양인들은 사람을 무수히 죽였고, 길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부러졌다. 영국인의 기록에 의하면, "북경은 진정한 묘지가 되었다. 곳곳에 죽은 사람이었고, 아무도 그들을 묻어주지 않아서, 들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동치제 황후의 부친이자 호부상서인 숭기(崇綺)의 처와 딸은 천단으로 붙잡혀가서 팔국연합군에게 윤간을 당하였고, 집으로 돌아온 후 전 가족이 자살했다. 숭기도 약을 먹고 자살했다.

 

황궁과 이화원의 모든 보물들은 약탈당했다. 태화전의 앞에 있던 청동항아리(銅缸, 화재대비용)에 도금된 황금도 팔국연합군이 칼로 긁어서 가지고 갔는데, 지금까지 긁은 흔적이 남아 있다. <<영락대전>>, <<사고전서>>도 재난을 당했고, 고관상대의 천제의, 기한의, 지평경의, 기형무진의, 혼의도 모두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전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도망길에 있던 서태후는 다시 이홍장을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해서 북상하라고 명을 내렸다. 부하와 친척들은 모두 시모노세키조약의 전철을 밟아 희생양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명을 따르지 말도록 권유했고, 이홍장도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북상하는 시간을 늦추었다. 조정에서 재촉이 계속되자 어쩔 수 없이, 1달 후에, 이홍장은 북경에 도착해서, 팔국연합군과 강화협상을 시작한다.

 

1901년 9월 7일, 이홍장은 대청국을 대표하여 11개국과 중국근대사상 유명한 불평등조약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여, 4억5천만냥을 배상하게 된다.

 

서명을 마치고 돌아온 후, 이홍장은 피를 토한다. 호흡을 멈추기 전에 이미 염의(殮衣)를 입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던 이홍장은 하루를 꼬박 눈을 감지 못했다. 임종하는 순간, 몇 줄기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11월 7일, 이홍장의 눈은 여전히 부릅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끝내시지 못한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겠습니다. 공께서는 안심하고 가십시오"라고 했다. 이 홍장은 이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였다. 양계초는 이홍장과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그렇지만, 그는 "이홍장의 재주를 존경하고" "이홍장의 식견을 아쉬워 했으며", "이홍장의 처지를 슬퍼했다"

 

이홍장의 세번에 걸친 눈물은 개인의 비애를 슬퍼하는 동시에, 국가의 불행을 슬퍼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분투했고,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국가는 이미 뼈속까지 병들어 있어, 하루 하루 상태는 악화되었다. 그는 병석에서 조정에 자신의 최후 상소문을 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외수화호(外修和好)

내도부강(內圖富强)

혹가점유전기(或可漸有轉機)

 

밖으로는 다른 나라와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면서

안으로는 부유하고 강해지도록 애쓴다면

혹시 점차 전환의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