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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비교

by 중은우시 2008. 12. 5.

글: 정만군(程萬軍)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청나라정부의 전권대신인 리홍장(李鴻章)은 일본 전권대표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서로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토는 리홍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중당대인(中堂大人, 리홍장을 가르킴)은 얼마나 위풍당당했습니까, 협상이 안되면 싸우자(1884년 이토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자 중국으로 리홍장과 협상하러 왔는데, 리홍장이 이를 거절하였던 것을 가리킴)고 하였지 않습니까. 지금 정말 싸우고 보니, 결과가 어떻습니까? 제가 이전에 대인에게 충고를 한 바 있지요. 귀국이 신속히 내정을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 일본에게 따라잡힐 것이라고. 이제 10년이 지나고 나니, 제 말이 맞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이홍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내정개혁을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오. 다만 우리 나라는 너무 커서, 군신과 조야의 인심을 하나로 만들기 힘들었소. 귀국과 같이 상하가 한마음이 되지 않았던 것이요. 만일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위치가 바뀌었다면 결과가 어땠을 것같소.

 

이토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저라면, 일본은 내가 한 것보다 강해졌을 것이고, 남닝 내가 당신이라면, 중국은 당신이 한 것만큼 잘 이끌지 못했을 것이오.

 

이 대화는 리홍장을 위한 변명으로 보인다. 갑오년 청일전쟁의 패배가 리홍장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가 너무 커서, 군신과 조야의 인심이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했을까?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각각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끈 주요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리홍장의 양무운동은 1861년부터 시작된다. 1869년에야 정식으로 시작된 메이지유신보다 8년이나 앞섰다. 다만 결과는 일본이 뒤에 시작했지만 중국을 추월하게 된다. 양무운동의 우두머리가 메이지유신의 우두머리에게 고개를 숙여, 청나라 유사이래 가장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리홍장이 억울해하는 것처럼 중국의 조야에는 보수사상과 수구세력이 근대화운동을 방해하였다는 것도 중요한 원인임에 틀림없다. 다만, 리홍장은 도대체 어떤 진보세력이었을까?

 

우리는 적국의 수뇌의 떠받들어주는 말을 "진리"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리홍장에 관해서 량치차오(梁啓超)는 일찌감치 아주 적절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 "국민의 윈리를 모르고, 세계의 대세에 통하지 않으며, 정치의 본원을 알지 못한다. 그는 모래위에 탑을 건설하고 있는데, 낡은 집을 수리할 줄이나 알지, 새로 지을 줄은 모른다." 량치차오는 리홍장을 "용중(庸衆, 어리석은 무리)중의 걸사(傑士, 뛰어난 선비)"라고 칭한 바 있다. 소위 "용중중의 걸사"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용인(庸人)"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쑨원(孫文)은 상서변법이 거절된 후 리홍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확실히 알았다. 그는 리홍장이 "주의에서의 신념이 없을 뿐아니라, 대국을 통찰하는 식견도 결핍되어 있다. 그리고 이미 늙어서, 공명이나 사업에 대하여 더 이상 욕심이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뼛속까지 옛것을 끌어안고 있는 관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혁의 진보성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리홍장의 개인적인 문제는 '진보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그는 담량이 부족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양무운동은 철저히 종말을 고한다. 기술만 배우고 정치제도를 배우지 않은 개혁은 기껏해야 '낡은 가옥'에 '페인트칠'을 하는 반쪼가리공사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야 호호탕탕한 세계의 조류에 휩쓸려 살아남을 수 없다.

 

"국가가 너무 커서, 인심을 하나로 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국가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이유로 성립될 수 있는가? 그저 수구적인 관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데 대한 핑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자. 메이지유신 이전에, 개혁에 반대하던 막부군이 얼마나 창궐했던가? 그들은 개혁파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자살하게 만들었고, 일본의 개혁파는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입장이 청나라의 양무파보다 나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후에 의연히 조슈(長州)번군대에 가입하여, 계속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따라 개혁진영에서 막부통치를 반대했고, "개국진취(開國進取)"를 주장했고, 마침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이토 히로부키는 목숨을 내걸고, 제대로 변법유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아시아에서 먼저 굴기할수 있었다. 이토의 개혁은 철저했다. 어찌 리홍장의 진흙을 털어내지도 않은 개혁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시모노세키조약의 그 역사를 회고해보면, 인정해야할 것이 있다: 리홍장은 개혁에 대한 식견이나 담략이 모두 이토 히로부미보다 한단계 모자랐다. 리홍장의 담략이라면 설사 일본에서 활동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위협도 돌보지 않고 철저히 개혁을 수행했던 이토 히로부미처럼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인가?

 

승리자의 앞에 우리는 반드시 실패자의 부족함을 지적해야 한다. 승리자의 받들어주는 말에 취해버린 실패자는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 변명거리를 찾는 것이외에 남아있는 것은 바로 다음번의 또 한번의 실패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