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전요(秦全耀)
1. 허세우(許世友): 8기중앙후보위원, 9기, 10기, 11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위원
2만5천리의 장정의 길에서 허세우는 처음으로 모택동을 만난다. 모택동은 그에게, "내가 네 이름을 자주 들어봤는데, 너를 만나보지는 못했었다. 네 이름은 어떤 자를 쓰는가?" 허세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의 아명은 우덕(友德)이며, 성은 언(言), 오(午)의 허(許)입니다. 족보상으로 '사(仕)'자 항렬에 속하여, 부모는 '허사우(許仕友)'라고 제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홍군에 참가한 후, 시간이 있어 공부를 하고 글자를 익혔는데, 그 다음에 비로소 '사(仕)'가 벼슬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仕)'자를 '사(士)'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고 생각하니 글자 1자를 바꾸었지만 홍군전사에 명실상부합니다" 모택동은 그 말을 들은 후 허세우에게 말했다. "그런데, 사(士)를 세(世, 중국어로는 사와 세는 모두 shi로 같은 발음임)로 바꾸면 어떻겠는가? 이렇게 하면, 세상의 친구가 되지 않겠는가. 우리 홍군전사는 사사건건 중국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눈을 세계로도 돌려야 한다" 그 이후, 허세우는 모택동의 말에 따라, "사"를 "세"로 고쳤다.
2. 황영승(黃永勝): 8기중앙후보위원, 9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위원
황영승의 원명은 황서전(黃叙錢)이다. 1927년 9월 9일, 황서전은 부대를 따라 추수의거에 참가했고, 정강산으로 올랐다.
전투중에 적군이 전적위원회(前敵委員會)와 홍사군군부(紅四軍軍部) 부근까지 쳐들어 왔다. 당시 반장(班長)을 맡고 있던 황서전은 연장(連長)에게 허가를 받을 시간도 없어, 즉시 적극적으로 반의 전사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해서, 적군을 물리쳤고, 전위와 군부의 안전을 지켰다. 전투가 끝난 후, 전위서기 겸 당대표인 모택동이 그를 칭찬했고, 그에게 고향이 어디고, 이름이 뭔지 물었다. 황서전은 "모위원께 보고합니다. 저는 호북 함녕 사람이고, 황서전이라고 합니다" 모택동은 말했다. "서전, 서전, 돈을 중시한다는 말이군. 좋지 않다. 혁명전사가 돈을 얘기해서는 안된다. 무산계급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이렇게 하자. 내가 네 이름을 바꿔줄테니, 혁명의 도로에서 영원히 전진하고 승리하라. 너를 황영승이라고 부르자"
3. 강화(江華): 8기, 10기 후보중앙위원, 11기 중앙위원
강화의 원래 이름은 황춘포(黃春圃)였다. 1938년 강화는 연안에서 산동으로 가서 일을 했는데, 적후방의 복잡한 환경을 고려하여 모택동에게 이름을 고치면 좋겠다고 말했다.
"너는 강화현 사람이지?" 모택동이 물었다. 강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너는 요(瑤)족말을 할 줄 아느냐?" "제가 바로 요족입니다" "그러면 강화라고 하자. 현(縣)의 이름으로 사람이름을 삼으며 영원히 고향을 잊지 않고, 영원히 고향사람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모택동은 황춘포의 이름을 강화로 바꾸어 주었다.
4. 천보(天寶): 8기 후보중앙위원, 9기, 10기, 11기 중앙위원
중국공농홍군이 섬북(섬서성 북부)에 도착한 후, 정변현에서 중공중앙당교를 창설했으며, 당교내에 "민족반"을 두었다.이 반의 학생은 장족, 이족, 강족등 20여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천보가 반장을 맡고 있었다. 나중에 당교를 연안으로 옮겼는데, 소수민족반은 당교 제7반으로 편성되었으며, 천보는 반장 겸 학생당지부서기를 맡았다. 모택동 주석은 친히 중앙당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한번은 모주석이 강연을 하는데, 천보에 대하여 물었다. 당교지도자들은 모주석에게 그가 소수민족반의 반장이라고 소개했다. 모주석은 "관직을 맡았군. 게다가 '장'을 붙이고, 대단하다" 그리고는 이름이 뭐고 민족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천보는 "저는 상지웨시(桑吉悅希)라고 하며 티벳족입니다. 사천 아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석은 다시 물었다: "상제웨시가 무슨 뜻이고 왜 그렇게 지었는가?" 천보는 "상지는 부처라는 뜻이며, 웨시는 보배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활불께서 제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모주석은 그 말을 듣고, "대단하다. 부처이면서, 보배라..." 그리고 모주석은 학생들에게 "너희는 모두 당과 홍군의 보배이다. 잘 공부해서 장래 국가의 대임을 맡아달라" 그리고 모주석은 천보에게 말했다: "한족에는 이런 옛말이 있다. 물화천보(物華天寶). 너의 상지웨시와 의미가 비슷하다. 네 이름을 '천보'라고 하자"
5. 주소주(周小舟): 8기 후보중앙위원
건국후 중공호남성위 제1서기등의 직위를 맡았던 주소주의 원래 이름은 주회구(周懷求)였다. 1936년 모택동의 비서직을 맡았는데, 모택동이 그를 자주 "소주(小周, 중국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부를 때 성의 앞에 소(小)를 붙인다)"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나중에 아예 "소주(小舟)"로 개명해 버린다. 건국후, 주소주는 중공호남성위 선전부장, 부서기, 제1서기등의 직을 지냈다. 한번은 모택동이 호남을 시찰할 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주소주를 보고는 놀렸다: "너는 이미 '소주(小舟, 작은 배)'가 아니다. 너는 수천만명을 싣는 '대선(大船)'이 되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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