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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한국전쟁시 인민해방군의 전사, 전상자의 숫자

by 중은우시 2007. 8. 2.

작자: 미상

 

한국전쟁이 끝난지 이미 50여년이 지났다. 최근 10여년동안 중국정부는 서로 다른 채널을 통하여 한국전쟁중의 지원군 사상숫자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지금까지도 지원군의 사상자숫자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되어 있다.

 

1. 중국정부 공식자료

 

지금까지, 중국정부가 매체(한국전쟁을 연구하거나 회고하는 서적, 전사등)를 통하여 공포한 지원군 사상자수는 다음과 같다:

 

(1)  전사: 11.4만명

(2)  의원에 입원한 부상자 38.3만인/차. 입원한 부상자는 1명이 두번 세번일 수도 있으므로, 통계상 중복될 여지가 있음. 부상자중 일부분은 비전투요원임. 그래서 최종적으로 전투요원전사상자수를 36.8만명으로 발표하였으므로, 이에 따르면, 지원군 전투요원전상자수는 25.2만명이 됨.

(3) 부상으로 인한 사망: 2.16만명

(4) 실종: 0.8만명(원래는 0.4만명)

(5) 총계:

 

전사: 14.36만명(전사, 부상으로 인한 사망, 실종)

전상: 25.2만명

전투작전중 전사상자 합계: 39.56만명

기타원인의 사상자: 병사 1.3만명

그리하여, 지원군의 전사상자수의 합계는 40.86만명(39.56+1.3)이 된다.

 

이외에 지원군에서는 2.1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 중 7100명은 대륙으로 돌아온다(그중 440명은 중립국으로 갔다가 마음을 바꾸어 대륙으로 온 경우임). 14000여명은 대만 혹은 기타 중립국으로 갔다. 포로인원에 대하여는 아무런 논란이 없다.

 

2. 지원군 전사상자숫자에 존재하는 이견

 

(1) 전사상자가 200만-300만이고, 전사자가 90-100만이라는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다.

 

중국정부가 최근 십여년간 공포한 숫자는 전체 한국전쟁기간동안 중국이 차륜전방식으로 투입한 각종부대원이 합계 190만명이었고, 보충병력이 약 50만으로 합계 240만명이다. 이외에 동북군구에서는 60만명의 민공(비전투요원)이 한국으로 들어가서 비전투업무에 종사했다.

 

지원군의 한국에서의 병력은 가장 많았을 때 130만(1953년 봄)에까지 달한 적이 있다.

 

중국의 참전부대의 인원총수가 240만명인데, 어떻게 200만에서 300만까지 전사상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군과 한국군은 북경까지 밀고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하에서 전사자수가 90만-100만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성립되기 힘들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을 얼마나 반대하고, 모주석을 얼마나 반대하고, 중국이 한국에 출병한 것을 얼마나 반대하고, 미군의 무기장비와 강력한 화력을 얼마나 찬미하더라도, 중국군대가 한국에서 100만명이 죽고, 200-300만명이 전사상당했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

 

(2) 표면적으로 가능한 숫자는 전사상자 150만명이다.

 

그렇다면, 지원군 사망이 50-60만명이고, 전사상자합계가 140-150만명이라는 숫자는 믿을만한가?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숫자는 가능하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지원군에는 수십만에서 백만 정도까지의 멀쩡한 군인을 남겨두었으니까. 그러나, 한국전쟁의 과정의 특색, 지원군의 한국전참전부대서열과 편제인수를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한국전쟁은 모두 33개월(2년9개월)간 지속되었는데, 운동전과 진지전의 전후 두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운동전기간동안에는 대병력작전이 위주로 쌍방의 전사상자가 비교적 많이 나왔다. 진지전기간동안에는주로 고지를 쟁탈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3번의 시간대에 대규모의 진지공방전이 벌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전선은 안정된 상태였다. 쌍방의 전사상자수도 주로 몇차례의 대규모 진지공방전에서 발생했다.

 

(1) 운동전단계는 1950년 10월 19일에서 1951년 6월상순까지 8개월간이며 모두 5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인민해방군의 참전부대는 모두 15개군(軍)이며 매군은 5만명이었고, 3차례로 나누어 한국에 들어갔다.

 

제1차전투에서 중국참전부대는 제1차참전부대(모두 6개군)중에서 먼저 한국으로 들어간 4개군이다.

제2차전투는 제1차로 들어간 6개군과 제2차로 들어간 제9병단 3개군 합쳐서 모두 9개군이다. 제2차전투에서는 제9병단 3개군의 동상피해가 막심했고, 몇 개월간 휴식을 취한 후에야 비로소 제5차전투에 참전할 수 있었다.

제3차, 제4차전투에 참전한 부대는 제1차로 참전한 6개군이었다.

제5차전투에 참전한 부대는 제1차로 들어갔던 제39, 제40군, 그리고 제2차로 참전했던 제9병단 3개군, 제3차로 참전한 제3병단, 제9병단의 6개군, 모두 합쳐서 11개군이었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 해방군의 전사상자수는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가 중국의 공식숫자를 믿지는 않지만, 가장 간단하고 가장 과장된 계산법을 써서 계산해보도록 하자:

 

제5차전투가 끝난 후,

제1차로 참전한 6개군이 전부 전사상당했다고 치면, 6X5만=30만명이다.

제2차로 참전한 3개군이 제2차전투에서 절반이 전사상당하고, 제5차전투에서 나머지 절반이 전사상 당했다고 치면 합쳐서 15만명이다.

제3차로 참전한 6개군이 제5차전투중에서 절반이 전사상당했다고 치면 15만명이다.

이렇게 무식하게 계산하면 모두 60만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 된다.

 

사실, 운동전기간중에 지원군은 겨우 4번의 전투에서 병력손실이 참중했다.

첫째, 제2차전투에서 제9병단 3개군이 동상이 엄중했다(동상은 전투사상은 아니다)

둘째, 제4차전투에서 제38군, 제50군이 한강양안에서 유엔군에게 저격당하여 손실이 참중했다.

셋째, 제5차전투에서 제64군의 주력과 제65군의 일부가 임진강 남안의 좁은 구역에서 이틀간 집중포화를 받아서 손실이 참중했다.

넷째, 제5차전투후기, 제60군이 철수할 때 추격을 당해서 혼란에 빠지고, 제180사단은 전멸당했다.

 

중국의 공식발표에 따른 전사상자수는 다음과 같다.

제1차전투, 사상 1만명

제2차전투, 전투중 사상 3.1만명, 동상 5만명

제3차전투, 사상 0.6만명

제4차전투, 전투손실 5.3만명(여기에는 포로인원이 들어감)

제5차전투, 전투손실 8.5만명(제5차때 포로가 1.7만명임)

총계 23.5만명 손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동상5만이 포함되어 있고, 1.7만의 포로인원이 포함되어 있다(물론 제5차이전에도 포로는 있다)

 

이것을 보면, 위에서 계산한 것이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진지전단계는 1951년 6월중순부터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25개월이 걸렸다. 이 기간동안, 대규� 진지공방전은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

 

1951년 9월말부터 10월말까지: 유엔군이 지원군에 대하여 "가을공세"를 펼쳤고, 지원군 9만명이 전사상당했다.

1952년 9월하순에서 11월하순까지: 지원군이 유엔군에 대하여 가을전술반격(제38군의 백마고지전투포함)을 실시해서, 해방군의 전사상자가 1.05만명에 달하였다. 유엔군은 상감령전투를 시작하여 지원군이 1.55만명 사상당했다.

1953년 7월, 해방군은 최후의 일전인 금성(金城)전투를 개시한다. 이 전투에서 지원군은 3.25만명이 사상당한다.

 

다른 기간동안에 전선은 기본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쌍방은 국부적인 소규모 공방전을 벌였을 뿐이다. 그래서, 서방학자들이 저술한 한국전쟁에 대한 저서에서는 진지전 단계는 그저 한마디로 언급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이 세 기간동안 중국군의 사상자수는 모두 14.85만명(9+1.05+1.55+3.25)이다.

 

우리는 중국군이 일부러 손실을 감추고, 사상자숫자를 축소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배로 늘인 것을 잡으면 29.7만명이다.

 

비록, 진지전기간동안, 사상자는 주로 몇 차례의 대규모 진지전의 공방전투에서 발생했지만, 다른 기간에도 전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미국공군은 후방의 보급선에 대한 폭격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원군에서도 피해가 없을 수 없었다. 이때 29.7만명의 절반인 14.3만명이 사상당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하면 전체 진지전기간동안 지원군의 사상자 통계숫자는 44만명(29.7+14.3)이 된다.

 

이 숫자는 이미 지원군의 실제 사상자 숫자보다 많이 부풀려진 것이다. 예를 들어, 상감령전투에서 중국측 통계에 의하면 전사상자수가 1.55만명이고, 미국/한국측 통계에 의하면 사상자수가 1.9만명이다. 우리가 1.55만명의 두 배로 계산한다면, 미국측통계에 의한 전과보다도 1.2만명이나 더 많아지는 결과가 된다.

 

이외에 중국통계에 의하면 한국전쟁기간동안, 지원군의 비전투부대원사상이 1.07만명(사망 3600여명)이고, 철로계통전투사상이 0.67만명(사망 2100여명)이다. 그러므로 14.3만명의 사상자수의 가설도 이미 아주 높게 추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두 단계동안 지원군의 총 사상자수

 

위에서 아주 높게 추정한 사상통계를 기준으로 한다고 치면, 전체 한국전쟁기간동안 지원군의 사상자총수는 60+44=104만명이다. 이것은 140만-150만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하여, 지원군 전사자가 50-60만, 사상자가 140-150만이라고 하는 것은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3. 사상자 92만은 합리적인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원군의 사상자가 104만명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104만과 92만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92만이라는 주장도 성립되기 힘들다고 보인다.

 

중국정부에서 공포한 40.86만명의 두배로 계산을 하더라도 81.7만명이고, 92만과는 10여만이 차이가 난다. 게다가 이 40.86을 두 배로 추정해야할 합리적인 다른 이유도 찾기 어렵다.

 

이웨서 본 바와 같이 미국, 한국측에서 나온 지원군 전사상자 숫자는 믿기가 어렵다.

 

4. 중국공식통계숫자는 믿을만한가?

 

미국한국측면에서나온 지원군 사상자숫자는 믿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중국정부의 공식숫자는 정확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중국정부가 공포한 지원군의 사상자수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실종인수가 4천명 증가했다.

 

과거에 중국정부는 실종인수를 4천명이라고 발표했었는데, 나중에 실종인수를 8천명으로 늘였다.

 

둘째, 사망자수가 3가지이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전사자 + 병사자의 15.66만명(14.36+1.3)이다.

다른 하나는 민정부문이 통계낸 171,669명이다. 그리고 이 17만명의 희생자수는 각 성별로 나누어 통계가 나와 있다. 아래의 표가 바로 그것이다.

사천(중경포함) 30,789명, 산동 19,685명, 길림, 18,260명, 요녕 13,374명, 호남, 10,687명, 하남, 10,673명, 하북, 10,155명, 흑룡강 8,222명, 강소 7,268명, 산서 5,865명, 호북, 5,167명, 안휘 4,151명, 절강, 3,732명, 광동, 3,186명, 광서, 2,915명, 섬서, 2,802명, 귀주, 2,799명, 강서, 2,162명, 내몽고, 1,683명, 상해 1,634명, 운남, 1,482명, 북경, 1,438명, 감숙, 1,041명, 복건, 982명, 천진, 461명, 신강 61명, 청해 48명.

또 다른 하나는 최근에 나온 정보인데,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 6년의 시간을 들여 인민지원군열사명단을 수집했다. 기념관은 대외적으로 최신 열사통계명단을 발표했는데, 한국전쟁에 희생된 지원군열사는 원래의 171,669명에서 183,108명으로 늘어났다.

 

어찌하여 중국정부는 매번 발표할 때마다 인원수가 달라지는가. 15.66만명, 17.17만명, 18.3만명 그리고 그 차이도 2.64만명에 달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정부의 발표숫자에 의심이 들게 만드는 대목이다. 어떤 사람은 이 2.64만명은 민공등 비전투요원의 사상자수라고 얘기하는데, 그것이 정부의 공식입장인지는 모르겠다.

 

3. 전사상자수는 추정한 것이고, 일반상황하에서의 사망, 부상의 2:1의 비율에 맞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원군의 전상자수는 병원에 입원한 부상인원인 38.3만명/차이다. 중복통계와 비전투요인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추정해낸 전투부상자는 25.2만명이다. 이것은 일반상황하에서의 부상:사망의 2:1의 비율에 어긋난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숫자가 너무 적게 추정된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4. 비전투부상인원

 

이외에 현재 인터넷에서는 지원군에 38만-40만의 비전투부상(감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숫자에는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제2차전투때 제9병단의 대규모 동상사건처럼 이러한 비전투적인 감원이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이런 비전투감원은 지원군의 인원손실에 포함시키기는 했는가? 만일 위에서 얘기한 민공등 비전투요원의 사망자가 2.64만명이라면, 민공등 비전투요원의 부상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5. 필자가 추정한 지원군의 최대사상자 숫자.

 

인터넷에서 전해지는 지원군의 비전투병력손실 40만이라는 숫자는 전체 병력손실이 100만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항미원조위생공작경험총결>>이라는 시리즈책에서 나왔다. 이 책은 4개의 분책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분책이 <<위생근무>>, 제2분책이 <<야전내과위생방역>>, 제3분책이 <<전상외과>>, 제4분책이 <<위생통계자료>>이다.

 

이 책에 의하면 지원군의 감원데이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총감원        978,122명

사망           114,084명

부상           383,218명

병자           455,199명

실종(포로포함)  25,621명

그중 부상자중 21.679명사망, 병자중 13,210명 사망.

지원군 총사망자수 148,793명

 

사실, 상술한 데이터는 아마도 우리가 통상적으로 얘기하는 지원군사상숫자의 최종적인 출처일 것이다:

 

사망: 114,084, 즉 전사 11.4만명

부상: 382,218명, 즉 병원에 입원한 부상요원 38,3만명/차, 다만, 이 38.3만명/차는 중복통계가 있을 수 있고, 비전투부상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실종(포로포함): 25,621명, 즉, 포로 2.1만명, 실종 0,.4만명(나중에 0.8만명으로 수정)

부상자중 21679명 사망: 부상으로 인한 사망 2,16만명

병자중 13,210명 사망: 즉 병사 1.3만명.

 

이로써 볼 때, 부상자수가 누적인원으로 38.3만명/차라는 쉽게 오인할 수 있는 경우를 빼면 데이타는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다른 것은 병자 455,199명인데, 어떤 사람은 이 숫자를 비전투감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항미원조위생공작경험총결>>의 이 숫자는 실제로 위생부서에서 치료한 한자가 45.5만명/차에 이른다는 뜻이다. 3년의 전쟁기간동안 45만명/차가 병원을 찾아와서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 45.5만명/차라는 것은 병사한 1.3만명을 제외하고는 병력손실로 볼 수 없다.

 

그래서, 현재 유일한 의문거리는 바로 비전투사상자수(장진호전투에서 제9병단의 수만명이 동상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전사상자숫자에는 포함되지 않았음)이다.

 

비전투사상자수로 우리가 알 고 있는 숫자는 18.3만-14,36만(전투사망)=3.94만(1.3만 병사 포함)이다.

 

비전투부상자수는 최대의 숫자로 계산하더라도(중복입원으로 인한 통계숫자를 고려하지 않고): 38.3-25.2(전투부상)-2.16(부상으로 인한 사망) = 10.94만이다.

 

비전투 사상자 총수는 14.88만명(3.94+14.88)이다.

 

만일 포로인원까지 계산한다면 한국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의 병력손실은 모두 56.54만명(54.44+2.1)에 이른다. 그리고 이 56.54만명은 이미 우리가 계산해낼 수 있는 병력손실의 최대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