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1950년대 중국대륙의 두 가지 유언비어

중은우시 2008. 5. 9. 19:49

글: 이약건(李若建)

 

유언비어라는 것은 황당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대규모의 유언비어가 떠도는 것은 민간의 집단기억을 누군가 자극했기 때문이며, 특히 사회의 변천과정에 있을 때가 많다.

 

1950년대초기, 화북과 화동지역에는 각각 "할단(割蛋, 불알을 자름)"과 "모인수괴(毛人水怪)"의 두 가지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유언비어가 파급된 지역이 매우 광범위하였다. 북경, 하북, 산서, 내몽고, 강소, 안휘, 산동등 약 100개현에 걸쳐 수천만명에게 퍼졌다. 1950년에 처음 유언비어가 나타난 때로부터 1954년 제2차유언비어가 기본적으로 끝날 때까지,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동안 백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천명이상이 체포되었다.

 

불알로 원자폭탄을 만든다.

 

"소련은 원자탄을 만들고자 하는데, 원료는 남자의 불알, 여자의 유방과 자궁, 어린아이의 창자이다. (중국)정부는 소련에 공급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리하여 사복부대를 전국 각지로 보내어 이것들을 잘라서 소련에 보내고 있다. 불알을 떼어가는 사람들은 중, 도사, 상인, 농부로 변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사람들인데, 무공이 뛰어나다. 낮에는 조사를 하고, 밤에 실행한다"

 

이것이 "할단" 유언비어의 주요한 내용이다.

 

반정부, 반소련이 이 유언비어의 기본적인 정치적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유언비어에서는 "불알을 떼어가는 사람"이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부가 간부를 파견하여 유언비어를 막으려고 하면, 다시 "공산당은 너를 속이고 마비시키려는 것이다. 네가 그들의 말을 믿으면, 바로 칼을 들고 잘라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해명이나 설명에 대하여, 일부 군중 심지어 하급간부들까지 이것은 연막을 치는 것이고,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언비어에서는 "불알을 떼어가는 사람"이 정부에서 파견되었고, 모택동이 명령한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불알을 떼어가는 사람"을 붙잡아서 공안국에 데려가더라고, 공안국에 소개서신 한 장만 보여주면 바로 풀어준다고 했다. 그리하여, 민중들은 "불알을 떼어가는 사람"이라고 보이는 사람을 때려죽였다. 그리하여, 무고한 사람들 중에서 맞아죽은 사람들이 생겨난다.

 

유언비어가 전파된 곳에서 민중들은 고도의 공황에 빠진다. 남자들은 밤마다 보초를 서고, 여자들은 집에 머물뿐 바깥에 나가서 일을 할 엄두를 못낸다. 행인들도 혼자서는 길을 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서는 긴장되고 환각과 환청이 들렸다. 왕왕 밤에 개가 짖는 소리만 들려도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림자만 봐도 대경실색했다. 이렇게 하여 오해가 많이 발생했다. 어느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 온 동네가 비명천지로 되고, 한 마을이 이렇게 되면, 이웃 마을에까지 전염된다. 장가구지역에서 1950년 7월 27일부터 8월 8일까지의 13일간, 군중들이 집단으로 소리지르고 놀라서 소란을 피운 사건이 166건에 달하였다. 같은 기간 북경시의 교외지역은 민중들의 공황으로 400호의 촌민이 이는 마을에서는 유언비어로 인하여 손전등 1000개를 샀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한밤중에도 불을 켜고 살았다. 매일 소모하는 석유만 25근에 달하였다.

 

유언비어의 원형을 분석하면 아마도, 1950년 4월 당시의 수원성(綏遠省)의 도림현(陶林縣)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기본적으로 1950년 7월에 집중적으로 각지에서 돌연 폭발했다. 마지막은 1950년 9월에 북경시 창평현에서 전파되었다. 땅은 많고 사람은 적은 화북북부지역에서 이런 상황은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이 현상은 유언비어의 폭발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나는 방대한 조직이 계획하여 동시에 유언비어를 퍼트린 경우, 다른 하나는 유언비어가 발생한 지역에 공동으로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여, 민간의 집단기억을 자극한 경우. 전자는 정부의 유언비어폭발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이고, 일관도(一貫道)가 이 유언비어를 조직하고 기획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이 해석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관도는 매우 느슨하고 계파가 나뉘어진 종교단체이므로, 그 구성원이 전파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가지고 유언비어의 전파가 사전음모와 계획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당시의 교통통신조건을 보면, 북경, 빠오터우의 철로연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의 교통은 아주 불편했다. 이들이 이렇게 짧은 기간내에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후자의 해석이 분명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모인수괴"는 도창불입

 

"모인수괴"(일부지역은 水鬼毛人이라 부름)의 유언비어는 이렇다: "미국, 영국, 프랑스등 국가가 소련으로 진공하는데, 소련은 원자탄을 만들어 이 다섯국가의 공격을 막으려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 여자의 젖꼭지, 남자아이의 생식기는 원자탄의 원재료이다" 공산당은 "모인수괴"를 내보내서, 사람의 심장, 눈, 젖꼭지, 불알을 파내고, 임산부의 태아를 꺼내서 소련에 보내어 원자탄을 제조한다" "수귀(水鬼)와 모인(毛人)은 낮에는 정복을 입은 간부이지만, 저녁에는 모습이 바뀐다" "모인수괴는 한꺼번에 집을 뛰어넘을 수도 있고, 강도 뛰어건넌다." "모인의 손에도 털이 있고, 다리에도 털이 있는데, 손발을 뻗으면 불이 나오고, 칼과 총도 막아낸다" "모인수괴는 총알이나 대포는 무서워하지 않지만, 빛은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많은 곳에서 저녁에도 등불을 끄지 못하였다.

 

유언비어가 나타난 초기에는 의식적으로 만든 것같다. "모인(毛人)"은 정부이고, 소련과 관련이 있다. 유언비어의 전파과정에서 이 두 가지는 갈수록 강화되고, 구체화되었다. 명확하게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인'의 공격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피해대상은 일반민중으로 한정하여, 농촌사회를 이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같다. 이 유언비어의 전파과정에서, 당원(공산당), 단원(공청단), 간부가 민중의 공격대상이 된다. 유사한 주장은 안휘성 중부의 장강유역과 북부의 회하유역지역에 나타났다.

 

유언비어의 전파과정에서, 간부와 군중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붙잡아서 묶고, 때리고,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무위현에는 일찌기 7000여명이 향정부로 가서 '모인'을 잡으려고 했고, 향정부의 문과 창문을 부수고 4명을 상처입혔다. 이 현의 간부는 바로 '수귀모인' 유언비어를 조사하기 시작하려고 마을로 갔는데, 현지 군중들에게 둘러싸이고, 총을 빼앗기고, 불법구금당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기회에 간부를 죽이기도 하였다. 1954년초가 되어, 유언비어는 심지어 당과 국가최고지도자를 공격하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유언비어는 전파과정에서, 각 지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회혼란을 야기시켰다. 산동성 염성현은 유언비어가 전체 현에 만연되어, 군중들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논밭은 황량해졌으며,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다. 강소성에서, 유언비어는 북부 35개현, 시에 퍼져서, 6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동안 각중 공무는 거의 정지상태였다. 15개 현, 시의 통계만 보더라도, 각종 상해사건으로 군중들이 814명이 다치고, 35명이 사망했다. 어떤 지역은 민중들이 낮에도 논밭에 나가 일을 하지 못했고, 밤에는 함께 모여서 있었다. 학생들을 학교에 가지 못하고, 매일 태양이 하늘 높이 떠야 겨우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왔다. 안휘성에서 유언비어가 유행하던 지역에는 촌민들이 함께 모여서 잠을 자고, 청장년남자들을 조직해서, 총과 몽둥이를 들고 새벽까지 지켰다. 모든 창문은 꽉꽉 틀어막아서, '수귀모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고, 곳곳에서 밤새도록 불을 밝혔다.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수귀모인'이 왔다고 큰 소리로 서로를 부르곤 했다. 어떤 곳은 방송으로 '모인'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였고, 이웃 마을에도 방범을 강화하도록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모든 마을, 모근 구역 내지 모든 현이 난리를 쳤다. 개별 향에서는 심지어 소촌이 합하여 대촌이 되기도 하였따. 어떤 곳에서는 민병이 혼란중에 눈을 감고 총을 쏴서 애매한 피해자가 나타나기도 하였따. 어떤 사람은 너무 무서워해서 자살을 하기도 하였다. 어떤 곳은 남녀가 집단으로 잠을 자다보니 강간사건이 발생하여 부녀가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언비어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는 지방정부도 아마도 이렇게 넓게 번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민중에 대한 영향이 이렇게 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방정부도 크게 주의하지 않았따. 강소성과 같은 경우 1953년 4월 술양현에서 유언비어가 나타났지만, 2달후에야 비로소, 상급기관인 회음지구위원회가 <<술양현 유언비어를 불식시키는데 대한 몇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7월에 강소성 공안청은 모인수괴 유언비어의 처리에 관한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부청장으로 하여금 공작소조를 이끌고 회음으로 가서 유언비어불식업무를 지도하도록 한다. 이 때 유언비어는 이미 강소북부의 각지와 안휘의 일부지역까지 퍼져 있었다. 강소성과 인근한 안휘성도 마찬가지로 적시에 유언비어의 확산을 제때 방비하지 못했다. 농촌에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유언비어로 인한 소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방정부는 할 수 없이 많은 인력을 동원하게 된다.

 

유언비어가 확산된 후, 정부는 유언비어의 전파자에 대하여 엄중한 조치를 취한다. 일부인사를 체포하고 처벌하는 외에, 지방정부는 공개재판을 통하여, 현장에서 판결하는 형식등을 통하여, 유언비어의 전파를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강제적인 방법으로 대량의 간부를 시골로 내려보내어 민중을 교육시키고서야 겨우 유언비어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집단기억

 

"모인", "수괴"의 기원은 민간전설이다. "모인"은 <<산해경>>등 고서적에 보이고, 나중에 이와 관련된 전설이 계속 생겨났따. "수괴"의 전설도 최소한 전국시대 이빙이 치수사업을 할 때부터 있었다. 나중에 "수괴" "수귀"는 고대문학에서도 자주 보이는 것이 된다. 이들은 민간전설로 구성된 허구의 집단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에서 구술방식으로 연속되어오고, 문학예술작품의 형식을 통하여 전파되어 온 것이다.

 

"모인수괴"에 대하여, 강소성은 일찌기 공식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즉, 처음에 술양현 방산구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다지 정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최소한 1953년이전에도 "모인수괴"에 대한 소문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료로 보면, 일찌기 1947년에 "모인수괴"의 유언비어가 존재했다. 1947년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강소성 대풍현(강소북부)에는 "모인수괴"의 소문이 파다했다. 이것은 매일 밤에 강에서 기어올라오는데, 사람의 눈알을 파고, 심장을 파낸다는 것이다. 민심이 흉흉하여, 밤새도록 집집마다 불을 켜두었고, 일부 사람들은 집단으로 모여서 잠을 잤다고 한다. 나중에 '모인수괴'를 가장한 사람을 붙잡는다. 이 사람은 토지개혁때 부농으로 분류된 사람으로 육무의 밭을 받았는데, 그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거짓 소문을 만들어내고 귀신놀음을 했다는 것이다. 1949년 7월, '수귀모인"의 유언비어는 막 해방된 안휘 방부에서 유행한다. 1949년 10월, 강소성 관남현의 이루지역에서도 '모인수괴'의 유언비어가 나돈다. 당시의 연운항지역정부는 포고를 통하여, 군중들이 '수괴' 유언비어를 고발해줄 것을 호소했고, 파괴분자를 추적하여 붙잡겠다고 하였다. 반혁명을 진압하기 전에, 연운항 북부와 산동성이 만나는 곳에 있는 감유현의 회도문은 유언비어를 전파하였는데, "공산당은 수귀모인을 내보내서, 사람의 심장과 눈알을 파내고, 임산부의 태아를 꺼집어내서 소련에 보내 원자탄을 만든다"고 하였다. 대풍현, 방부시, 감유현과 관남현은 수백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인수괴"는 농후한 민간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에서는 '모인수괴'에 대하여 기억을 가지고 있으므로, 1952년 여름, 강소성의 비적이 행사호, 대운하 일대에서 부녀를 간음하며, 객상으로 행세하면서 스스로를 '모인수괴'라고 칭하기도 했다. 사실 유사한 유언비어는 이후에도 끊기지 않았다. 1955년 안휘성 래안현ㅇ서 '모인수괴'의 유언비어가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는 금방 종식되었다.

 

"할단"과 유사한 유언비어는 이전부터 있었다. 1920년대 사천성에는 전설에 의하면 남자의 생식기, 유두, 태아를 서양약방에 팔고, 다시 외국에 팔아서 약을 제조하는데 쓴다는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1950년 화북지역의 '할단' 유언비어이후, 1951년에는 산동의 기수와 임구 두 현에서 '무덤파내기' 유언비어가 돈다. '기수현에는 전문적으로 무덤을 파내는 조직이 있는데, 행동이 아주 신비하고,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고, 처자식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눈, 무릎, 생식기를 떼내서 국가제일종약에 판매한다. 그런데, 100개의 눈알중에는 반드시 한개는 살아있는 사람의 눈알이어야만 효과가 있다" 그리고, "정부는 무덤파는 사람을 보호하고 있다" 이 유언비어는 3년이나 지속되었다.

 

"할단"의 유언비어중에서 '창자를 꺼낸다'는 말은 아마도 중국의 전통희곡에서 배를 가르는 연기를 하는 데서 왔을 수도 있다. 즉, 극에서 배를 가르는 연기를 하는 사람은 돼지의 창자를 꺼내서 씻고 말린 다음에 사람의 창자인 것처럼 연기하며, 배 밖으로 꺼내는 것처럼 한다. 관중들은 이때 놀라움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공황은 유언비어의 온상

 

화북지구에서 회도문은 신도가 많다. 그중 일관도의 세력이 가장 컸다. 원 북경시장 팽진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관도는 북경에서 제일 큰 당이다" 1950년말, 북경 해전구의 일관교도 2만여명(1950년 전해전구의 인구는 14.3만명)이었다. 1951년초 수원성의 완전하지않은 통계에 따르면, 전정의 일관교도는 30만으로 추산하는데, 전체 성인구의 11%에 해당하였다. 공산당이 정권을 취득한 지역에서는 바로 일관도를 타도하는 행동에 들어간다. 1950년 봄, 찰합이 북부지역(지금의 장가구지역)에서 토지개혁업무와 결합하여, 일관도를 단속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통계에 따르면 1.7만명의 교도가 탈퇴했고, 그중 정부에 등기한 간부가 600명에 가까웠다. 일부 완고한 교도는 지하활동에 들어가고, 이러한 상황을 그들은 '고난' '악마의 시험'이라고 보고, 곧 큰 재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교도들에게 위기의식이 만연하게 하였다.

 

유언비어가 전파된 주요지구에 인접한 동북지역과 화북의 원해방구는 유언비어 폭발전에 토지개혁을 이미 마쳤으므로, 이들 지역의 개혁에서는 어느 정도 과격한 점이 나타났다. 당시 지주, 부농이 농촌인구의 10%정도를 점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일부지방은 타도대상을 이보나 넓게 잡아서, 일부 중농, 공상업자들까지 피해를 입었다. 이는 일정한 정도로 토지개혁이 진행되지 않은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유언비어의 전파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직 토지개혁이 진행되지 않은 신해방구였다. 전체 농촌은 전전긍긍하면서 토지개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이 발발한 초기에는 민간에서 전쟁에 대하여 공황심리가 있었다. 여기에 당시 많은 지방은 여전히 비교적 강대한 반정부세력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제3차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다"라든지, "국민당이 대륙으로 반격해올 것이다"와 같은 정치적인 유언비어가 난무하였고, 민간의 두려움은 더해졌다.

 

민간의 불안한 분위기는 갑작스러운 유언비어로 바뀐다. 그렇다면 어떤 요소가 이를 재촉했는가? 필자의 견해로는, 당시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이 도화선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첫번째 사건: 당시 국가지도자 모택동은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2월 17일까지 소련을 방문한다. 실제로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과 일부 지방에 머무르는 시간을 고려하여 모택동은 12월 6일에 출발하여, 3월 4일에야 북경으로 되돌아온다. 북경을 떠난 시간이 근 4개월이었다. 모택동의 방문기간에 중국과 소련은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및 기타 협정을 체결한다. 이로써 양국관계의 밀월기가 시작된다. 전통적인 중국에서는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택동이 장기간 소련을 방문한데 대하여 민간에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모택동의 방문과 조약의 해독에 대하여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왜곡시킨다면, 손쉽게 기괴한 유언비어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할단' 유언비어는 바로 중국과 소련의 이익교환에 관련된 것이다.

 

두번째 사건: 잊혀진 서명운동이 있다. 이 사건의 영향이 아마도 더욱 중요했을 수 있다. 1950년 3월 중순, 세계평화옹호대회가 스톡홀름에서 개최되었는데, 세계각국에서 평화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이 운동은 동유럽공산국가에서 금방 파급되었다. 냉전시대에 동서방의 양진영은 서로 선전으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으므로, 중국도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같은 해 4월 28일, 중국세계평화보위대회위원회는 통고를 보내어, 전국노동자, 농민, 군인, 학생, 부녀, 문예종사자, 기관업무종사자들에게 모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어, 전국각지에서, "세계평화옹오, 원자무기사용금지"의 서명운동이 일었다. 일부 농촌지역의 서명인구비율은 놀랄 정도였다. 예를 들어, 감숙성 경양지구의 비율은 80%에 달하였다. 이처럼 높은 서명비율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하나는 수치에 허수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뭐가뭔지도 모르고 서명했다는 것이다. "할단"의 유언비어가 전파된 지역에서는 서명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났던 곳들이다. 유언비어가 폭발한 지역의 하나인 하북성 장가구지구의 장북현은 어떤 경우 서명을 거수로 대체하여 처리한 곳도 있다.

 

어떤 사람이 낸 통계에 의하면, 1949년의 하북인구중에서 문맹과 반문맹이 80%이상이었다. 유언비어지구의 사회경제상황을 보면, 이 지역의 교육수준은 전체성평균보다 뒤지는 곳이었다. 필자는 1950년 유언비어가 폭발한 지역(북경, 천진 제외)은 문맹인구가 성년인구의 90%가량을 점하였을 것으로 본다. 심지어 더 높았을 수도 있다. 이들 고도문명지역에서는 근본적으로 핵무기가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는 많은 민중들이 원자탄사용을 반대하는 서명을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이 오해하기 쉬웠다. 특히 '원자탄'의 '탄(彈)'은 불알의 '단(蛋)'과 발음이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서명과 원자탄을 연결시키고, 이를 서로 전파한하면, 유언비어가 탄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당시 원자탄을 가진 두 개의 국가였다. 민중의 마음 속에 둘 다 '서양인'이므로 원자탄과 생식기의 불알(蛋)을 연결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동시에 이번 서명운동 자체가 소련과 동구권 국가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민중은 소련과 '할단'을 연계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북지구의 '할단'유언비어의 도화선은 아마도 정부가 통일적으로 조직하여 각지에서 벌인 정치선전운동일 것이다.

 

불안한 사회분위기하에서, 민중은 자기의 집단기억을 기준으로 정치선전을 재해석했다. 이것이 바로 유언비어가 탄생한 원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언비어의 사회적인 기초를 믿고 있을 것이다.

 

"모인수괴"과 광범위하게 유전된 지역은 실제로 근대중국에서 전쟁으로 인한 유린이 가장 심한 지역이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시기의 주요한 전장터들이다. 전소련은 1949년 첫번째 원자탄을 터뜨리고, 1953년 8월 첫번째 수소탄을 터뜨린다. 그리고 매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과학적인 인식이 결핍된 민중은 핵무기를 신비와 공포의 심리상태로 보았을 것이다. '할단' 유언비어와 유사하게, 핵무기와 불알을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불안정한 요소하에서, 회수의 치수공정에서 기하의 굴착과 삼하갑수리공사는 객관적으로 유언비어의 전파를 도와주었다 신기하는 기하의 하류에 새로 만든 홍수방어수로이다. 1949년에 시작하여, 1953년 봄에 만들었다. 삼하갑은 1952년에 착공하여 1953년에 완공한 홍택호홍수조절공사이다. 바로 회하에서 장강으로 들어가는 인후에 해당한다. 이 두개의 공사는 1950년대의 회하를 정비하기 위한 중대한 공사였고, 매 공사는 모두 수십만의 민공을 동원했다. 이들 공사가 완공된 후, '모인수괴'의 유언비어는 신기하를 지나는 술양현에서 폭발하고, 이후 회수공사에 참여했던 민공들의 출신지역인 회하유역의 각지에서 폭발한다.

 

건국초기의 수리공사는 백성을 위한 공사였다. 정부는 회하를 다스리기 위하여 거대한 노력을 들였다. 그러나, 공사를 건국과 동시에 시작하였으므로, 정부의 재정능력이나 관리수준이 부족한 곳이 많았다. 민공이 지급한 대가는 훨씬 컸다. 업무는 너무나 힘들었고, 간부의 관리수준은 형편없었고, 보수는 낮았고, 공기는 계속 연장되었다. 그리하여, 수십만의 민공들에게서 적대적인 정서가 형성되었을 수 있다. 심지어 무의식중에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고, 유언비어를 전파했을지 모른다. 이것이 아마도 '모인수괴'의 유언비어가 폭발한 진정한 원인일 것이다.

 

당시 민공의 생활조건은 아주 열악했다. 민공이 재료운송도중에 얼어죽는 사건도 10여건이 있었다. 그리고 대규모의 전염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1950년 봄, 30만민공중 각종질병을 앓는 사람의 비율이 2.55%에 달하였다. 환자들은 고향으로 되돌려보내진 후, 다시 전염병이 확산되었고, 공사현장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불러왔다. 공기를 앞당기기 위하여, 민공들의 업무량은 과대했고, 체력소모도 극한에 달하였다. 숙천 총대의 많은 간부들은 과도한 피로로 인하여 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일부 관료적인 간부, 당원은 임무가 과중해서 방법이 없자, 수시로 욕을 하고 때리거나 민공들을 묶고 가두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통계에 의하면 대대급간부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경우가 80여건이다.

 

삼하갑공정은 비교적 늦었고, 공사기간도 비교적 짧았다. 민공의 정서도 비교적 안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급여가 너무 낮았으며, 한 때는 혼란이 조성되기도 했다. 삼하갑은 유언비어가 처음 나타난 곳은 아니다. 그러나, 공사현장은 1.5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인데, 10여만의 민공이 집결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유언비어가 전파될 수 있는 곳으로 되었다. 강소성 사양현은 1952년 겨울 삼하갑공정에서 돌아온 사람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삼하갑 공사현장의 민공중 얼어죽은 사람이 5,6천명이라고 한 것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인수고'의 유언비어가 현지에서 나타난다.

 

유언비어의 폭발은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연의 배후에는 심각한 사회현실이 숨어 있다. 여기에 바로 유언비어를 연구하고, 유언비어를 회고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