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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멜라민분유사건

멜라민분유 산루(三鹿)의 비극

by 중은우시 2008. 9. 22.

글: 이빈(李賓), 섭문첨(葉文添)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산루의 임직원들은 2년반전의 저녁에 보여준 텐원화(田文華)의 웃는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냉정하고 엄숙하기로 이름난 그녀가 격동하여, 찬란한 웃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바로 2006년 2월 16일, 산루집단의 50주년 생일때였다.

 

바로 그날, 산루집단은 1.8억위안을 투입하여 건립한 고급분유생산라인의 생산을 개시했다. 이후 기자회견에서 동사장의 직위를 보유한 텐원화는 계속 술잔을 들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바로 그날 밤, 64세된 텐원화는 이렇게 전망했다. 2010년에 산루집단은 기능성식품과 요구르트의 판매량에서 전국1위를 차지하고, 액체우유와 우유음료에서 3위내에 들며, 국제시장과 수준을 맞춰갈 것이라고. 항상 자신에 찬 그녀는 이 대선박을 이끌고 계속 앞으로 전진해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세상일은 변화막측하다. 지금 그녀는 산루집단 동사장, 총경리 및 당위서기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하북경찰에 형사구속되어 있다. 그녀의 운명과 그녀가 21년간이나 경영했던 산루집단의 운명은 아주 비슷하다. 영광화 휘황의 최전성기를 지나, 돌연 급전직하한 것이다.

 

확장후유증

 

비록 지금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모두 '사후제갈량'격이겠지만, 이번 '멜라민분유'사건은 산루가 최근에 고속발전하면서 남긴 내부, 외부의 위기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전체 유제품업계의 맹목적인 확장은 산루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한 유업전문가의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산루가 소재한 하북성은 대규모로 젖소를 기르기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내몽고의 초원처럼 광활한 목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바로 국내유업업계가 신속히 확장해 나갔으므로, 생우유를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은 날로 치열해졌다. 이리(伊利), 멍뉴(蒙牛)등 '강적'들이 모두 하북으로 몰려와서 생우유를 빼앗아 갔다. 산루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적수들이 모두 왔다. 산루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미친듯한 확장이 불가피해졌다. 과거 수년간, 산루는 산동, 하북, 섬서, 하남, 감숙등지의 지방기업을 인수합병했다. 그리하여 이곳을 자신의 생산기지로 삼았다.

 

"이들 기업을 데려온 원래의 뜻은 생산량을 늘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되었다" 업계인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산루는 통상 아주 적은 자금으로 이들 파산에 직면한 중소기업들을 인수했으나, 자금부족으로 후속투자를 얼마 하지 못했다. 사온 기업들은 '탕제는 바꾸었지만 약방은 바꾸지 않았다" 기계설비나 내부관리가 따라오지 못하여 안전의 문제거리가 남아 있었다.

 

하북성 행당현의 한 산루분공사를 방문했을 때, 공장의 풍경이 아주 낡았다. 가장 뚜렷한 것은 28년전에 지었다는 옛날식 연통이었다. 대문의 앞에 오래된 낡은 간판이 걸려있는데, 그곳에는 "행당산루유업유한공사"라는 검은색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것 말고는 산루집단에 속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이 분공사는 현재 산루집단이 51%지분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49%는 행당현정부가 지배하고 있다. 이 회사의 인사에 따르면, "회사는 계속하여 파산지경이었다" 주요원인은 산루가 인수한 후, 아무런 신설비나 자금을 투입해주지 않았고, 옛날 기계를 그대로 써서 분유를 생산해왔다. 방대한 산루의 산하에 이같은 분공사 혹은 자회사는 수두룩했다.

 

"유제품이라는 생사를 건 전쟁터에서, 기업은 죽어라 확장을 할 뿐이며, 후방산업에 대한 지배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번 멜라민분유사건의 심층적 원인이다" 상해용납자문고문기구의 동사총경리인 장운비의 말이다. 그는 산루의 '후방산업의 품질이 미친듯한 확장의 전방산업요구를 따라갈 수 없었거나 혹은 산업체인의 관리능력이 부족하여 균형을 상실했다'고 한다.

 

마케팅전문가의 지적에 따르면, 이러한 고속성장과정에서 산루의 시장전략은 잠재적인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대량으로 광고선전을 하거나 프로모션을 하지도 않고, 가격전의 방법으로 시장을 빼앗았다. 이는 반드시 원료구매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도록 하였고, 계속 이윤을 짜내게 되자 우유농가와 우유수거소는 자연히 뭔가를 섞을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하북성 행당, 대조장등 주요 우유생산지역에서 조사한 결과 이렇게 판단할 수 있었다: 산루는 현지의 생우유수매가격이 멍뉴, 이리보다 약간 낮았다. 그리고 우유농가가 싼 값에라도 우유를 팔게 하기 위하여는 품질검사기준을 완화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비록 텐원화는 산루의 신속한 발전을 견인했지만, 계속 커져가는 방대한 집단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힘이 부쳤던 것같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텐원화는 원래 산루와 폰테라(Fonterra, 恒天然)그룹간의 합자이후 바로 은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가 기업의 버팀목이므로, 주주들도 하루빨리 상장하기를 원해서,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업의 위기과정에서 구속까지 될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조의 길

 

산루집단의 전신은 "행복유업생산합작사"이다. 18개의 축산농가 합꼐 45명의 사원으로 조직되어, 1956년 2월 16일에 설립되었다. 1966년 장가구농업전과학교를 졸업한 텐원화는 바로 그해에 젖소농장에서 수의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텐원화는 1987년 기업책임자로 승진한다. 업계내 인사들에 따르면, 텐원화는 성격이 강인하고 호승심이 강하다. 공장지의 기록에 따르면, "나는 대학에 가고, 일을 하는데 한번도 다른 사람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바로 그녀가 이끌고 나거서 회사는 신속한 발전의 길로 들어선다.

 

1993년, 산루분유의 생산판매량이 이미 전국1위가 된다. 그러나, 분유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여, 기업의 생산능력을 신속히 끌어올려야 했다. 그리하여 텐원화는 산루를 이끌고 그룹화의 방향으로 바꾸게 된다. 점차 성내의 여러 경영이 곤란하거나, 규모가 작은 유제품기업을 합병한다. 1996년, 석가장산루집단주식유한회사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2000년이후, 산루는 전국의 다른 성으로 대거 확장해 나간다. 첫번째 성외분공사는 2002년에 설립한 하남산루화화우유업유한공사이다. 지금까지, 산루집단은 북경, 천진, 하북, 강소, 산동, 하남, 광동, 안휘등 성시에 모두 30여개의 기업을 가지고 있다. 제품도 다양화되어, 분유제품, 액체제품, 곡물제품, 요구르트, 우유음료등의 오대류로 나뉘어졌다.

 

다만, 장기간 산루를 관찰해온 북경CBCT브랜드마케팅기구의 동사장인 이지기가 보기에, 산루는 국내유제품업계의 후발주자이다. 5년전의 랭킹은 이류에 속했다. 분유의 소비량은 액체우유만큼 크지 않았으므로 산루는 2000년을 전후하여 비로소 액체우유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당시 국내 액체우유시장은 광밍(光明), 이리와 산위안(三元)의 천하였다. 다만 이리는 분유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산루는 제품다양화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위기가 폭발하기 전까지는, 산루는 액체우유에서 여전히 이리, 멍뉴와 산위안의 뒤를 이어 4위에 자리했다.

 

'분유의 왕'으로서 산루는 브랜드노화, 저급화의 발전병목현상에 부닥쳤다. '제품이 중저급위주이므로, 산루브랜드는 사람들에게 촌스럽다는 이미지를 주었다.:" "몇몇 국내 대형 브랜드 중에서 산루는 이리, 멍뉴만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가 높지 않았다"

 

기업의 집체소유제성격도 산루의 발전에 장애를 주었다. 2005년, 산루는 주식제개조를 실행하였다. 개조후에 석가장유업유한공사는 대주주로 91%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직원이 7.71%를 보유하고 나머지 3명의 소주주가 1%가 되지 않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 개조는 국유성격이 변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경영진과 직원들에게 지분을 부여한 것이다.

 

개조이후, 산루는 뉴질랜드의 폰테라집단과 합자했다. 후자는 43%의 지분을 인수했다. 합작의 원래 뜻은 산루인사들에 따르면, 폰테라는 뉴질랜드 최대의 우유생산상이며, 뉴질랜드에서 근 90%의 생우유수출을 장악하고 있다. 산루의 이후 발전에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관계자에 따르면, 산루가 폰테라와 합작한 이유의 또 하나는 바로 재산권개조를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폰테라그룹이 산루의 43% 지분을 인수한 후, 전체 경영진의 지분비율은 4%에 미치지 못하고, 동사장인 텐원화 본인의 지분도 1%가 되지 않았다. 어떤 평론가는 "이는 역사상의 집체소유제가 가져온 중국특색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폰테라의 영향은 점차 산루집단의 각 단계로 파고 들었다. 2007년, 산루가 정식으로 사업부제를 실행하고, 액체우유사업부, 고급분유사업부등을 만든다. 그리고 외자기업이나 상장기업과 같이 재무예산을 실행한다. 산루공장의 타일은 고급타일로 바뀌었고, 생산공장의 창문도 닫게 되었다. 쓰레기통에는 플라스틱비닐을 덮었다. 산루공장의 직원들은 직접 분유를 접촉할 수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산루는 경영세부사항에서 국제적인 회사에 접근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완벽한 결혼이었다.

 

그러나, 업계인사에 따르면, 합자이후, 폰테라는 실제로 산루를 지배할 수 없었고, 산루의 생산과 판매에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멜라민오염사고가 드러나기 전에, 폰테라는 산루집단과 현지정부에 질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지방보호등의 이유로, 그들은 제대로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본사에 대한 영향력도 이 정도인데,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산루분공사에 대하여 폰테라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