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효문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III)

중은우시 2008. 9. 3. 20:33

 

비극인생

 

척발굉은 선비족의 일원으로, 그의 혈관에는 척발씨의 혈액이 흐른다. 본민족문화에 대하여 자연히 가깝게 느껴지고 호감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한민족의 유가문화의 훈도와 영향을 받아,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인자가 그의 마음 속에 동시에 존재했다. 분명히 서로 충돌하고 부딛쳤을 것이다. 둘을 비교하면, 그는 이성적으로는 한문화에 동조했고, 완전히 한문화의 발아래 무릎꿇었다. 그리고 고심해서 그의 신하와 백성들을 선진적인 문화의 길로 이끌고 갔다.

 

낙양천도후, 북위의 한화개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효문제는 더 이상 과거의 부분적인 개혁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속도와 강도를 높인다. 여러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추진한다. 한족문화를 모조리 가져와서 쓰는 것이다.

 

내부개혁과 동시에, 척발굉은 남북통일의 목표도 잊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성격이 과단하며, 아주 박력이 있고, 담략이 있었다. 다만 성격이 조금 조급하였고, 어떤 일들은 그가 혼자서 다 이루려고 욕심을 냈다. 막 낙양에 천도하자마자, 대신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안정되기도 전에, 병력과 물자의 준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황급히 정벌을 시작했다. 병사를 넷으로 나누어, 전면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반만에 실패로 끝난다.

 

496년 시월, 제1차남조정벌이 무위로 돌아간 후 1년여만에, 그는 남조내부의 정치동란의 좋은 기회를 틈타, 다시 대거 제나라를 치러 내려간다. 이때, 효문제는 비교적 충분한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북위군사가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남양, 신야등 적지 않은 군현을 얻었다. 다만, 와양전투에서 위나라군은 참패하고, 1만여명의 병사가 전사하며, 3천여명이 포로로 잡힌다. 나중에 다시 전세를 뒤집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 7개월에 걸친 남조정벌은 결정적인 승리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만다.

 

498년 사월, 척발굉은 주군병 20만을 징집하여 8월중순까지 집결을 마치도록 한다. 제3차남조정벌을 준비하는 것이다. 남조정벌에 나선 고창의 병사들은 원정을 두려워 하여 속속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마침 제나라의 명제가 죽는다. 효문제는 '상중인 나라를 치지 않는 것이 예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남조진공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하여 내부를 정돈한다. 오랜동안의 정벌로 효문제는 피로해진다. 그리고 내부의 각종 갈등으로 몸과 마음이 다 어지러웠따. 바로 이때, 후원에서 돌연 불이 난다. 어떤 사람이 황후인 풍묘련(馮妙蓮)이 환관을 참칭한 승려 고보살과 사통했다고 보고한다. 이는 불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었다. 척발굉은 대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황후를 감금하라고 명령하고, 고보살 및 둘을 연결시켜준 궁중집사 쌍몽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효문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데다 몸과 마음이 초췌해져, 이미 허약했던 몸에 큰 병을 얻는다.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서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는데,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제를 토벌하러 나선다. 결국 병이 뼛속깊이 들어, 효문제는 499년 사월 이십육일 정벌도중에 죽는다. 나이 겨우 33세때의 일이다.

 

효문제는 죽기 전에, 음탕한 풍황후를 잊지 않았다. 그는 유언을 남겨서, "황후는 부덕을 지키지 않았으니, 사후에 조정일에 간섭할 수 있으니 자진토록 하고, 자리를 잡아서 황후의 예로 안장해주라"

 

척발굉은 황위를 위하여, 북위의 국가대업을 위하여, 거의 가정이 행복과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의 개인생활은 다중비극이 겹쳐져 있었다. 부모, 부인, 아들이 누군가에 죽임을 당하거나, 사사당하거나, 자기가 명을 내려 죽게 하였다. 척발굉의 혈연지친과 가정생활에는 처량하고 참담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는 그의 일생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다.

 

성패영웅

 

후세인들이 척발굉을 높이 평가받고, 학자들의 그에 대한 연구 및 그의 역사에서의 지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의 전공때문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문치 즉 전반한화때문이다. 연구결과의 하나는 바로: 북위의 쇠망은 효문제의 개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후세인들의 척발굉의 전반한화개혁에 대한 평가는 세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전면적인 긍정이다. 그는 북위사회의 봉건화를 완성하고, 각민족의 융합을 추진했으며, 당시사회의 안정, 경제의 번영과 문화의 진보를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효문제의 전반한화는 당시의 역사발전조류에 순응한 면이 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개혁방침을 채택한 점도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긍정과 부정이 모두 있는 것이다. 척발굉의 한화개혁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가 청탁을 가리지 않고, 정화와 쓰레기를 구분하지 않고, 취사선택없이 전면적으로 한족문화를 흡수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벌제도의 건립은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낳았다. 선비귀족을 날로 부패 무능하도록 만들었고, 사병의 지위를 하락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전투력을 상실시켰다. 그가 낙양으로 천도한지 얼마되지 않아, 준비가 부족하고 내부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하에서 연이어 3차의 대규모 정복전을 일으킨 군사행동은 너무 조급했다.

 

셋째는 전면부정이다. 효문제의 한화는 썩은 유가화, 소극적인 한화이다. 그저 한족의 번잡한 예의와 낡아빠진 요소만을 배웠다. 그리하여 척발부의 용감하고 전투적인 기질을 잃어버렸다. 그의 개혁은 북위를 진흥시키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반대로 민족의 유약과 국가의 쇠망을 초래했다.

 

사실의 진상은 설사 효문제의 개혁이 없었더라도, 척발부는 이미 조상때의 용감함과 강맹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북위의 쇠망도 모두 척발굉의 조치때문은 아니다. 만일 당초에 낙양으로 옮겨서 남부세력을 강화하지 않았더라면, 남제의 북벌이 더 일찌감치 성공했고, 중원의 고토를 회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척발굉의 개혁상 잘못이라면 대북의 변방지역에 대하여 소홀히 하였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낙양천도후, 정치군사중심이 남으로 옮겨간 후, 효문제의 개혁은 주로 낙양을 중심으로 황하유역에서 진행되었다. 과거의 발상지인 평성을 중심으로 한 대북지역은 아마도 경제조건의 제약인지 혹은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니면 남쪽에 정력을 집중해서인지 어쨌든 돌보지 않았다. 남부는 전면적으로 한화하였지만, 북부는 강렬한 선비의 경향을 보존하고 있었다. 선비말, 선비복...선비습속이 예전과 똑같았다. 문벌귀족제는 대북변방의 귀족을 바깥으로 내몰았고, 그들을 하층의 서민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자, 북위는 점점 낙양을 중심으로 한 집단과 평성을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 분열된다. 결국 거대한 정치내란에 휩싸이고, 북위의 멸망은 가속화된다.

 

북위가 신속히 멸망한 근본원인은 효문제의 뒤를 잇는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봉건통치의 큰 특색의 하나는 인치이다. 흥망성쇠가 왕왕 권력자와 밀접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좋은 군주는 국력을 강성하게 하지만, 혼군, 폭군, 용군(庸君)은 국력을 쇠약하게 한다. 이는 수천년이래로 중국봉건사회의 철칙이다. 효문제가 죽은 후, 후임자는 평범하고 무능했다. 혹은 멍청하고 포악했다. 갈수록 이전만 못했다. 30년도 되지 않아 멀쩡하던 북위는 끝장나고 만다.

 

민족간의 융합과 동화는 인류전체의 역사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발전추세이다. 이로써 볼 때, 효문제 척발굉은 1500여년전에 전반한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바로 역사의 조류와 발전의 추세에 순응한 위대한 개혁이라 할 것이다. 도덕측면의 선악판단과 공리적인 성패득실을 따지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는 선진문화를 인정하는 자각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후세인들에게 고귀한 모범을 세운 것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