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효문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I)

중은우시 2008. 9. 3. 17:17

글: 증기흠(曾紀)

 

북위 효문제의 개혁은 중국역사에 있어서 일대사건이다. 후세인들이 글을 통해서 찬양해 마지 않는 사건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과서는 논쟁거리를 감추어 두었다:

 

- 강대했던 북위가 쇠망한 것은 효문제의 개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 효문제개혁의 폐단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 북위가 급격하게 멸망하게 된 진정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 누가 북위개혁의 진정한 선구자인가?

- 용감했던 효문제는 어떠한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는가?

 

소년황제

 

467년, 탁발굉(拓跋宏)은 당시 북위의 수도인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태어났고, 2년후에 태자에 봉해진다.

 

비록 이미 중원에 진입하여 중원의 주인이 되었지만, 탁발부(拓跋部)는 여전히 과거 조혼의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탁발굉이 태어날 때, 그의 부친인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은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탁발부가 북위를 건립한 후, 중원왕조가 황권통치를 유지하는 방법을 일부 배웠고, 제도로 만들어 엄격히 집행했다. 예를 들어, 후궁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태자가 되면, 모친은 죽임을 당한다. 그 뜻은 황제가 어려서 즉위하면, 대권이 모친계통의 외척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탁발굉은 2살때 태자가 되면서,모친인 사황후(思皇后) 이씨(李氏)는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야만적인 조치는 나이어린 탁발굉에게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아니라, 이후 가정생활이 처량하고 불행할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탁발굉은 어려서부터 생모를 잃었으므로, 조모인 풍태후(馮太后)의 손에서 자란다. 풍태후는 혈친은 아니지만, 명목상으로는 조모(할머니)였다. 그녀는 한족이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책을 약간 읽었으며' 봉건적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성격이 굳건했고, 일처리가 과단성이 있어 정치가의 풍모가 있었다. <<위서. 황후열전>>에서는 그녀를 '지략이 뛰어나고, 시기심이 있으며, 잔인했다. 큰 일을 할 수 있었고, 살리고 죽이거나 상벌을 내림에 있어서 바로바로 결정했다"  탁발굉의 부친인 탁발홍은 즉위시에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북위는 고아와 과부만 남아 정국이 안정되지 못했었는데, 풍태후는 이때 솜씨를 발휘한다. 권세를 부리던 승상, 차기대장군 을혼(乙渾)을 체포하고, 관중의 반란을 평정했으며, 임조칭제(臨朝稱制, 조정을 주재하고 최고명령권을 행사하다)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탁발굉이 출생하자, 풍태후는 즉시, '정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정권을 탁발굉의 부친인 탁발홍에게 넘겨주었다. 헌문제 탁발홍이 친정을 시작한 후, 산택의 금지령을 해제하고, 창고를 열어 이재민을 구휼하고, 병사를 이끌고 유연을 정벌하는 등, 젊은 황제로서 여러가지 사업들을 의욕적으로 벌였다. 권력욕이 왕성한 풍태후로서는 참지 못하고 북위의 정치에 간여하기 시작한다. 이는 자연히 헌문제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그들은 친모자간이 아니다. 그리하여, 궁중투쟁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지게 된다. 결과는 뿌리가 깊고 정치적인 지략이 뛰어난 풍태후의 승리였다. <<위서. 천상지>>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황상이 태후에게 핍박받아, 태자에게 황제위를 전하니, 효문제이다"

 

탁발굉이 즉위할 때 나이 겨우 5살이었다. 평성의 황궁에 있는 태화전에서 융중한 등극식을 거행할 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안겨서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나이 겨우 5살된 아이이다보니, 풍태후로서는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임조칭제하고, 권력을 자기의 수중에 장악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거역하여 '양위'하게 된 헌문제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나이어린 효문제는 자기가 생각하는 모델에 맞추어 교육하고 인도했다.

 

탁발굉의 혈관속에는 선비족인 탁발씨의 혈액이 흘렀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한족문화의 훈도와 교육을 받았다. 그를 둘러싼 대신들도 문화수양이 높은 한족 사대부들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으며, 자질이 극히 뛰어났다. <<위서. 고조기>>에는 그가 '오경의 뜻을 한번 보면 바로 말할 수 있었다.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않고도 정수를 깨달았고, 사,전,백가등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풍태후는 친히 <<권계가>>, <<황고(皇誥)>>등의 글을 써서 그로 하여금 읽고, 외우게 하여, 유가의 충효, 인애, 예의등 봉건도덕사상을 탁발굉에게 전수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언행을 가지고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풍태후는 생활에서 절제하고 검약하였으며,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았고, 아랫사람에게 관대하게 대하였는데, 탁발굉도 그대로 따라 하였다.

 

어릴 때의 생활은 탁발굉의 내심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었고, 그의 일생에 영향을 미첬다. 이후, 탁발굉은 평생동안 시문을 좋아하고, 대량의 시부문장(약40권)을 지었다. 그는 정치에 근명했고, 열심히 통치했다. 개인생활은 근검절약했다. 그는 봉건윤리도덕을 제창하고, 효제, 인의, 충신을 중시했으며, 그 자신이 몸소 실행하였을 뿐아니라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따르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가 나중에 실행하는 전면적인 한화(漢化)정책의 기초이자 지도사상이 된다.

 

당연히, 탁발굉이 완전히 선비족의 습속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당시는 남북대치상태이고, 전쟁이 빈번하였으므로, 제왕이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탁발굉은 글을 익히는 동시에, 무공도 익혔다. 그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고, 그가 원하는대로 맞혀서 죽일 수 있었다. 팔힘도 좋았다. 십여세때 이미 손가락으로 양의 어깨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성장한 탁발굉은 기마술, 활쏘기등 무공을 갖추고 한문화의 소양을 지닌 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되었다.

 

선도자

 

탁발굉의 부친 헌문제 탁발홍은 '양위'시에 겨우 19살이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퇴위후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일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태상황의 신분으로 그는 친히 병사를 이끌고 유연을 치러나가기도 하고, 계속하여 전국각지를 순시했다. '국가의 대사는 모두 물어보았다' 그리고 풍태후에 의하여 쫓겨난 옛신하를 다시 기용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와 풍태후간의 갈등을 격화시키게 된다. 궁중투쟁이 더욱 적나라하게 되고, 피바람이 일었으며 잔혹하게 되었다. 투쟁쌍방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혈연과 가족의 정도 모두 도외시되었다. 상대방을 피바람속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끝날 일이었다. 풍태후와 헌문제간에는 혈연관계도 없다. 그에게 황제위를 내놓도록 하고, 태상황이라는 직함을 붙여서 살려둔 것만 해도 풍태후로서는 이미 손속에 정을 남긴 것이었다. 그러나, 헌문제는 아직 어렸다. 풍태후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일을 벌였다. 그리하여, 헌문제는 풍태후의 눈엣가시로 되어버린다. 476년, 풍태후는 아예 깔끔하게 헌문제를 죽여버린다.

 

이 해에 탁발굉은 10살이었다.

 

헌문제가 죽다, 풍태후은 태황태후에 오른다. 그녀는 490년에 죽을 때까지, 임조칭제하고, 수중의 권력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풍태후가 정권을 잡았지만 그녀는 식견과 안목을 가진 정치가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이상을 가지고 새로운 황제를 길러냈을 뿐아니라, 전체 북위를 자기가 구상하는 틀과 모델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목표는 아주 명확했다. 하나는 남조로 진공하여, 그들이 내란에 처한 틈을 타서, 회북의 큰 영토를 빼앗아서, 북위의 국경선을 넓혀 회하일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내부를 개혁하여, 한인왕조의 예의제도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자잘한 개혁은 아프지도 않고, 당연히 그다지 큰 작용을 하지도 못하며, 유효하게 목적을 이루기 힘들다. 그러나, 대규모의 개혁은 반드시 기득권자와 완고하게 선비의 옛풍속을 고집하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닥치게 된다. 그리하여, 풍태후는 과감하게 정적들을 제거해나갔고, 그들을 죽이거나, 파면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 후에 그녀는 풍씨가족구성원에 의지하여, 환관과 한족관리를 중용하고, 선비원로를 끌어들여, 자신의 곁에 믿을만한 심복을 배양했으며, 권력을 공고히 하고, 개혁을 강화했다.

 

풍태후의 일련의 개혁조치중에서, 영향이 가장 큰 것이라면 봉록제(俸祿制)를 추진한 것이다.

 

유목민족이 남하한 목적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왕왕 "처음에 올 때는 말 한마리에 채찍 뿐이었는데, 돌아갈 때는 마차만 백량이다"라는 말을 했다. 씨족수령은 병사들이 더욱 용감하게 전투를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전리품은 개인에게 귀속시켜주고, 논공행상을 통해서 상을 내렸다. 이러한 정책은 병사들에게 전투의욕을 북돋워 주었다. 사람들마다 용감하게 싸우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뒤로 물러서거나 배반하거나 도망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그리하여 전투력이 아주 높아졌다. 선비 탁발씨가 북위를 건립한 후, 과거의 유습을 남겨두었다. 그러다보니 백관에 녹봉이 없었다. 수입은 주로 노략질과 하사품이었다. 북방을 통일하고, 전쟁과 약탈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관리들은 공개적으로 부패하고 백성들로부터 돈을 긁어모았다. 북위의 관료사회가 부패하고, 재정이 결핍되고, 국가기구는 엄중하게 썩어들어갔다. 선비귀족도 향락에 물들어갔다. 옛날의 용감하고 전투적인 기풍은 점차 소실되었다. 역대황제는 이에 불안감을 느꼈다. 여러번 불법을 저지르는 관리들을 처벌했지만, 근본적으로 관리부패라는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484년, 효문제는 명을 내려 봉록제를 시행한다. 봉록은 매3개월에 1번씩 내린다. 매년 10월부터 기산한다. 동시에 탐관오리에게는 엄격한 처벌규정도 둔다: "녹봉을 받은 다음에도 부패를 계속하여 1필에 이르면 죽인다"

 

봉록제를 추진한 후, 북위의 중앙집권과 봉건화과정은 가속화된다. 이는 확실히 관리의 일상생황에 보장을 주었고, 탐관오리를 막는데 효과를 나타냈다. 이는 효문제개혁의 전주일 분아니라, 북위가 유목노예제정권의 잔재를 벗어버리고, 한족관료정치체제를 받아들인다는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바로 녹봉제를 시행한지 1년만에 확실한 효과를 거두자, 북위는 다시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하나의 개혁을 시행한다. 바로 균전제(均田制)이다. 즉 국가의 명의로 토지를 분배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호족세력의 토지소유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그들의 수중에서 많은 노동력을 빼앗아 왔다. 농민에게는 자기의 것인 토지를 나누어주고, 국가는 재정수입을 확보받았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땅을 줌으로써 많은 농민들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생산이 회복되고,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는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균전제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토지개혁이다. 북위, 북제, 북주, 수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 난다. 이 제도는 고대에 300년간 지속되고, 일본, 한국등 주변국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혁은 표면적으로는 효문제 탁발굉의 명의로 반포되고 시행되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풍태후가 한 것이다.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풍태후이다.

 

효문제가 날로 자람에 따라, 그와 풍태후의 관계도 날로 미묘하고 복잡해졌다. 문제의 관건은 결국 하나이다. 권력. 봉건제도의 최고통치자로서 권력이 모든 것이다. 심지어 생명보다 중요하다. 풍태후는 권력욕이 아주 강했다. 그리고 시기심이 강하였다. 그녀는 하루하루 커가는 효문제가 '총명'해지는 것을 보고는 장래에 통제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고, 풍씨에 불리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황제를 폐위시킬 생각도 품었다. 그녀는 탁발굉을 방안에 가두어놓고, 삼일동안 식사를 넣어주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때는 한겨울 음력12월이었다. 탁발굉은 홑옷만을 입고 있었다. 풍태후는 대신을 불러서 논의했다. 함양왕인 희(禧)를 새황제로 올리면 어떨것인지를 논의했는데, 적지 않은 원로대신이 격렬하게 반대해서 할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내관으로 하여금 효문제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매 10일마다 한번씩 보고하게 하였다. 환관은 효문제의 잘못을 밀고했다. 그러면, 풍태후는 대노해서 바로 탁발굉에게 전해지고, 곤장을 십여대 얻어맞았다. 효문제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탁발굉은 천성이 총명하고 참을성이 있었다. 그의 부친처럼 혈기방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풍태후와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풍태후의 성격으로 봐서, 아무리 신하들이 간하더라도 북위의 황제자리에서 쫓아내 버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