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효문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II)

by 중은우시 2008. 9. 3.

486년, 효문제의 나이가 만 20세가 되었다. 이미 성인이 된 것이다. 정리나 상황으로 보아, 풍태후가 계속하여 임조칭제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부득이 권력을 척발굉에게 넘겨준다. 그리하여, 황제는 비로소 곤룡포와 면류관을 하고 친히 자신이 조서를 쓰게 되는 것이다.

 

탁발굉이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풍태후는 완전히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효문제였다. 탁발굉이 황제로 있던 28년간을 권력을 중심으로 나누어보면 3단계이다: 제1단계는 5살에 등극해서 20살때 친정할 때까지로, 이때의 대권은 완전히 풍태후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제2단계는 20세에 친정을 시작해서 24세에 풍태후가 죽을 때까지로, 이때의 대권은 그와 풍태후가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제3단계는 24세에 풍태후가 죽은 이후 33세에 그가 죽을 때까지로, 이때는 그 혼자서 권력을 장악했고, 그는 대담하게 대규모 전반적인 한화개혁을 추진하였다. 엄격하게 말하면, 효문제가 진정으로 북위의 대권을 장악한 기간은 팔, 구년에 불과하다. 다만, 봉건황제의 지위에 어려서부터 있었으므로, 신하들과 백성들의 마음 속에 무상의 위엄과 이미지가 심어져 있었으므로, 일단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일대영주의 모습을 드러냈다.

 

풍태후는 490년에 죽는다. 향년 49세이다. 풍태후가 죽은 후, 탁발굉은 아주 비통해 하며 5일간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하루 세끼를 작은 그릇으로 쌀죽 한그릇만을 먹었을 뿐이다. 상복도 계속 벗지 않았다. 풍태후가 유언으로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라고 했지만, 그는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고대의 예법에 따라 3년간 수효(守孝)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비록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쳐 3년 수효는 흐지부지 되기는 했지만.

 

효문제가 풍태후의 장례에 이렇게 신경쓴 것은 몇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는 확실히 풍태후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비록 풍태후가 그를 질책하고, 폐위하려고까지 하기는 했지만, 길러준 은혜, 가르쳐준 은혜, 황제에 앉혀준 은혜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효문제는 장례의 형식을 통하여, 한족의 봉건예의문화 총효인의를 몸소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셋째는 그는 이를 통하여 문무대신들에게 자신의 의사, 즉 풍태후의 개혁정책을 철저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자 했다.

 

일인극

 

척발굉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했던 첫번째 일은 북위의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그는 대대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의 내용은 우리가 한 단어로 개괄할 수 있다: 전반한화(全盤漢化). 낙양으로 천도한 것은 그가 전면적으로 한화하겠다는 결심을 표명한 것이고, 그가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전환점과 표지가 되었다.

 

선비 탁발부락은 멀리 변경지방에서 발원하였다. 그들은 원래 인구가 적었다. 넓다란 중원에 들어온 후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약탈만 하려고 한다면, 한바탕 약탈을 벌인 후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과거의 야만적인 유목생활과 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원에 장기적으로 자리잡고, 생활하려면, 할 수 없이 조정해야만 했다. 과거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유목생활을 농경생활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선비 척발부가 남하하면서 이미 천도했던 역사가 있다.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가 북위를 건립할 때의 수도는 성락(盛樂, 지금의 내몽고 허린가르 북쪽)이었는데, 나중에 398년에 평성으로 천도했다. 즉, 평성도 북위통치자의 천도의 산물인 것이다. 만일 현재의 영토와 통치에 만족한다면, 평성이 선비족들에게는 이상적인 수도이다. 그러나, 형세의 발전에 따라, 북방의 유연과 고창의 위협은 이미 해소되었고, 남방으로 영토를 계속 확대하고 있었다. 웅재대략을 지닌 효문제 척발굉으로서는 북위의 전략목표를 '남조의 제나라를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한다"로 명확히 하였다. 평성은 황토고원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날씨가 춥고, 토지가 척박하며, 교통이 불편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략목표를 수행하는데에는 부적합했다. 가장 주요한 점은 이곳의 선비귀족들 중에서, 사상이 보수적이고, 생활이 부패하며, 옛 선비의 습속을 고집하는 개혁에 반대하는 완고한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볼 때, 선비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개혁해야 했다. 개혁의 관건은 평성을 떠나는 것이고, 중원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척발굉은 비교형량한 후에 눈을 고대에 천하의 가운데였고 기후가 비교적 온화한 낙양으로 돌렸다. 그가 낙양을 중시한 것은 아마도 이곳에 한족사대부가 많이 살았고 한족의 문화중심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외에 낙양은 남조와도 근접해 있어, 수시로 병력을 동원하기 좋았다. 남조를 무너뜨리고 천하통일하려는 웅심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보수세력의 본거지를 벗어나야만, 순조롭게 전반한화의 개혁방침이 성공할 수 있다.

 

탁발굉은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낙양천도문제를 급작스럽게 꺼내다가는 반드시 선비귀족들의 강렬한 반대에 부닥칠 것이라는 것을. 남천은 그들의 현재 가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미 습관화된 생존환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말타고 활쏘는 유목생활의 장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지 않은 선비귀족들은 북위의 천하는 평성을 거점으로 하여 하나하나 말등에서 싸워 얻은 것이다. 만일 평성을 벗어난다면, 용감하게 전투하는 민족정신이 상실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한족은 통치하기 어려울 뿐아니라, 거꾸로 그들에게 동화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선비족들은 탁발굉처럼 어려서부터 한문화에 접촉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문화에 대하여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별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탁발굉의 마음처럼 그다지 긴박감이나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한족을 더욱 압박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며, 즐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므로, 탁발굉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방사람들은 근본을 그리워한다. 갑자기 옮긴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천도를 강행한다면, 잘안될 수도 있다. 아마도 수습하기 어려운 내란에 처할 수도 있었다. 순조롭게 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탁발굉은 심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생각해본 다음에, 상당히 교묘한 방책을 하나 내놓는다.

 

493년 오월, 효문제는 신하를 소집하여, 남으로 제나라를 토벌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태상경 왕담으로 하여금 남조를 토벌하는 것에 대한 길흉을 묻는다. 결과는 "혁(革)"괘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척발굉은 큰 소리로 말하였다: "탕무혁명은 하늘에 따르면 사람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어서 효문제는 자기의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집행한다.

 

493년 칠월, 효문제는 친히 30만 보병,기병을 이끌고 평성에서 출발하여 제나라를 치러 남하한다. 날씨는 계속 좋지 않았다. 큰 비가 그치질 않았다. 도로는 진흙탕이었고,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음울한 하늘은 쇠솥처럼 머리위를 뒤덮고 사람을 숨도 쉬기 힘들게 내리 눌렀다. 이리하여 평소에 편안하게 지내던 선비귀족들은 피곤함이 배가되었다.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1달여를 간 다음에, 겨우겨우 낙양에 도착한다. 낙양에서 잠시 쉬어가리고 한다. 척발굉은 일부러 폭우가 내리는 날씨를 골라서 떠난 것이다. 대군을 계속 이끌고 남하하려한다는 말을 듣자, 선비귀족들은 모두 놀라서 하나같이 탁발굉의 말 앞에 무릎을 꿇고 더 이상 남진하지 말도록 간청했다. 효문제는 시기가 되었다고 보고, 교환조건을 제시한다. "만일 더 이상 남진하지 않는 것은 좋다. 그렇다면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그 후에 사람들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하였다. 천도를 원하는 자는 왼쪽, 동의하지 않는 자는 오른쪽. 그의 말에 모두 왼쪽으로 자리잡았다. 오른쪽에 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명 되지 않았다. 왼쪽의 선비귀족, 문무대신은 모두 무릎을 꿇고 방아깨비처럼 머리를 내리찧으면서, '만세'를 외쳤다. 탁발굉은 그 모습을 보고는 정식으로 천하에 선포한다: 북위는 낙양으로 천도한다.

 

이 중대한 결정은 이처럼 그 혼자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면서 일인극으로 완성되었다. 평성에 남아 있던 선비귀족은 마음 속으로 불만이었다. 그러나, 대군을 탁발굉에 데려간 후이므로 반항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93년 시월, 효문제는 낙양에 건물을 짓도록 명한다. 다음 해 삼월, 그는 평성으로 돌아가서, 다시 선비귀족과 문무대신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쓰는 설득공작을 벌인다. 그리고 남으로 내려갈 인원과 평성에 남을 인원을 정리하고, 차례차례 천도를 진행한다.

 

495년 구월, 평성의 문무백관 및 후궁이 낙양으로 옮기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효문제의 한화개혁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인 3년에 걸친 천도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