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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효문제)

북위 효문제 : 홧병으로 죽은 황제

by 중은우시 2008. 1. 14.

작자: 미상

 

사람들은 중국이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이 넓고 없는 물건이 없다)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각종 특산물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황제만 하더라도 앞뒤로 모두 300여명이니 세계에서 황제를 가장 많이 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황제가 많다보니 죽은 방식도 가지각색이다. 굶어죽은 사람도 있고, 약을 잘못먹은 사람도 있고, 마누라에게 이불로 질식당해 죽은 경우도 있다. 더욱 재수없는 경우는 바로 바람난 마누라때문에 화가 나서 죽은 경우이다. 이에 해당하는 황제로 말하자면 소년시절에 영명하기로 이름난 황제였다. 그는 바로 선비족에서 한화(漢化)를 이룬 북위의 효문제 탁발굉(拓拔宏)이다.

 

효문제는 일생동안 둔 황후는 모두 성이 풍(馮)이며, 모두 문성제의 황후인 풍태후의 조카딸들이다. 첫번째 황후는 풍원(馮媛)이라고 한다. 원래 그녀는 황후자리에 잘 앉아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한가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는 한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경위는 이렇다. 490년, 태화14년 9월, 북위의 정권을 25년간이나 장악하고 있던 철의 여인 풍태후가 병으로 죽었다. 이해에 효문제는 나이가 23세이고, 그는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첫째, 낙양으로 천도하고(대동에서), 둘째, 호복을 금지하고, 셋째, 한어를 쓰게 하며, 넷째, 태자의 모친을 죽이지 않도록 한다. 그는 앞장서서 자기의 성을 원(元)씨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족의 관복을 만들어 덕망이 높았던 황숙조(황제의 작은 할아버지) 탁발휴(拓拔休)에게 바쳤다. 그리고 천하에 "30세이상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되, 30세이하는 모두 한어를 배우고 백성과 관리는 모두 한족의 의관을 입어야 하며 예외는 없다. 따르지 않으면 일률적으로 중벌에 처한다. 조정관리가 위반하면 녹봉을 깍는다" 그러나, 황후인 풍원은 한어로 말하기를 거절했다. 태화20년 7월, 효문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요광사(瑤光寺)로 보낸다.

 

구황후를 폐한 후에, 효문제는 바로 다른 여인을 물색한다. 바로 풍윤(馮潤)이다. <<우서. 효문유황후풍씨전>>에 따르면, 풍윤은 풍태후의 오빠인 풍희(馮熙)의 딸이며, 아명은 묘련(妙蓮)이고, 아주 예쁘게 생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효문제 탁발굉의 총애를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아끼며 떨어지지 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풍윤이 우피선(牛皮癬)과 비슷한 피부병을 앓게 되었다. 문명태후는 황제에게 전염시킬 것이 우려되어, 풍윤을 집으로 돌려보내서 여승이 되게 한다. 효문제는 그래도 풍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태후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출궁한 후, 효문제는 문명태후의 뜻에 따라 풍윤의 여동생인 풍청(馮淸)을 황후로 삼는다. 그래도 효문제는 풍윤을 잊지 못했다. 1년여가 지난 후 문명태후가 병사하자, 효문제는 3년간 수효(守孝)한다. 그는 자주 풍윤을 잊지 못하고 그녀의 근황을 알아보았다. 풍윤의 피부병이 모두 나았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환관인 쌍삼념(雙三念)을 통해 글을 보내 위로한다. 그리고 그녀를 낙양의 궁중으로 데려온다. 풍윤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아서, 그녀를 좌소의(左昭儀)에 봉한다. 그후 그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동생 풍청도 내쫓아버리고 스스로 황후가 된다. 그리고 고미인도 독살하고 그녀의 아들을 자기가 데려와 기른다.

 

애정은 홍수와 같다. 잘 통제하면 매년 이득을 보지만, 잘 통제하지 못하면, 재난이 벌어진다. 효문제는 정치적으로는 아주 영명한 군주임에도, 애정에 있어서는 바보였다. 그는 너무 치정적이었다. 그는 꿈에도 그가 사랑하는 풍윤이, 요양기간동안에 적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시종과 사랑에 빠져 사통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풍윤이 황후가 된 후의 몇년동안 효문제는 자주 병사를 이끌고 남으로 제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 궁중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풍윤은 옛버릇이 다시 도져서, 내조관원인 고보살과 사통하기 시작한다. 이 고보살은 용모도 당당하고 신체도 강건한 자로, 거세를 하지 않은 채 후궁에 들어온 가짜환관이었다. 풍윤은 그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효문제가 여남에서 병이 들었는데, 풍씨는 공공연히 고보살과 궁중에서 놀아났다. 중상시 쌍몽등을 끌어들여 심복으로 삼고 그들 당파사람들을 심었다. 종이로는 불을 싸두지 못한다. 풍윤과 고보살의 통간은 효문제에게 들키게 된다. 팽성공주가 그 사실을 효문제에게 알린 것이다. 팽성공주는 북위의 궁중여인들중에서 유명한 미인이다. 나이가 젊어서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었는데, 풍윤의 남동생인 북평공 풍숙이 그녀를 얻고 싶어했다. 그러나 팽성공주는 그를 싫어했다. 풍윤은 동생으로 하여금 강제로 팽성공주를 취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팽성공주는 몰래 십여명의 시종을 데리고 전선의 황제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한다. 동시에 풍윤의 음란한 행위도 고발한다. 풍윤은 공주가 효문제에게 달려간 것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두려웠고, 좌불안석이었다. 그리하여 모친 상씨(常氏)와 협의하였고, 상씨는 무당을 불러 법술을 행해서 효문제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저주한다.

 

이 일은 다시 소황문 소흥수에 의하여 효문제에게 보고된다. 효문제는 낙양에 돌아온 후, 고보살, 쌍몽등 6명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사실의 경위를 모두 파악했다. 그는 단장의 슬픔을 느꼈고, 상심하였는데다가 과로가 겹쳐서 바로 병석에 눕는다. 그날 밤, 효문제는 함온실이 누워서, 사람들에게 고보살등을 모두 문앞에 일렬로 무릎꿇게 하고, 다시 풍씨를 불러온다. 그는 환관으로 하여금 풍윤의 몸을 수색하게 하며, 만일 단도가 발견되면 즉시 죽이라고 한다. 풍윤은 통곡을 하며 죄를 인정하고 살려달라고 매달린다. 효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팽성, 북해의 두 왕을 불러, "황후가 실덕하였으나, 스스로 그녀를 폐할 수는 없다. 풍태후가 구천에서 실망할까 두렵다. 풍씨 혼자 궁중에 남아있게 하라. 만일 그녀가 스스로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죽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은 효문제는 몸이 계속 나빠져서 결국 남정도중에 병사한다. 임종전에 그는 팽성왕에게 밀지를 보내서, "내가 죽은 후, 아무도 황후를 통제하지 못할 것이 걱정된다. 너희는 나의 유언을 이용해서 그녀를 죽여라. 다만 여전히 황후의 예로 장례를 지내고, 풍씨집안의 명예에 손상가지 않도록 하라" 효문제가 죽은 후, 팽성왕, 북해왕은 황제의 유언에 따라 풍윤에게 약을 먹여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