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이 말은 전혀 틀리지 않는다. 위진남북조시대는 바로 대난세였다. 당연히 영웅이 배출되었다. 사람들은 위오촉(魏吳蜀)의 삼국정립(전삼국)은 잘 알지만, 주제진(周齊陳)의 삼분천하(후삼국)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는 간략히 후삼국의 역사를 기술해보기로 한다.
위오촉의 삼국통일의 결과는 진나라가 잠시 통일한 후 다시 대분열의 시대로 들어가는데, 300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수나라가 통일을 이루게 된다. 수나라는 바로 주제진의 삼국통일의 결과이다. 두개의 삼국시대는 난세의 시작과 종결이 역사에서 하나의 기관(奇觀)이라고 할 것이다. 남북문화교류에서 호한혈연융합까지, 휘황한 수당성세를 이끌어내는 전초가 된다. 주제진의 삼국을 연구하는 것은 위오촉의 삼국역사를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후삼국의 이야기는 전삼국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전삼국은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진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184년에서 280년까지 모두 96년간이다.
후삼국은 육진기의(六鎭起義)부터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523년에서 589년까지 모두 66년간이다.
후삼국의 역사는 비록 짧지만, 그 과정과 민족갈등은 전삼국보다 훨씬 복잡다단했다.
후삼국은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동위(東魏), 서위(西魏), 남량(南梁)의 삼국정립이다.
제2단계는 북제(北齊, 동위를 대체), 북주(北周, 서위를 대체), 남진(南陳, 남량을 대체)의 삼국병존이다.
최후로 북주가 북제를 멸하고 북주를 수가 대체한 후, 수가 남진을 멸망시킴으로써 끝난다. 이는 전삼국이 위가 촉을 멸한 후, 진이 위를 대체하고, 진이 오를 멸망시킨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 역사는 놀랍도록 반복된다.
후삼국의 역정은 아주 복잡하다. 먼저 북위와 남량이 남북대치를 이룬다. 그 후 북위에 대란이 일어나서 동위(고환이 장악)와 서위(우문태가 장악)로 분열된다. 후경의 난은 삼방의 역량대비를 무너뜨린다. 북제가 동위를 대체하고(고씨가 황제), 북주가 서위를 대체한다(우문씨가 황제). 남진은 남량을 대체한다(진패선이 황제). 그 동안의 곡절은 이루 다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서위의 사맹수는 두 사람은 무천(武川)군단에서 나오고, 두명은 관농(關隴)집단에서 나온다. 이는 서위와 북주가 생존과 발전의 핵심이었던 양대지주집단이다. 그중 무천군단에서는 많은 놀라운 인물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북주태조황제, 수조태조황제, 당조태조황제, 주수당삼조의 외척인 독고신, 북위의 저명한 군사명장 하발윤, 하발승, 하발악 삼형제까지...가위 영웅이 속출하였고, 왕후장상에 씨가 있느냐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배경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북위사맹수를 소개하기로 하자. 남조는 문화가 발달하였지만, 북조는 무공이 성행했다. 여기의 4명은 모두 무장이다.
이호(李虎) 장군
이호는 대북무천(代北武川, 북위 육진의 하나, 지금의 내몽고 무천현) 사람이다. 어려서는 풍류를 즐기고 놀이를 좋아했으나, 꿈은 컸다. 독서는 좋아했지만, 장구를 외우는 것은 싫어했다. 말을 타고 활쏘는 것을 즐겼으며, 널리 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집안환경이 괜찮은 편이어서, 재물에 인색하지 않았고, 잘 베풀었다. 나중에 고형의 선배이면서 대도독인 하발악의 수하로 일하면서 중용된다. 하발악을 따라 원호(남양의 장군 진경지가 호송하여 낙양으로 데려간 북위황족)를 토벌하여 승리를 거둔다. 이호는 전공을 세워 영삭장군, 둔기교위가 된다. 나중에 하발악을 따라 관중(섬서, 감숙일대)으로 들어가서 반란을 제압한다. 하발악은 반란진압의 공로로 관서대행태(관서지구 최고행정장관)와 관서대도독(관서지구 최고군사장관)이 된다.
이호도 함께 승진하여 좌상대도독, 총관내외군사(개략 참모장과 비슷한 지위)가 된다. 지위가 빨리 올랐다. 이때 관동지구(하북, 하남, 산서일대)는 이미 효웅 고환이 장악하고 있었다. 고환은 하발악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정치적인 수완을 사용하여, 명의상으로는 하발악과 의형제를 맺었지만(두 사람은 모두 북위의 천주대장군 이주영-爾朱榮-의 수하 맹장이었다), 암중으로는 관서의 또 다른 군사세력인 후막진열(侯莫陳悅)로 하여금 군사회의를 개최하는 틈을 타서 하발악을 죽이게 한다. 하발악이 죽자, 부하들은 우두머리를 잃어 졸지에 접시위의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후막진열은 하발악을 해친 후 스스로 겁을 먹고, 이 군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실력인지 가늠하지를 못하여 감히 자신이 재편하여 차지하지를 못한다.
이호는 아직 어려서 하발악을 잃고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해 한다. 다행히 나이가 많은 장군인 우도독 구락(寇洛)이 정신을 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장수들을 끌어모아서, 평량에 주둔시킨다. 그런데, 이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혹시 이호는 관건적인 때 도망을 친 것일까? 원래 이호는 하발악이 해를 입는 것을 보고는 비분강개하여,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반드시 하발악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새도 머리가 없으면 날지 못한다고, 명망이 있는 사람이 이끌지 않으면 인심이 흩어져서 복수는 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형주로 가서 하발악의 형이자 형주자사인 하발승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국면을 수습하도록 요청하였다. 하발승도 명장이고, 당토 이주영에게 의탁할 때, 이주영은 아주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하발 형제를 얻다니, 천하를 평정하는데 충분하겠다" 이주영이 어떤 사람인가? 북위말년에 가장 명망이 있던 장군이었다. 고환도 그의 아래에서는 응견(鷹犬)처럼 처분을 기다리는 입장이었고, 한마디 원망도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가 하발형제를 이렇게 중용하였다는데서, 하발형제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허명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호가 비바람을 맞으면서 형주로 가서 하발승을 만났는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발승은 망설이며 결정을 못내리는 것이다. 어쨌든 형주도 군사요지이고, 가볍게 떠나면 허점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자를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자기의 수하인 독고신(역시 무천 사람)을 관중으로 보내어 하발악의 군대를 수습하게 한다. 독고신도 무명지배는 아니었다. 별호가 '독고랑'이었고 잘생기고 멋진 젊은 장수였다. 문이면 문, 무이면 무,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하발승에 비하면 무게감이 적었다. 이때 또 다른 몇 갈래의 세력이 평량으로 진격했고, 이 부대를 흡수하고자 했다. 하나는 북위황제가 파견한 사신 원비장군이다. 하나는 고환이 파견한 후경장군이다. 또 하나는 하주(통만성)자사 우문태 장군(무천 사람, 하발악의 심복부하, 하발악의 부대에 의하여 새로운 우두머리로 추대됨)이다. 이 몇 갈래의 인마는 밤낮을 달려 평량으로 갔다. 누가 속도가 빠르냐에 따라 누가 선기를 잡느냐가 결정된다. 어쨌든 하주가 거리가 가까웠고, 우문태의 행동은 매우 신속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평량에 도착할 때쯤에 후경을 만난다. 두 부대는 일시 대치한다. 우문태의 반응이 빨랐다.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말했다: "하발공이 비록 죽었지만, 나 우문태가 있다. 너는 여기에 와서 뭐하는 거냐?"(의미는 여기는 네가 깔짝거릴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경은 놀라서 얼굴색이 변한다. 변명하여 말하기를: "저는 화살과 같이 다른 사람이 어디로 쏘면 거기로 가는 겁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 뜻은 나는 원래 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되자, 후경은 물러난다. 우문태는 급히 평량으로 가서 여러 장수를 만나고, 하발악을 떠올리며, 대성통곡을 한다. 여러 장수들이 당연히 감동하여,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우문공이 오셨으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문태는 바로 그자리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대사를 도모한다. 오래지 않아, 황제가 파견한 사신인 원비장군도 도착한다. 이미 벌어진 상황을 보고는 그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독고신이 평량에 도착해보니 흑달(黑獺, 우문태의 자)이 이미 후계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기뻐한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단짝친구였다. 당연히 무슨 지휘권을 놓고 다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문태는 독고신을 낙양에 파견하여 황제를 접견하게 한다.
다시 이호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형주에서 우문태가 지휘관이 되었고, 바로 후막진열을 토벌하여 하발악의 복수를 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신을 차려 급히 관중으로 간다. 생각도 못하게 중도에 고환의 부대에 붙잡혀서 낙양으로 보내어진다. 황제는 이호를 보고 매우 기뻐한다. 원래 황제는 고환과 일찌감치 사이가 좋지 않았고, 항상 고환에 대항할 세력을 구하고 있었다. 이때 우문태의 이 세력을 보니 당연히 기뻤다. 그리하여 이호에게 관작을 내려, 위장군(衛將軍)으로 봉한다. 그리고 다시 관중으로 보내어 우문태를 돕게 한다. 이호는 화가 복이 되었으니, 황제에게 감격하고, 이후 황실에 매우 충성한다. 이후의 전투에서, 이호는 계속 공을 세운다. 후막진열을 토벌하고, 황제를 관중으로 모셔오고, 영주자사 조니를 수몰시키고, 양기정, 양분생의 난을 평정한다. 특히 양분생의 난을 평정하는데 이호는 그의 모략을 발휘한다. 양분생은 원래 남기주의 병졸이었는데, 사람을 모아서 모반한 것이었다. 이호가 군대를 몰고 가니, 양분생은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하였다. 이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삼군에 명을 내려, '적이 이미 투항했으니 갑옷을 풀고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라. 우리는 곧 회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후에 사자를 양분생에게 보내어 투항에 동의한다는 말을 전하게 한다. 양분생은 자기의 술수가 통했다고 보고, 경계를 늦추고, 대부대를 보내어 식량과 풀을 모았다. 이호는 이 기회를 틈타 야간에 급습한다. 남기주를 철통처럼 포위하니, 성안의 사람은 적었고, 밖으로 양식을 구하러간 병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이 급작스럽게 벌어지고 의표를 찔리게 되니, 양분생의 부대는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이호가 장병들에게 명하여 성문을 열게하고, 대군이 입성하니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양분생은 속수무책으로 생포된다. 이호는 군대를 이끌고 회군한다. 우문태도 이를 들은 후에 탄복했다. 그리고 이호의 부대에 큰 상을 내렸다.
이호를 맹수라 부르는 이유는 이호가 표범을 잡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호는 자주 우문태를 따라 북산아래에서 군대를 검열하였는데, 자주 사람들이 그 곳의 표범에게 잡아먹혔다. 아무도 구해주려고 생각지를 못했다. 한번은 표범이 또 사람을 물었는데, 이호를 만났다. 그는 즉시 몽둥이를 들고 따라가서, 표범을 붙잡아 죽여버렸다. 우문태는 이를 듣고 크게 칭찬했다. '공의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다'
이호의 관직은 갈수록 커졌다. 나중에는 태위(太尉, 삼공의 하나)에 이른다. 우문태의 아들이 북주왕조를 건립할 때, 이호는 이미 죽었지만, 역시 개국제일공신으로 열거되었고, 당국공(唐國公)에 추존되었다. 그의 아들은 북주의 표기대장군 이병(李昞, 독고신의 딸을 처로 삼음)이다. 그의 손자가 바로 당나라의 개국황제 이연(李淵)이고, 그의 증손자가 바로 대명이 자자한 당태종 이세민이다. 그 자신도 괜찮았다. 당나라가 개국된 후에 태조황제로 추존된다. 이호는 서위의 여덟명의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의 하나이기도 하다. 당나라에서 편찬한 사서에 의하면, '오늘 날 문벌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모두 팔주국을 든다. 당시의 번영함은 비할 곳이 없었다" 이 팔주국의 명성은 1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대단했던 것같다.
양충(楊忠) 장군
양충은 수나라 태조황제(추존)이다. 수문제 양견의 부친이고, 서위 부병 십이대장군의 하나이다. 대북무천사람이며, 어릴 때 이름은 노노(奴奴)였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모두 북위의 장군이다. 소년 양충은 원래 유복한 생활을 지냈다. 그러나, 북위말년에 육진기의가 일어나면서 이 어린 노노의 인생은 철저히 바뀌게 된다. 그는 집떠난 고통을 느껴야 했고, 나라를 떠나는 아픔도 느껴야 했다. 부친인 양정(楊楨)은 북위의 건원장군이었다. 반적인 선우수례(회삭진병)를 토벌하다가 전장터에서 전사한다. 양충은 난민을 따라 흘러다니게 되고, 산동태산까지 흘러간다. 비록 이러했지만, 생활은 안정되지 않았다. 남량에서 북위를 공격하여 양충이 있던 지역을 점령했다. 양충은 다시 포로로 붙잡혀 강남으로 간다. 한번 끌려가서는 5년간 있게 된다.
남조의 풍경이 이 젊은 양충에게 얼마나 마음을 움직이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던 양나라에 머물던 북위황족인 원호가 양나라 진경지장군의 호송하에 낙양까지 되돌아갈 때, 양충은 직각장군의 신분으로(원호에게 임명됨) 원호의 부대에 끼어있었다. 원호는 원래 북해왕이었는데, 북위의 권신인 천주대장군 이주영과 알력이 생겨, 아예 양나라에 귀순했던 것이다. 양무제는 그를 쓸모있다고 보고, 그를 도와 또 다른 위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병력을 보내어 그를 호송해서 낙양까지 보낸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북위정권과 정권을 다투게 했다. 양충은 그를 따라 이주영군대와의 전투에 가담한다. 그와 교전한 적수중에는 미래의 동료들도 있다(서위의 장령들은 대부분 이주영의 부하였다). 원호의 좋은 날은 길지 못했다. 황제를 한지 얼마되지 않아, 이주영에게 격패당하고, 원호는 도망가다가 죽고 만다. 진경지는 삭발하여 중이 되고 강남으로 돌아간다. 양추은 북위군대의 포로가 된다. 이주영의 동족형제인 이주도율(爾朱度律)은 양충의 체격이 건장하고 용모가 뛰어나며, 무술이 절륜한 것을 보고는 장수의 재목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자기의 휘하에 받아들여 통군으로 삼는다.
양충은 이주도율의 군대에서 평생의 친구인 독고신(나중에 서로 사돈이 된다)을 만난다. 독고신은 일찌기 이주군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갈영을 격파하는 전투에서 독고신은 필마단창으로 출진하여 적장 원사주를 생포한 바 있다. 그리하여 이름을 날렸다. 여기에 사람이 잘생기고 옷도 잘입어서, 군대내에서 '독고랑'이라고 불리웠따. 양충은 독고신의 수하가 되어, 독고신을 따라 남북으로 다니면서 전투를 했다.
북위가 분열된 후에는 독고신을 따라 서위 진영에 가담한다. 고환이 통제하는 동위와 싸우게 된다. 서위의 초기에 관중은 사람은 적고 땅도 척박하여 아무래도 방어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반격하기에는 부족했다. 형주는 동위가 점령한다. 형주자사 하발승은 부득이 남하하여 양나라에 투항한다. 서위는 독고신에게 군대를 이끌고 형주를 회복하라고 명한다. 독고신은 양충, 강락아(康洛兒), 원장생(元長生)의 세 장군을 선봉으로 삼아 형주성을 급습한다. 세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성아래로 가서 성을 지키는 수비병사들에게 소리친다: "이제 우리의 대군이 도착했다. 성안에도 우리를 따르는 자들이 있으니, 너희가 살고 싶으면 빨리 도망쳐라". 수비군사들은 놀라서 흩어지고, 세 장군은 북을 울리면서 성으로 들어간다. 동위군은 놀라서, 아무도 저항하지 못한다. 동위의 자사 신찬은 참살된다. 형주가 다시 서위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전투는 계속되었다. 반년이 지난 후, 동위는 장군 고오조, 후경을 보내어 다시 형주를 공격한다. 고오조의 마삭(馬?)은 절세였고, 후경의 교활함은 유명했다. 둘 다 당시의 명장이었다. 독고신은 버티지 못하고, 양충과 함께 양나라로 투항한다. 형주는 다시 동위에게 넘어간다.
양충은 다시 강남으로 온 것이다. 여기서 3년을 지낸다. 양무제는 북조에서 귀순한 장군들을 환대했다. 대우가 아주 좋았다. 하발승, 독고신, 양충은 아주 감격한다. 서위 대통3년, 양무제는 하발승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 장군을 관중으로 보내주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친히 남원에서 환송회를 열어준다. 하발승은 이후, 매번 남쪽에서 날아오는 새를 보면 활로 쏘지를 않았다. 이로써 양무제의 은혜를 보답한 것이다. 세 장군이 서위의 수도 장안에 돌아온 후, 반국으로 처벌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관작이 올라가고 더욱 중용된다. 하발승의 관직은 태사(太師)에 이른다(삼공의 우두머리). 독고신은 표기대장군, 시중(侍中), 개부(開府)의 대우를 받는다. 양충도 뛰어난 주군을 만나니, 그가 바로 우문태이다. 우문태는 양충이 잘 생긴 것을 보고는 아주 좋아한다. 자기의 막하에 둔다. 양충은 이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여러번의 포로생활과 외국생활을 거쳐 양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는 심리적인 자질을 갖추었고, 이후의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다.
양충이 서위로 돌아간 후 우문태를 따라 용문으로 사냥을 나가곤 했다. 그는 혼자서 맹수를 잡을 수 있었다. 왼팔로 맹수의 허리를 붙들고, 오른 손으로 맹수의 혀를 뽑았다. 우문태는 그의 용감함에 감탄했다. 북조에는 맹수를 엄섬(掩贍)이라고 부르는데, 그리하여 양충의 자를 엄섬으로 하게 된다. 양충은 점차 승진하여 정서장군, 금자광록대부가 된다. 서위의 하교대전에서 양충은 다섯 장사와 다리를 지키는 책임을 맡는다. 적들은 그의 용감함을 보고는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 망산대전에서는 다시 한번 말한마리를 타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차기대장군, 도독삭연현위사주제군사, 삭주자사, 가시중,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에 오른다. 후경의 난으로 양무제를 죽게 하자, 남조의 역량이 약해 진다. 우문태는 이 기회에 강토를 늘이고자 한다. 양충을 도독삼형이양이광남용평신수강이영절십오주제군사로 삼아 양나라의 제흥군과 창주를 공격하여 빼앗게 한다. 양나라 옹주자사, 악양왕 소찰은 비록 서위에 투항하였지만, 여전히 딴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양충은 의병지계를 써서, 그가 번성에서 군사연습을 하며, 2천명의 기병으로 기치를 바꾸어 교체로 달려가게 한다. 소찰은 누각에 올라서 멀리 바라고보는 3만의 병사가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딴 마음을 먹지 못한다.
양나라는 강토를 잃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양나라의 사주자사 유중례는 군대를 이끌고 양양을 쳐들어오고, 부하 마유로 하여금 안륙성을 지키게 남겨둔다. 우문태는 알고난 후에 양충을 보내어 정벌하게 하여 수군을 점령하고, 안륙을 포위한다. 유중례가 이를 들은 후, 급히 안륙으로 회군한다. 양충의 수하장수들은 유중례가 돌아올까봐 걱정한다. 그러면 안륙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즉시 공성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양충은 분석한 후에, "적은 굳게 지키고 있으니 짧은 시간내에 함락시킬 수 없다. 우리 군대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니 그것은 좋은 방책이 아니다. 남쪽 사람들은 수전에 강하나 야전에는 약하니, 중례가 돌아와 안륙을 지원할 때, 우리가 중간에 급습한다면, 적들은 오는 길에 피로하고 우리군대는 사기가 중천이니, 이길 수 있다. 안륙은 그렇게 되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다른 성들도 마찬가지로 넘어올 것이다" 이는 바로 병가에서 자주 쓰는 "위성타원(圍城打援, 성을 포위한 후 지원군을 공격하는 것)"의 전략이다. 양충은 2천의 정예기병을 뽑아서 밤을 달려, 종두에서 유중례의 부대와 만난다. 양충은 앞장서서 싸워 유중례를 생포한다. 그리고 유중례의 부대를 모두 포로로 잡는다. 안륙의 수비장수인 마유는 유중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싸우지 않고 투항한다. 안륙은 바로 서위의 손에 들어왔다. 양충은 다시 수 성을 함락시키니 양나라의 한수이동의 땅을 모두 차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진류군공(陳留郡公)이 된다.
서위 공제 초년, 우문태는 다시 한번 대규모의 원정을 계획한다. 목표는 양원제 소강이 소재한 강릉이다. 강릉은 장강중상류에 있어 남쪽으로 장강, 북으로 한수를 두고 있어, 서로는 파촉을 남으로는 호남과 광동광서에 통하니, 지세가 험준한 요지이다. 물산은 풍부하고 문화도 뛰어나서 역대로 병가의 필쟁지지이다. 이번에 서위가 파견한 호화로운 진용은 주국대장군 우근(于謹)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중산공 우문호(우문태의 조카), 대장군 양충, 위효관, 표기대장군 왕걸등이 보좌하는 것이다. 병력이 5만인데, 직접 밀고 들어갔다. 이때 양나라의 정병맹장은 모두 장강 중하류에 있었고, 강릉은 비어 있었다. 소강은 황급히 건강의 부장 왕승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왕승변은 역시 명장이었다. 그는 위위구조(圍魏救趙)의 계책을 생각해 낸다. 서위군의 후로를 공격해서, 양식공급로를 차단하려 한 것이다. 아쉽게도 이 계획은 길이 너무 멀고, 강릉이 너무나 빨리 함락되는 바람에 성공적으로 시행되지 못한다.
우근은 신속하게 공격하여, 먼저 우문호와 양충으로 하여금 강진을 점거하게 한다. 이리하여 강릉과 양나라 동부와의 연락을 끊고, 지원군이 서쪽으로 오는 것을 막는다. 양나라는 긴칼을 코끼리의 코에 매달고 서위군을 향하여 뛰어들게 하엿지만, 양충이 활로 코끼리를 쏘니, 코끼리가 놀라서, 거꾸로 뛰어갔다. 우문호는 다시 무녕을 함락시키고 태수인 종균을 포로로 잡는다. 소강은 강릉성을 휘돌아가는 육십여리에 높은 목책(木柵)을 설치하게 하여, 서위군의 진격을 막으려고 한다. 이런 목책은 서위의 기병을 막는데 아주 유효했다. 서위는 보병을 보내어 목책을 넘어가고자 했는데, 목책안에서 방어하는 양나라군대가 긴창으로 위나라군을 살륙했다. 진공하던 위나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다. 우근은 왕걸에게 화살로 쏘도록 하는데, 목책내의 수비군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위나라군대는 기회를 틈타 다시 공격한다.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목책을 넘을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거둔다. 우근은 기뻐하면서 왕걸에게 말했다: "내 일을 크게 이루게 해준 것은 바로 공의 신전(神箭)이오" 왕걸은 전투를 용맹하게 하여 우문태로부터 "만인적(萬人敵)"이라는 별호를 받는다. 이번에 또 공을 세운다. 우근은 부하들에게 목책을 불태우게 하니, 목책안에 있던 수천의 민가도 함께 불탔다. 서위의 기병이 벌떼처럼 몰려들어가서 강릉성의 아래에 다다랐다. 서위군이 밤낮으로 공성하여, 양나라대장군 호승우가 전사한다. 그러자 성내의 사람들이 몰래 서문을 열어, 서위군의 입성을 돕는다. 소강과 태자 및 왕보, 주매신등 대신들은 보자성으로 도망쳐 있었는데, 대세가 기울었다고 보고, 고금도서 14만권을 불태우고,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려 한다. 좌우에서 말리자, 사람을 보내어 항복문서를 올리고,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우근은 사람을 보내어 소강에게 왜 책을 불태웠는지를 물어본다. 소강은 이렇게 답변한다: "책을 만권 읽었지만, 오늘의 화를 당했다. 책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나는 전부 불태운 것이다" 이 회답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책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는 책을 읽은 사람에 있는 것이다. 소강도 일대의 영명한 군주임에는 틀림없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무지하였으니 탄식할 만하다. 소강은 나중에 정적인 소찰에 의하여 흙포대에 눌려서 죽는다. 끝이 좋지 않았다. 우근은 강릉의 남녀 수만명을 장안으로 보낸다. 강릉은 빈 성이 된다. 이는 양나라가 후경의 난 이후에 또 한번의 겁난을 당한 것이다. 양나라의 천고풍화는 이로써 사라진다. 앞에는 양무제의 겁난이 있고, 뒤에는 양원재의 재난이 있다. 아마도 장강도 오열하지 않았을까?
북주왕조가 건립된 후, 양충은 군사요지 포판을 지킨다. 당시 북제왕조의 사마소난이 항복을 청한다. 양충과 대장군 달해무는 병사를 이끌고 나가서 맞이하였다. 북제의 경내로 5백리를 깊이 들어갔는데, 세번이나 사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달해무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회군을 건의한다. 양충은 그래도 "앞으로 전진하여 죽을 수는 있어도, 뒤로 물러나서 살 수는 없다"고 하며 기병을 이끌고 계속 전진한다. 마침내 사마소난을 맞이한다. 양충이 삼천기병을 이끌고 사마소난을 엄호하여 퇴각한다. 군대가 낙수이남에 이르렀을 때, 양충은 장병들에게 안장을 풀고 누워서 잠시 쉬게 한다. 북제의 병사가 낙수이북까지 쫓아왔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된다. 양충은 장병들을 위로하며, "겁낼 것없다. 마음 껏 먹어라. 적들은 감히 강을 건너와서 우리와 부딪치지 못할 것이다" 북제의 병사는 시험적으로 강을 건넜지만, 양충이 바로 몸을 일으켜 말을 타고 달려나가서 진공하려는 태세를 취하자, 북제의 병사들은 과연 덤벼들지 못했고, 천천히 물러갔다. 양충과 여러 장수들은 안전하게 귀환했다. 달해무는 알고난 후에 감탄했다: "달해무는 스스로 천하의 건아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탄복했습니다" 달해무는 일찌기 밤에 고환의 병영을 급습한 적이 있을 정도로 담이 큰 장수이다. 그러나 양충과 비교하자면 손색이 있었다.
북주 보정2년 조정은 돌궐과 함께 북제를 토벌하고자 한다. 여러 사람들은 북제가 나라가 부강하고, 거기에 대장 곡율명월(斛律明月, 즉 斛律光, 당시 落雕都督, 射雕手로 불리웠다)이 있어, 10만의 병력이 없이는 출병할 수 없다고 햇다. 오로지 양충만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대군의 승리는 인화에 있지 사람이 많음에 있지 않다. 1만의 기병이면 충분하다. 국률명월이라는 자가 있으면 어떠냐?" 보정3년, 양충은 원수로 임명되어, 양찬, 이목, 왕걸, 전홍, 모용연등 10여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북로로 북제를 치러간다. 다시 달해무에게는 마보군 3만을 이끌고 남로로 북제를 치도록 한다. 양군은 진양(산서태원)에서 회합하기로 되어 있었다. 양충은 고향 무천을 지나면서 선조에 제사지내고 장사들을 베불리 먹인다. 이후 북제의 20여개 군진을 함락시킨다. 보정4년 정월, 10만 돌궐군과 진양에서 회합하니 마침 눈보라가 칠 때였다. 북제는 모든 정예병사를 모아서 진공했다. 돌궐병사들은 무서워서 병사를 데리고 싸우려고 하지 안았다. 북주는 군사가 적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양충은 여러 사람의 사기를 돋구었다: "일은 천명에 따르는 것이지 사람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친히 700명을 이끌고 싸웠다. 절반이 죽었다. 달해무의 또 다른 부대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주나라군대는 할 수없이 퇴각한다. 이 해에 북주는 다시 북제를 토벌한다. 권신 우문호는 친히 낙양을 친다. 양충으로 하여금 옥야진에서 돌궐병을 맞이하도록 한다. 당시 군량이 이미 적어서,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다. 양충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는 계호의 수령들을 모아서, 암중으로 왕걸로 하여금 북을 울리며 오도록 시킨다. 그리고 양충은 모르는 척 무슨 일잉지 묻는다. 왕걸은 "대총재(우문호를 가리킴)가 이미 낙양을 평정했고, 천자가 듣기로 계호가 소동을 피운다고 하여 저를 보내어 당신을 도와 토벌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오래지 않아 돌궐사자가 와서 보고했다. 돌궐칸이라는 자가 이미 진양으로 들어왔는데, 현재 진나라병사 10만이 장성아래에 있다. 계호가 불복하면 토벌하고자 한다라고. 계호의 수령들은 놀라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표시하고, 양초를 모아서 군수물자로 쓰도록 해준다. 양충의 지모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번 북제벙벌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우문호는 낙양의 서쪽을 돌려받고, 양충도 병사를 되돌린다. 북주의 천화3년, 양충은 병이 들어 장안으로 돌아온다. 주무제와 우문호는 친히 양충의 집으로 병문안을 온다. 이를 보아도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오래지 않아 양충이 사망하니 향년 62세이다. 아들 양견이 수국공을 물려받는다.
양충은 외유내강형이고 충성스럽고 용감했다. 일생동안 고생은 다 겪으면서 마침내 사업을 이루었으니 후인의 귀감이 될 만하다.
왕비(王羆 )장군
왕비의 자는 웅비(熊羆)이다. 경조 패성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호족이었다. 왕비의 성격은 강직하고 굳강했다. 일처리는 공평하여, 백성들이 모두 존경했다. 북위 태위연간에 조정에서 왕비를 전중장군에 봉해서 옹주별가로 보냈다. 그는 임지에 부임한 후 정사를 청렴하게 하고, 공무에 근면했다. 그리하여 옹주자사 최량이 그를 아주 좋게 보았다. 나중에 최량이 정주자사로 전근가자 왕비를 장사로 추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양나라가 협석을 침범하여 최량이 도독이 되어 남쪽으로 토벌에 나설 때 다시 왕비를 장사로 요청한다. 조정은 최량이 여러차례 왕비를 추천하는 것을 보고는 쓸모가 있는가보다 생각하여 허락한다. 왕비는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정예부대를 이끌고 협석을 함락시켜 대공을 세운다. 남기주와 동익주의 강족, 저족이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이 흉맹하고 전투를 잘해서, 북위의 군대가 여러차례 나섰으나 진압하지 못했다. 조정은 왕비로 하여금 5천의 우림군을 데리고 양주를 지키도록 하고, 반란의 평정을 지휘하도록 한다. 그는 순조롭게 반란을 평정하여 우장군, 서하내사로 승진한다. 서하는 풍요한 땅이어서 모두 바라는 곳이었다. 그러나 왕비는 사양하고 받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에게 물었다: "서하는 지역도 넓고 봉록도 두터운데, 왜 가지 않는가?" 왕비는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데, 후세인들이 경계로 삼을 만했다. 그는 "현재 낙양의 좋은 목재가 모두 서하에서 난다. 내가만일 서하에 있으면 고관대작들이 주택을 지을 때 목재가 필요하면 반드시 나를 찾아서 처리하게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처리해주어야 하는데, 내 능력이 부족하여 백성들에게 부담하게 하면, 분명히 법률에 위반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안가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보면, 왕비는 아부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나중에 형주를 공격하자, 왕비는 병사를 이끌고 지원간다. 그리고 양나라군대를 대파한다. 그리하여 형주자사가 되는데, 현지의 백성을 잘 위무했다. 오래지 않아, 양나라는 수만의 군대를 보내어 다시 형주를 포위했다. 물길을 파서 성안으로 물을 들여보냈다. 위나라는 손실이 컸다. 이때 북위는 내란이 일어나서, 지원군은 기대할 수 없었따. 왕비는 장병들과 함께 죽을 끓여 먹으면서 동고동락했다. 매번 출전할 때마다 왕비는 결사의 정신을 다졌다. 갑옷을 입지 않고 크게 소리치며, "형주는 효문황제가 세운 곳이고, 하늘이 나라를 보우하지 않는다면, 내가 화살을 맞아 죽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반드시 적을 물리칠 것이다" 여러번의 악전고투에서 시종 화살을 맞지 않고, 이렇게 꼭 3년을 버텼다. 양나라군대가 마침내 물러난다. 왕비는 차기대장군, 경주자사로 승진하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북위분열의 정치적 사건이 벌어진다. 우문태는 관서를 끼고 앉아 방진에 격문을 보내어 고환을 토벌하자고 했다. 왕비는 우문태의 편에 서서 명을 받고 화주를 지킨다. 화주는 지세가 험준하여, 화산에 의지해있으니 동관 이후의 두번째 방어선이다. 우문태가 왕비를 보내어 지키게 한 것은 사람을 잘 골라쓴 것이다. 서위가 건립된 후, 왕비는 다시 표기대장군, 시중, 개부의 대우를 받는다. 왕비는 사병을 지휘하여 화주를 수리한다. 공사가 완료되지 않았으므로 야간에 휴식할 때는 사다리를 걷지 않았다. 누가알았으랴. 이때 고환이 장군 한궤, 사마자여를 보내어 군대를 이끌고 몰래 하동에서 화주를 급습했다. 왕비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밝았을 때는 이미 동위의 군대가 화주성에 다가와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왕비는 아직 자고 있었는데, 돌연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바로 몸을 일으켜, 손에 잡히는대로 나무몽둥이를 들고 산발한 채로 맨발로 뛰어나갔다. 적들이 고함치는 것을 보고는 "늙은 곰이 길에 누워 있는데, 승냥이가 어찌 지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소리쳤다. 동위의 군은 이 흉신악살과 같은 왕비를 보자 놀라서 동성문으로 물러난다. 왕비는 서위의 사병을 모아서, 함께 진격하니, 동위군이 버티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왕비의 용맹함이 이 정도였다.
서위 초기, 관중일대는 전란이 막 끝나서, 생산이 회복되지 못했다. 관청이 백성의 양식을 거둬서 군용으로 썼는데, 백성이 숨기고 내놓지 않으면 가중처벌을 받았다. 백성들이야 남는 식량이 원래 별로 없었다. 관청에서 재촉하자, 속속 도망치게 된다. 왕비의 관할구역은 전혀 달랐다. 백성들은 기꺼이 군량을 내놓았고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왕비의 정치수완도 보통이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위와 서위의 사원대전 전날, 우문태는 화주의 위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사자를 보내어 왕비에게 방어를 더욱 엄밀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고환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화주를 쳤다. 성아래로 와서 왕비에게 소리쳤다: "빨리 투항하지 않고 뭘하느냐?" 왕비는 성 위에서 큰 소리로 답했다: "이 성은 왕비의 무덤이나 생과 사가 모두 여기에 있다. 죽고싶으면 오라!" 전혀 무섭지 않다는 기세를 보이자, 고환은 이미 왕비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공성하지 못하고 철군했다. 왕비의 한 마디로 고환을 물리친다. 나중에 왕비는 하동진수로 옮기고 부풍군공으로 작위가 오른다. 동위서위의 하교대전때 서위군이 관중으로 패퇴한다(서위황제도 군중에 있었다), 동위군의 항복한 병졸인 조청작이 이 기회를 틈타 장안에서 변란을 일으킨다. 일시에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왕비는 성문을 열고 장병들에게 말했다. "듣자 하니 천자가 패했다고 한다. 길흉은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나, 나는 명을 받고 여기를 지키고 있는 자이다. 죽음으로 보은할 뿐이다. 너희가 만일 다른 생각이 있으면 나를 죽여라. 만일 누구든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되면, 성밖으로 나가도 좋다. 나와 함께할 사람은 함께 지키자" 사람들은 그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딴 마음을 품지 않았다. 서위군이 돌아와서 조청작의 난을 평정하고, 국면은 점차 안정되었다.
왕비는 옹주자사로 간다. 서위의 북방에 유연이라는 민족이 아주 세력이 왕성했고, 변방을 침입해 들어왔다. 선봉은 이미 빈주에 이르렀다. 조정은 경성의 방비를 강화했고, 길을 막았다.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 좌복야 주혜달이 사람을 보내어 왕비와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를 협의했다. 왕비는 사자에게 말했다: "만일 유연군이 위하이북으로 온다면 내가 사람을 이끌고 깨버릴 것이다. 국가에서 병사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경성에서 어찌 그리 놀라는가? 설마 우문가의 사람들이 이렇게 간이 작단 말인가?" 당시 경성유수는 우문태의 조카인 우문도였고, 우문태의 중용을 받았다. 왕비의 권세가에 대한 불경스런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왕비는 성격이 솔직하고, 에둘러말할 줄 몰랐다. 조정에서 사자가 오면 왕비가 그들을 접대하여 식사를 했다. 어떤 사자가 전을 먹을 때, 바깥의 두터운 부분을 버리고, 가운데 부드러운 부분만 집어먹었다. 왕비는 그것을 보고는 불쾌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씨를 심어서 거두는 것은 인력을 소모하는 일이고, 거기에 찌고 가공하는데도 힘이 적지 않게 든다. 네가 이렇게 먹는 거을 보니 아직 배고프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는 좌우에 명해서 먹을 거리를 내가게 했다. 사자는 깜짝놀랐고 부끄러워했다. 또 한번은 한 손님이 왕비와 참외를 먹는데, 손님이 껍질은 너무 두텁게 깍았다. 그리하여 과육부분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왕비는 이런 걸 싫어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손님이 깍아서 땅에버린 참외껍질을 주워서 먹었다. 손님이 이걸 보고는 미안해 했으며, 자기의 먹는 방식을 바꾸었다. 만일 어떤 관리가 사리사욕을 도모한다면 왕비는 태장을 치기보다는 바로 신발을 벗어들고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성격이 이렇게 조급했다. 매번 장병에게 상을 내릴 때면 친히 주육을 재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왕비는 여전히 자기의 방식대로 했다. 그의 손자인 왕술(王述)은 부모가 일찍 죽어서 왕비가 부양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견식이 있었다. 우문태가 왕술을 본 후에 깜짝 놀라서 말했다: "왕공에게는 이런 손자가 있으니, 후사가 걱정없겠습니다" 왕비가 나중에 임지에서 죽는데, 죽고나니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청렴함에 탄복했다.
채우(蔡佑) 장군
채우는 자가 승선이고 서위 북주의 명장이다. 그의 부친인 채습(蔡襲)은 남북조시기 북위와 서위의 관농지역 관리였다. 채우는 대북무천사람은 아니다. 서위의 권신인 우문태의 친척도 아니다. 다만 그의 용맹과 충성으로 우문태의 신임을 얻는다. 그리하여 우문태 수하의 믿음직한 장수가 된다. 채우는 젊을 때부터 큰 뜻을 품었다. 그는 자주 친구인 이목(나중에 우문태의 심복이 됨. 북주 상주국, 병주총관)과 서로 격려하며 "대장부는 당연히 공명을 세워야 하고 부귀를 얻어야 한다. 어찌 빈천한 지경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인가" 말을 마치고 둘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었다. 우문태가 관농으로 들어와서 원주의 일을 할 때 채우를 불러서 썼다. 나중에 우문태가 하주자사로 갈 때 채우는 그의 수하에서 도독을 지냈다.
관서대도독 하발악(우문태의 옛상사)가 후막진열에게 죽임을 당하자, 하발악의 여러 장수들이 평량에서 우문태를 새로운 우두머리로 추대한다. 파견사자인 두삭주가 하주로 와서 우문태를 맞이하고자 했다. 하주는 당시에 명문인 미저원진등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채우는 과감하게 그를 죽여서 군심을 안정시킨다. 그리하여 우문태로부터 좋게 평가받아 의자(義子)가 된다. 이때부터 우문태를 따라서 후막진열을 토벌하고, 위효무제를 관중으로 맞이하며, 동위와의 소관지전, 홍농지전, 사원지전에서 모두 공을 세운다. 동위와의 하교지전에서, 양군의 군대가 방대하여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잘못 연결되어, 마침 안개가 전장터를 감쌌다. 쌍방부대는 혼전에 들어간다. 채우는 이때 평동장군이었는데, 말에서 내려 전투를 하며 여러명을 죽인다. 부하들이 말에 올라 적의 급습을 방비하라고 하자, 채우는 대노라며, "우문승상은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는데, 오늘 어찌 내 생명을 돌보겠는가?"라고 하며 십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큰 소리를 내며 적을 향해 달려갔다. 적군에 큰 손실을 입힌다. 적군은 그들의 인원이 적은 것을 보고는 겹겹이 포위했다. 채우는 화살을 활에 장전하고는 적과 대치했는데, 스스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형세는 위기일발이었는데, 동위의 병사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중갑옷을 입고 창을 든 자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채우는 활을 당기고 채우와 삼십보 거리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부하들이 모두 빨리 화살을 쏘지 않느냐고 말하자, 채우는 "우리의 생명은 바로 이 화살에 달려있는데, 어찌 헛되이 쏘겠는가?" 적군이 10여보 거리에 다가왔을 때, 채우는 비로소 화살을 쏘았다. 바로 적군의 얼굴 한가운데를 맞혔다. 적은 바로 쓰러졌고, 나머지 적군은 놀라서 후르르 흩어졌고, 조금 물러났다. 채우는 그 기회를 틈타 포위망을 뚫었다. 부하들을 이끌고는 안전하게 퇴각했다. 이번 전투에서 서위군이 졌다. 우문태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왔다. 채우는 홍농까지 물러난다. 저녁에 우문태와 만나는데, 우문태는 그를 보고 반가워서 소리쳤다: "승선, 네가 왔구나, 이제 걱정이 없다" 이번 전투의 참혹함은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볐던 우문태까지 놀라게 하였고, 밤에 잠이 들지 못했다. 채우의 무릎을 베고서야 깊이 잠들 수 있었으니,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만하다. 몇년후 동서위의 망산대전에서 채우는 몸에 빛나는 철갑옷을 입고 선봉에 서서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갔다. 적군들이 모두 무서워하며, "이는 철맹수이다"라고 하였다. 동위의 병사들은 그를 만나면 피했고, 그에게 다칠까봐 겁을 냈다. "철맹수"는 동위군이 두려워하는 이름이 되었으니, 채우의 용맹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이다.
채우의 작전은 자주 스스로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적진을 뚫고 들어갔다. 왕왕 대군이 물러난 후에 여러 장수들이 서로 공로를 다툴 때, 채우는 다른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홀로 곁에 앉아 있었다. 장군의 기풍이 있었다. 우문태는 자주 감탄하며 말했다: "승선은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말하지 않으니 내가 그를 대신해서 처리해주어야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렇게 잘 알았다.
이후, 그의 지위는 계속 오른다. 원주자사에서 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시중에 이른다. 그리고 작위는 회녕군공에 이른다. 그리고 선비성인 대리계(大利稽)씨를 받는다. 한족장수가 선비족 귀족성씨를 받는 것은 당시에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당나라의 선조인 이호는 일찌기 대야씨(大野)씨를 받은 바 있고, 수나라의 선조인 양충도 일찌기 보육거(普六茹)씨를 받은 바 있다. 남량의 강릉이 막 귀의했ㅇ르 때, 당시 각종세력이 반란을 일으킨다. 우문태는 채우와 대장군 두로녕을 보내어 반란을 진압한다.
우문태가 병이 위중할 때, 채우와 우문호(우문태의 조카), 하란상(우문태의 생질)이 함께 우문태를 모셨다. 이로써 볼 때 우문태는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문태가 죽은 후, 채우는 비통하여, 몸이 상한다. 이후로 병을 얻는다. 그는 우문태에 대한 감정이 일반적인 부자지간보다 더했던 것이다. 우문호는 우문태의 유지를 이어받아서, 서위황제를 폐위하고, 우문각(우문태의 적장자)를 황제에 올린다. 이리하여 북주황조가 들어선다. 우문호는 스스로 대총재가 되어 국가의 군사와 정치를 모두 장악한다. 채우와 위지강(우문태의 생질)은 함께 금군을 장악하고 궁정을 방어한다. 우문태의 아들, 조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북주는 건립되었지만, 우문호가 홀로 군정대권을 장악하여 발호가 심했다. 우문각은 점차 우문호의 권력남용에 불만을 가지고 그를 없애고자 했다. 그러나, 우문각은 이때 즉위한지 얼마되지 아니하고, 나이가 15,6세에 불과했다. 근본적으로 우문호와 다툴 수가 없었다. 채우는 자주 울면서 말렸으나, 우문각은 듣지 않고, 마침내 우문호에 의하여 폐위당한다. 이어받은 북주의 명제 우문육(우문태의 서장자)가 공자일 때 채우와 아주 관계가 좋았다. 즉위때 채우에 대한 은총이 날로 더해갔다. 채우는 자주 병을 핑계로 피했다.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문육은 천생이 총명하고 문학을 좋아하여 선비들을 예로 대하고 백성을 아꼈다. 가혹한 법령을 폐지해서, 인심을 얻었다. 지위가 점점 공고하게 되자, 우문호의 질시를 받는다. 결국 우문호에게 독살당한다. 조정은 군신간의 권력투쟁이 가속화되니, 채우는 자주 변방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경성의 시비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그의 뜻대로 원주로 나간다. 이곳은 그와 우문태가 처음 만난 곳이다. 오래지 않아 병이 도져서 채우는 원주에서 사망한다. 이 때 나이가 54세이다. 채우는 천성이 근검하여, 얻는 하사품은 모두 종족에게 나누어 주었다. 죽었을 때,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채우는 비록 우문태가 부자의 관계로 대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했다. 고대의 존귀한 자를 부친으로 모시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는 우문태에게 어른의 풍모, 인걸의 모습, 사람의 마음은 얻는 뛰어난 수단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랬기 때문에 장사들이 죽어라 도왔고, 위대한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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