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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전한(前漢) 유총(劉聰) : 황후를 가장 많이 책봉한 황제

by 중은우시 2008. 1. 4.

글: 장강단적

 

서진(西晋)과 동진(東晋)의 사이에 십육국(十六國) 시대가 있었고, 십육국중에 한(漢)이 있었다. 이 작은 조정은 서한의 후예도 아니고, 동한의 후예도 아니다. 북방의 흉노족 귀족의 한 갈래인 유연(劉淵)이 분하(汾河)유역에서 거병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한 것이다. 비록 이 소국이 역사서에서는 거의 보이지는 않는다. 세번째 황제인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서진왕조를 멸망시킨 인물이지만 많은 사람이 알지는 못하고 있다. 그가 역사에 남긴 가장 뚜렷한 족적은 그가 책봉한 황후의 수량이 중국역사상 공전절후라는 점이다.

 

유총은 원래 이복동생을 죽이고 황제위를 빼앗았다. 부친인 유연이 죽은 후 그의 이복동생인 유화(劉和)가 황위를 계승했다. 유화는 외척인 생모집안 사람들의 말을 듣고,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대사마 대선우 유총을 주살하고자 준비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유총에게 오히려 당하게 되고, 유총은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대신들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먼저 또 다른 이복동생인 단후(單后) 소생인 동생 유의(劉義)에게 즉위하도록 권유한다. 유의는 당연히 사양한다. 그러자 유총은 그를 황태제(皇太弟)에 앉히고, 동궁(東宮)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그가 성인이 된 후에 황제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유총은 즉위한 후 얼마되지 않아. 처인 호연씨(呼延氏)를 황후로 앉힌다. 그러나, 그는 황후는 가까이 하지 않고, 오히려 부친의 애첩이었던 유의의 생모인 단후에게 접근한다. 한명은 과부이고 한명은 젊은 황제였으니, 두 사람의 불륜은 금방 주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미 철이 든 유의는 완곡하게 모친에게 그만둘 것을 권했고, 단후는 아들의 말을 듣고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나기도 하여 병이 들었다. 그리하여 1년도 되지 않아 죽게 된다.

 

그 후, 유총은 태보(太保)인 유은(劉殷)의 집에 천향국색인 두 딸과 네 손녀가 있다는 것을 듣고는 배분도 고려하지 않고 모조리 입궁시켜 비빈으로 삼고, 매일 이 여섯 미녀와 함께 한다. 그중 두 딸은 귀빈(貴嬪)에 봉했는데, 한명에게는 유영(劉英)이라는 이름을, 다른 한 명에게는 유아(劉娥)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는 은연중에 요(堯)임금의 딸로 순임금의 부인인 아황(娥皇), 여영(女英)의 이름을 본 뜬 것으로, 스스로 명군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권한을 이 두 귀빈에게 주어서 처리하게 한다.

 

유총의 첫번째 황후인 호연씨가 죽어버리자, 그는 좌귀빈 유영을 황후의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그러나, 유총의 모친인 장씨(張氏)는 두 사람이 같은 유씨라는 점을 꺼려해서 유영이 황후에 앉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딸인 장징광(張徵光), 장려광(張麗光)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유총에게 둘 중 하나를 골라 황후에 앉히라고 한다. 유총은 어쩔 수 없이 모친의 명에 따라, 장징광을 자신의 두번째 황후로 앉힌다. 유영은 황후가 되지 못한 채 우울하게 죽는다.

 

황음무도하고 희노애락이 무상하며, 조금의 기강도 없는 유총때문에 모친인 장씨는 결국 홧병으로 죽고 만다. 황후인 장징광은 자기를 아껴주던 고모가 없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세상을 떠난다. 모친의 단속이 없어지자, 유총은 유영의 여동생인 유아를 황후에 앉힌다. 행운스럽게도 유아는 사람됨이 착하여, 자주 그에게 권해서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말려 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려냈다. 아마도 유총이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그 응보가 황후인 유아에게 닥쳤다. 그녀는 출산중에 난산을 사망하고 만다.

 

유총은 신하인 근준(準)의 집에 갔다가 그의 두 딸인 근월광(月光), 근월화(月華)가 침어낙안의 미인인 것을 보고 혼을 빼앗긴다. 원래 근준도 오랫동안 이 미인계를 준비해와서 양측은 바로 마음이 맞게 된다. 그날 밤으로 두 딸을 궁중으로 데려간다. 근월광은 특히 유총의 혼을 빼놓았다. 십여일 후에는 바로 황후에 책봉된다. 새로운 사람이 생기면 옛사람은 멀어지는 법이다. 유총이 이전에 입궁시켰단 두 명의 유귀빈(예전의 귀인은 이때 귀빈으로 승급해 있었다)은 자연히 뒷방신세가 되었다. 유총은 두 사람을 위안해주기 위해서 그들을 각각 좌황후(左皇后), 우황후(右皇后)에 봉한다. 그리고는 황후 근월광은 상황후(上皇后)로 삼는다. 세명의 황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유총이 여러 후궁에도 만족하지 못한 것처럼, 근월광도 독수공방하는 날이 많아지자, 몇몇 미소년들을 찾아서 즐겼다. 그러다가 유총에게 발견되어, 바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유총은 주색에 빠져, 조정은 모두 아들인 유찬(劉粲)에게 맡겼다.

 

더욱 황당한 것은 유총의 후궁중에 나중에 황후의 책봉을 받은 자가 7명에 달하였는데, 근월화는 정황후(正皇后)가 되고, 근월화를 모시던 궁녀인 번씨(樊씨)는 원래 유총의 모친의 시비였는데, 역시 유총의 총애를 받아 상황후(上皇后)에 봉해진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도대체 상하,좌우,정측중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유총은 어려서는 매우 총명했고, 14세에 이미 경사에 통달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지닐 정도였다. <<손오병법>>은 아주 익숙하게 익혔고, 서법문장도 뛰어났으며 문장재주도 있었다. 집정기간동안 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가 황제가 된 후 다음 해에 낙양을 함락시켜 진회왕(晋懷王)을 포로로 붙잡는다. 5년후에는 다시 서진의 새로운 수도 장안을 함락시켜 진민제(晋愍帝)를 포로로 붙잡아 서진을 멸망시킨다. 통상적으로 형제로부터 황제위를 빼앗은 황제는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역사적인 철칙에 맞는 행동을 했었다. 그러나, 후기의 그는 황음무도했다. 역사서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그가 황후에 봉한 여인은 모두 12명이상이다. 유총이 조정을 등한시 하면서 전한정권은 신속히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