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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법률/사건이야기

1946년 상해최고부자 영덕생(榮德生) 납치사건

by 중은우시 2008. 6. 20.

 

1946년 4월 25일, 상해의 면분(麵粉, 밀가루)대왕 혹은 면사(棉紗) 대왕으로 불리는 영덕생(중국 국가부주석을 지낸 영의인의 부친)이 납치당했다! 납치된 사람이 유명한 사람인데다가, 요구하는 금액이 커서, 이 납치사건은 '상해탄최대납치사건'으로 불리웠다. 납치범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었고, 영씨집안이 원하는 것은 사람이었으며, 경찰측이 원하는 것은 체면이었다. 세측의 힘겨루기에서 영덕생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덕생(1875-1952)은 강소 무석사람이며, 당시 중국최대의 민족기업인 영씨집단(榮氏集團)의 주인이었다. 1900년 그는 형인 영종경(榮宗敬)과 함께 밀가루공장을 지어 큰 돈을 번 후에, 무신밀가루공장을 만들고, 신해혁명후에는 복신밀가루공장, 진신면사공장과 신신면사공장을 만든다. 1920년대, 영씨기업은 밀가루, 면사의 생산량에 있어서 이 두 업종 전체 민족기업생산량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씨집안의 엄청난 부는 다른 사람들이 욕심낼 만했다. 상해 상계의 우두머리급 인물인 71세의 영덕생도 세상의 험악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안전방비를 엄밀하게 해왔었다. 집문을 나서면 반드시 무장호위가 따르고, 타는 차량도 방탄차량이었다. 당시에 상해에서는 '다이아몬드대왕', '오금대왕' '광동거상의 두 아들'이 납치되어 거금을 내고 풀려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삼엄한 경비도 돈에 눈이 먼 50세가 넘은 납치범들 즉, 낙문경(駱文慶)과 원숭저(袁崇)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영덕생을 납치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는 남의사(藍衣社, 국민당특무조직)의 특무이며 일찌기 영가면분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 주련생(朱蓮生)을 끌어들인다. 주련생의 가담으로, 낙문경과 원숭저는 영덕생의 모습과 습관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영덕생의 경비가 삼엄한 것을 보고는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성공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하여, 다시 비적, 친일파로 지내다가, 당시 국민당 특무조직에서 일하고 있던 황아보(黃阿寶)를 찾아서 납치방법을 협의한다. 황아보는 그 말을 듣고 눈을 한번 굴리더니, "그게 뭐 어려울 게 있겠는가? 우리가 체포해버리면 되지" 즉, 경찰이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영덕생을 차에 태워 붙잡아오자는 것이었다. 낙문경, 원숭저는 좋은 방법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아보는 다시 그의 조카인 군통(軍統)의 특무 황금당(黃錦堂)을 끌어들인다. 황금당은 하루종일 술만 퍼마시면서 급여가 적다고 투덜대는 중이었다. 돈벌 거리를 찾고 있었으므로 바로 응락한다. 황금당은 군통특무들이 쓰는 권총과 육군제3방면군의 체포증과 송호경비사령부의 승용차와 같은 일련의 '도구'을 준비한다. 여러번 계획하고 업무를 분담하여 준비가 완료되었다.

 

1946년 4월 25일, 상해 고은로 210호의 영덕생의 집(지금의 상해시 서회구 청소년활동중심)에서는 검은색의 군용 시보레 승용차가 집앞으로 와서 서 있었다. 영덕생의 방탄유리차량이 문앞을 나서자, 문앞에서 왔다갔다 하던 사람이 몰래 군용차량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검은색 군용차량은 앞으로 나가서 길을 막았다. 낙문경, 원숭저 그리고 또 다른 한 납치범은 차에서 내려서 영덕생의 차량으로 다가갔다. 이들 중 2명은 중산장을 1명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권총을 뽑아들고는 운전사를 내리게 했다. 차량 안에는 모두 6명이 타고 있었다. 운전사 1명, 호위 2명, 그리고 영덕생의 셋째아들인 영일심(榮一心) 그리고 다섯째사위인 당웅원(唐熊源), 또 한명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바로 납치목표인 영덕생이었다.

 

두 명의 호위는 바로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런데, 납치범은 권총을 들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우리는 공무를 처리하는 중이다!"라고 소리쳤다. 곧이어, "육군제3방면군"이라는 큰 도장이 찍혀 있고, 송호경비사령부 2처 처장 모삼(毛森)의 서명이 있는 체포증을 영덕생의 눈앞에 내밀었다. "영노선생, 경제매국노로 체포하니, 사령부에 잠깐 다녀가주셔야 겠습니다. 차에서 내려, 우리와 함께 가시지요."

 

차에 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영덕생은 군대와 경찰의 상황을 잘 알았다. 그들이 타고온 것은 특별통행증이 있는 군용승용차였고, 사용한 권총도 특무들이 쓰는 것이었고, 들이민 것도 육군제3방면군의 붉은 색 체포증이었다. 분명히 군경(軍警)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 기업이 규모가 너무 크니, 아래 공장도 많고, 관련되는 범위도 넓다보니, 군경측과 무슨 마찰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서 해명을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고, 영덕생은 차에서 내렸다.

 

영일심은 이 일이 너무 괴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친을 잡아 끌면서 말했다: "너희가 앞장서라. 우리가 따라가겠다" 그러나 온 사람은 체포증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영노선생 한 사람만 데려가면 된다. 너희가 공무를 방해할 생각이냐?"라고 했다. 5명은 어쩔 도리가 없이, 영덕생이 검은색 군용승용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었었다. 이 과정에 걸린 시간은 3분밖에 되지 않았다.

 

당웅원은 되돌아오자마자 바로 육군제3방면군에 연락했다. 그쪽에서는 영노선생이 오지 않았다고 하고, 사람을 보내서 불러온 적도 없다고 하였다. 영일심과 당웅원은 깜짝 놀랐다. 다시 사람을 보내어 송호경비사령부에 물어보니, 사령부에서도 알지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영노선생을 체포한다고? 누가 그렇게 간이 크지?" 영일심, 당웅원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건 대낮에 아들, 사위, 호위가 보는 앞에서 납치범들은 당당하게 영덕생을 납치해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3방면군과 송호경비사령부등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1945년말, 군통의 두목인 대립은 장개석에게 이런 내용을 보고한다: 고축동의 제3전투지구가 남경, 상해에 간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탕은백의 부대를 귀주에서 상해로 이동시킨 다음 제3방면군을 조직하고, 상해의 접수업무를 책임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이리저리 생각해본 후 대립의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보아 탕은백에게 상해로 가라고 명령한다. 그리하여 제3방면군이 설립된다. 나중에 장개석은 그를 경(남경)호(상해)항(항주)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한다. 1945년 11월, 대립은 상해에서 군통회의를 개최하고 장개석의 명령을 하달한다: 매국노를 체포하는 것은 군통이 책임지며, 경찰국, 법원도 관여하지 말라. 다른 부서는 체포, 구금, 재산압수등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대립은 그 회의상에서 정일명(程一鳴), 모삼(毛森), 유방웅(劉方雄)을 책임자로 임명한다.

 

납치범들이 송호경비사령부의 자동차와 증명서를 사용했으므로, 송호경비사령부는 관련이 없을 수 없었다. 상해군경에서는 이 사건 발생후 대량의 인력을 동원하여, 상해 전역을 수색하고, 하루빨리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씨집안은 너무 많은 인력이 동원되면 영덕생의 생명안전에 위협이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협조를 잘해주지 않을 뿐아니라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경을 회피했다. 이 사건은 그리하여 납치범, 영씨집안과 군경의 세 군데가 서로 힘을 겨루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덕생을 태운자동차는 고은로를 벗어나, 조중산북로로 갔다. 길에서 몇 바퀴를 돈 후에, 갑북교외에 갈대가 가득 자란 작은 냇가로 갔다. 영덕생은 이제서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자기는 납치된 것이고, 납치범들의 도마위에 오른 고기였다. 상해에서 대수색을 벌이고 있을 때, 영덕생을 태운 작은 배는 쓰레기로 가득한 강물의 뱃속에서 하룻밤낮을 보낸다. 4월 26일 저녁8시경, 낙문경 등은 다시 영덕생을 배에서 내리게 해서 삼륜차에 태워 시내로 보냈고, 조가도(曹家渡) 오각장(五角場) 노공익리 100호의 잘 감추어진 작은 집에 가두었다. 이곳은 사방에 창이 없고, 불을 켤 수도 없어서 온통 칠흑이었다.이곳은 창고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영덕생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소리를 내지 말 것, 둘째는 이 방을 나가지 말 것. 이튿날 두 남자가 집으로 왔다. 뚱뚱한 사람은 스스로 '사령관'이라고 했고, 마른 사람은 스스로 '참모장'이라고 했다.

 

납치범들은 먼저 영덕생의 몸을 뒤져서 장부를 찾아냈다. 그런데, 장부를 보면, 최근들어 영덕생의 기업은 총수입은 400만인데, 총지출이 600만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대기업가가 수입이 지출을 따르지 못하는 지경에 처한 것이다. 영덕생은 납치범들에게 자신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재산은 모두 공장과 기계로 되어 있고, 자신은 실업가이지 재산가는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4월 30일, 납치사건이 발생한 5일째 되는 날, 마침내 납치범은 조급해서 마음이 타들어가던 영씨집안에 연락을 한다. 그런데 요구금액이 전대미문의 거액이었다: 미화200만달러. 영씨집안은 즉시, 돈을 낼테니 사람을 풀어달라고 하고, 다만 금액이 너무 커서 그렇게 많은 현금을 마련할 수가 없으니, 협의해보자고 말한다. 납치범은 다시 전화를 걸어와서 협상장소를 지정한다. 영씨집안은 바로 달려가지만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연속 2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원래, 경찰측은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자, 영씨집안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납치범이 전화를 걸어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납치범과 영씨집안이 만날 장소를 정하면 그 곳에 미리 사복경찰을 배치해놓곤 했던 것이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납치범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편지로 연락하기로 한다.

 

납치범의 수중에 떨어진 영덕생도 납치범과 협상을 했다. 영덕생은 그렇게 큰 금액이라면 소속기업에서 꺼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소속기업은 모두 경영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돈을 꺼내면, 공장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조건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납치범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살고싶지 않으냐'고 협박했다. 영덕생은 나의 늙은 목숨을 구하고자 직원들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면 차라리 살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종이를 달라고 해서 유언을 써서 죽은 후의 일처리를 부탁하겠다고 한다. 영덕생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자, 납치범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온갖 머리를 짜서 꾸민 일인데, 돈 한푼 건지지 못하고, 사체만 하나 남긴다면,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 경찰과 영씨집안은 분명히 그들을 붙잡아서 죽여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낙문경등은 요구금액을 낮춰주기로 한다.

 

3일후, 영덕생의 아들인 영이인(榮爾仁)이 영덕생의 편지를 받는다. 요구금액이 미화50만달러로 낮추어졌고, 이 금액이라면 자신의 생각에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니,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영씨는 바로 미화50만달러를 마련해서, 돈을 주고 사람을 풀려나게 하려고 한다.

 

이 소식은 경찰도 듣게 된다. 많은 사복과 경찰을 보내어 접선지점에 잠복시킨다. 만나러 나온 납치범은 뭔가 낌새를 느끼고, 즉시 도망친다. 그런데, 영씨집안에서 보낸 고정언(顧鼎言)은 그러한 사정을 몰라서 요구금액의 절반 즉 25만달러를 들고,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복경찰이 그를 붙잡아서 25만달러를 압수하였다. 고정언이 호북경찰서에서 얻어맞고 있을 때, 영씨집안에서 도착하고, 고정언이 25만달러를 가지고 사람을 풀기 위해서 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경찰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임의로 돈을 들고 납치범과 만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25만달러는 몰수하겠다고 하였다. 영씨집안은 이렇게 되어 사람도 구하지 못하고, 돈만 몰수되어버렸다. 어쩔 도리가 없어 사람을 시켜 협의한 후, 사건이 해결되고 나면 돌려주겠다는 약속만 얻어낸다.

 

계속하여 납치범과 만나지 못하고, 사람을 되찾아오지 못하자, 영씨집안 사람들은 조급해 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돈을 받지 못한 납치범도 마찬가지였다. 영덕생을 구금한 작은 집은 여러차례 경찰에 발각될 뻔 했다. 5월 18일에는 국민당 경찰과 헌병이 바로 그 집을 찾아냈다. 그런데, 납치범들은 미리 여자와 아이들을 데려다 놓았다. 그리하여 보통사람들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 여자들은 집안일에 바쁘고,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경찰도 이런 집에 숨겨놨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돌아갔다. 납치범들은 놀란 가슴을 추스리며 20여일을 보냈지만, 돈은 손에 넣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기가 가라앉아 있었고, 탄식만 하고 있었다. 몇몇 가담한 인물들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보고는 아예 몰래 도망쳐 버렸다.

 

마침내 납치범 낙문경과 신신(申新)이공장 공장장인 첨영배(詹英培)가 만나게 된다. 첨영배는 원래 낙문경과 잘 알았다. 그리고 영덕생의 신임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씨집안의 대표로 납치범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번 연락방법은 납치범이 연락장소를 정안사와 남경대희원일대의 양말공장 노동자모집광고의 뒤에 써두었다. 영씨집안은 심복을 보내어, 광고를 들추어서 접선장소를 알아냈다. 접선장소는 두 곳이었다. 각각 사람을 보내어 지키게 했는데, 납치범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시험한 것이었다. 경찰이 매복을 하고 있는지 없는지 보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의 시험을 거쳐, 납치범들은 안심을 했다. 그리하여 첨영배와 5월 29일 돈을 복희로 강락촌 54호로 보내라고 했다. 돈을 받으면 그날 밤에 사람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조심스런 첨영배는 납치범들에게 영덕생의 몇개 신물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야 영덕생이 그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했다. 두 개의 신물이 바로 보내어 졌다. 하나는 영덕생의 사장(私章, 도장)이고, 다른 하나는 영덕생이 평소 몸에 차고 다니는 '청년'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여지(勵志) 인장이었다. 영씨집안에서는 이를 보고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첨영배는 돈을 가지고 간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영씨집안은 미화50만달러현금을 몇몇 집안일꾼을 시켜 여러차례에 나누어 첨영배의 집으로 보냈다. 5월 27일, 첨영배는 돈을 자동차 뒷트렁크에 싣고 먼저 공장으로 몰고 갔다. 몇 가지 업무를 처리한 후, 다시 길을 몇 바퀴 돌았다. 경찰이 따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복희로 강락촌 54호로 달려갔다.

 

납치범들을 대표하여 나타난 것은 오지강(吳志剛)이었다. 오지강은 화대기업의 총경리인데, 실제로는 송호경비사령보조사처의 부처장인 대령이었다. 그는 돈을 확인한 후, 오지강은 첨영배에게 "노선생은 저녁에만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미 4시이니, 오늘은 안되고, 내일 밤에는 반드시 집에 도착하실 겁니다"라고 하였다. 첨영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그 말을 그대로 영씨집안에 전할 수밖에 없었다.

 

납치범들은 약속을 지켰다. 5월 28일 저녁 10시, 영덕생은 사위인 당웅원의 집으로 보내어진다.

 

납치범들이 돈을 받은 후 다시 에피소드가 있다. 오지강은 돈에 눈이 멀어, 첨영배가 그에게 건네준 50만달러에서 10만달러를 몰래 빼돌린다. 그 후에 납치범두목인 낙문경과 원숭저에게는 영씨집안이 50만달러를 만들지 못해서 40만달러만 받았다고 한다. 원숭저는 한번에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영씨집안은 절대 현장에서 말을 바꿀 사람들이 아니었다. 즉시 어떤 사람이 오지강에게 감히 10만을 혼자서 삼키려고 하다니 죽고싶으냐고 욕을 했다. 일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부에서 싸우게 생긴 것이다. 낙문경은 사람들에게 우선 급한 것부터 처리하자고 하고, 손봐주는 것은 뒤로 미뤄도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먼저 영덕생을 풀어주고, 40만달러를 18등분으로 나눈다. 가담한 정도에 따라 차등분배했다. 돈을 나누자 이들은 헤어진다. 그들은 반년내에는 이 돈을 쓰지 않기로 약정한다. 그래야 마각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하였지만, 어떤 납치범은 이를 지키지 못했다. 구멍은 황금당쪽에서 나왔다. 남경의 경호위수총사령부 제2처 처장인 모삼(毛森)은 수하인 황금당이 무슨 돈나오는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최근들어 씀씀이가 헤퍼진 것을 보게 된다. 새로 미국승용차도 사고, 매일 고급 양복을 입고, 술집과 가무청에서 돈을 흥청망청 썼다. 모삼은 즉시 황금당이 절강 승현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상해에서 납치를 하는데 있어서는 승현방이 가장 유명했다. 그는 또한 이전에 황금당이 자주 상해, 무석에 일 때문에 다녀온 것도 기억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가지 않았다; 또한 영덕생 사건후, 납치사건을 많이 벌이던 승현방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모삼은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황금당을 불러서 슬쩍 찔러보았다. 모삼이 정교하게 계획한 공세에 못이겨, 황금당은 온몸을 떨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삼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황금당을 가두고는 강온양면으로 설득했다. 황금당의 심리적 방어선은 무너졌고, 결국 사건과정과 가담자들을 모두 털어놓게 된다.

 

모삼은 즉시 군통부하를 풀어서 체포에 들어간다. 이 사건은 사건당사자들이 모두 붙잡힌다. 1946년 8월 5일 심리를 열어, 8월 27일, 낙문경, 원숭저, 황아보, 황금당, 오지강등 8명의 주범이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집행된다.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영씨집안에서 내놓은 50만달러중에서는 겨우 20만달러만 회수된다. 경비사령부는 그중 13만달러를 영씨집안에 돌려주는데, 돌려줄 때 경찰은 사진도 찍고, 신문에도 내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전국을 놀라게 했던 면사 겸 밀가루대왕 영덕생 납치사건은 어제 전부 끝이 났습니다. 납치범이 받았던 돈은 이미 영씨집안에 되돌려 주었고...." 그러나, 대부분의 돈은 당국이 돌려주지 않았으며, 그중 5만달러는 장개석이 모삼에게 상으로 주었다.

 

이뿐아니라, 돈을 돌려준 다음 날, 경비사령부는 사람을 신신회사에 보내어, 공공연히 사건해결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두번, 세번 계속되자, 영씨집안에 돌려준 13만달러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영씨집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미화를 사서 줄 수밖에 없었다. 영이인은 나중에 화가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납치범들도 50만달러를 요구했는데, 이제 사견이 해결되니, 드는 돈이 오히려 60만달러이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것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