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주랑(河西走廊, 장안이 있는 섬서에서 서역으로 이어지는 지역, 현재의 감숙성일대)의 수리분쟁은 역사상 이 지역의 주요한 갈등중 하나였다. 흑하(黑河), 석양하(石羊河) 유역을 예로 들면, 수리분쟁의 유형은 주로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하류의 상류, 하류의 각 현(縣)간의 물싸움이다. 예를 들면, 흑하유역 하류의 고대현과 상류의 무이청(지금의 임택현), 장액현과의 사이에 벌어진 물다툼으로는 주로 진이오보사건, 풍념거구사건이 있다. 석양하 유역의 하류지역 진번현(지금의 민근현)과 상류지역의 무위현간에 벌어진 물다툼으로는 주로 홍수하사건, 교위거사건, 양하패사건등이 있다.
둘째는 동일한 현(縣)내의 각 거(渠, 도랑), 각 패([土+覇], 댐)간의 물다툼이다. 예를 들면, 진번현의 각 거, 패간에 벌어진 물다툼이 그것이다.
셋째는 동일한 패내의 각 집(戶)간의 물다툼이다.
첫째, 둘째 유형은 분쟁정도가 아주 격렬했다. 무력을 동원하기도 하고, 서로 고소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건륭제때의 <<고랑현지>>에 의하면 이렇게 적고 있다: "하서의 소송사건중에서 큰 것은 수리사건이다. 한번 소송이 붙으면, 여러해동안 해결되지 않고, 혹은 댐을 막아버리고, 물길을 끊기도 한다. 혹은 무리지어 싸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위의 오우, 고두패의 일이 그렇다. 지나간 일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하서자구의 물다툼갈등은 자연적인 요소도 있고, 사회적인 요소도 있으니, 이 두 가지가 서로 인과관계에 있다. 사회요소로는 유역과 행정구역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상류지역은 지리적인 우세를 이용하여 자주 물길을 막아버려, 하류에서 물이 고갈되게 만들었다는 점, 강물이 계속 흐르다보니 지역을 나누어 이쪽 저쪽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점, 토지가 사막화되면서 물길에서 물이 새나가는 것이 심해지게 되었다는 점, 습지를 개간하여 농경지가 늘어나서 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는 점, 회족들이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게 되허, 한족과 논에 물을 대는 것에 관하여 다툼이 늘어났다는 점, 지방관리의 능력부족 등이 그것이다. 자연요소로는 하서주랑이 원래 건조, 반건조지역이러서, 삼림이 파괴되었으며, 하서주랑의 남북의 각 산들이 민둥산이 되어 생태환경이 악화되고, 고산지대의 적설이 녹아서 흐르는 물이 줄어들어, 눈녹는물에 수원을 의지하던 강물의 물이 줄어들었다는 점등이 있다.
물싸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새로 도랑을 파는 것 이외에는 주로 서로 다른 단계의 분수제도(分水制度, 물나누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강물의 상류, 하류의 각 현간의 물나누기를 제1차적 물나누기(분수)라고 한다면, 동일한 현 내의 각 거, 패간의 물나누기는 제2차 물나누기라고 할 수 있다고, 동일한 거, 패 안에서 각 집간의 물나누기는 제3차 물나누기라고 할 수 있다. 각 현간의 물나누기는 먼저 하류를 고려하고, 다음에 상류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분배하며, 각 현간에 협상으로 해결했다. 만일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상급정부기관의 도움을 받거나,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물나누기를 시행한다. 흑하유역에서 상류의 장액, 무이, 고태의 각 거에서 물길을 잘라버려, 하류의 모목현, 고대현의 진오이보에 물이 모자라게 되었다. 안숙도는 모목현에 위탁하여 장정을 고대에 주재시켜 거의 입구를 10일동안 막아서 강물을 아래로 흐르게 만든 적이 있다. 석양하유역에서는, 상류의 무위현에서 물을 너무 많이 차지해버려, 하류의 진번현의 논에 물이 부족하게 되었고, 두 개의 현은 자주 갈등이 발생하였다. 지방정부의 사건처리문서를 보면 다시 물나누기를 한 문서가 있는데, 양쪽 모두 비석에 이를 새기고 이를 지방정부관아와 용왕묘에 세우게 하였다.
한개 현내의 각 거,패간의 물나누기는 현정부가 "하류우선, 상류다음"이라는 원칙하에 각 거,패의 땅넓이, 부담하는 식량과 풀등에 따라 분배했다. 현정부는 물나누기방안과 관리제도등을 돌에 새겨서 정부건물에 세웠는데 이를 "수례(水例)" 또는 "거패수리비문"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함으로써 농민들이 정부의 관리에 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강희 41년에 진번위대도패비, 옹정5년의 진번현소도패비가 모두 현정부관아에 새워져 있다. 건륭8년 고랑현 현령이 만든 "거패수리비문"도 역시 현관아에 새워져 있다. 고랑현 "거패수리비문"에 의하면 각 거패는 모두 각자의 수화호책(水花戶冊)을 2부 만들어서 1부를 관아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물을 나누는데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장부와 대조하였다. 각 현에서 수리통판, 수리향로를 둔 시기는 모두 다르다. 전체적으로, 물나누기제도가 건립되면서, 각 현급정부에는 구체적인 물나누기방안이 마련되었고, 현마다 물나누기담당관리를 두었고, 물나누기의 기술적인 방법과 제도원칙등이 정비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리에 관한 모든 사항을 마련하고 완비하였으며, 분쟁이 생겼을 때 각급정부가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각종 물나누기와 관련된 문서는 농민들이 따르고, 관청이 집행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물나누기제도가 일단 건립되자 상대적으로 아주 안정되었다. 다만, 이후 기후환경이나 사회조건이 변화하면, 원래의 물나누기제도를 조금씩 조정해야 했다.
하서주랑의 물나누기제도에서 자주 쓴 것은 물을 사용하는 시간과 양을 확정한 것이다. 전통적인 시간기록방법은 간지법인데, 하룻밤을 12시진으로 나누고, 매 시진은 8각으로 나누었다. 민간의 시간계산방법은 향 1자루를 태우는 시간으로 표시하였다. 1자루 또는 여러자루의 향을 태우는 시간으로 길이를 표시한 것이다. 물이 귀했으므로 물나누기는 시(時)뿐아니라 각(刻), 분(分)까지 나누어 기록했다. 물나누기의 기술적인 방법은 수기(水期)와 수액(水額)을 확정하는 것이다. 수기가 정해지면, 다시 용수의 정액을 확정한다. 진번의 각 거에서 물을 쓰는데는 모두 정액이 있었다. 역사상 그리고 문헌에서는 두 가지로 수액을 표시하고 있다. 하나는 패기(牌期)를 강(綱)으로 하고, 각 거패를 목(目)으로 하여 1패의 물을 각각의 거패로 나누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각 거패를 강(綱)으로 하고, 패기를 목(目)으로 하여, 각 패기의 물을 각 거패로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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