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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중국은 왜 개전후 10년간 대일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08. 3. 31.

글: 유계흥(劉繼興)

 

1931년, 국내외를 놀라게 한 "9.18"사변이 발생한 후, 중국인민은 일본침략군과 피비린내나는 혈투를 벌인다. 동북의 각계각층인민과 관병은 항일무장세력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이들 항일무장세력은 통칭하여 "동북항일의용군(東北抗日義勇軍)"이라고 부른다. 비교적 유명한 조직으로는 "마점산(馬占山)"이 총사령관인 흑룡강항일구국군, "왕덕림(王德林)"이 총지휘관인 길림중국국민구국군, "이두(李杜)"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길림자위군, "등철매(鄧鐵梅)"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동북민중자위군, "경계주(耿繼周)"를 수령으로 하는 동북민중항일의용군, "소병문(蘇炳文)"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동북민중구국군등이 그들이다. 동북항일의용군에 참가한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동북군관병, 지방관리, 사신(士紳)등이 있고, 동북각지의 녹림무장세력과 홍창회, 대도회등도 있었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동북에 병력을 증원하여 방어를 강화해야 했다.

 

곧이어, 일본군국주의세력은 시선을 옮기기 위하여, 다시 침략의 눈길을 동북삼성바깥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1932년 1월 28일, 상해를 무장침범하여, 제19로군을 위시한 중국군민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치고, 유명한 "1.28"송호항전이 발생한다.

 

국제관례에 따르면, 교전국은 장기적으로 개전하게 되면, 모두 단교를 선포하고 전쟁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10년간, 중국과 일본 양국은 모두 정식단교를 선포하지도 않고, 전쟁상태진입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이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하게 된다.

 

중국은 왜 일본침입10년후에야 비로소 선전포고하게 되었는가? 혹시 무슨 숨은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닌가?

 

원래,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민당정부는 일본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있었따. 1937년, 노구교사변후 3일째 되던 날, 장개석은 외교부장으로 하여금 일본주중국대사관에 조회를 보내어, 일본과 담판을 요구했고, 평화적으로 전쟁을 해결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담판건의는 일본측에 의하여 바로 거절당한다, 일본측은 오만하게, "군도를 이미 뽑았는데, 어찌 피도 보지 않고 칼집에 넣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담판이 안되자, 장개석은 아주 곤란해졌다. 7월 16일, 장개석은 화를 참으면서 국민당정부 행정원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대일선전포고문제를 검토하도록 하였다. 양국상황과 국제정세를 비교분석한 후, 회의참석인원들은 선전포고시의 장단점에 대하여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단교도 하지 않는 것이 중국 현재의 대일관계에서 상책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중국의 군수물자보급선이 끊어질 것을 우려했다. 중국의 군수물자는 자급자족이 되지 아니하여, 절대다수를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다. 만일 중국이 공개적으로 대일단교와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일본은 교전국의 신분으로 각국에 일체의 군수품과 군수원료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 것을 요청할 수 있고, 중국의 해상보급선을 차단할 수도 있다. 중국으로서는 대량의 외국원조물자를 해상으로 중국까지 운송하는 것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

 

둘째, 독일의 군사기계장비를 들여오는데 문제될 것을 우려했다. 중국은 당시 군대를 정비하고 장비를 도입하면서, 독일의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몇 개의 독일기계화사단을 만들 수 있는 장비를 도입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에 대량의 군사무기와 장비를 주문해두고 있었는데, 아직 인도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일 선전포고하게 되면, 일본은 당당하게 독일에 군수물자수출을 취소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이것은 중국이 항전을 지속하는데 불리할 수 있었다.

 

셋째, 쌍방의 교민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만일 단교하고 선전포고하면, 중국의 일본에 있는 교민들이 추방되거나 체포될 것인데, 중국으로서는 이들 교민을 보호하거나 철수시킬 능력이 없었다. 반대로 일본의 중국에 있는 교민들은 영국 프랑스등의 조계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었고, 중국침략의 간첩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중국정부가 추방하거나 간섭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상의 여러 요소를 고려한 끝에, 장개석은 은인자중하면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기간의 항전과정에서, 그는 계속하여 한편으로 수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화평을 요청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침략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된 후, 일본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각은 여러차례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와 단교문제를 토론했다. 군측의 일치된 의견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로서는, 선전포고를 하면 중국과 제3국간의 경제교류를 막을 수는 있고, 최대한 중국군사장비의 도입을 단절시킬 수는 있지만, 일본도 자원결핍국가이어서, 대부분의 군용물자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만일 선전포고하게 되면, 중국을 동정하는 국가들이 대일전략물자수출을 제한할 수 있고, 일본은 국제적인 경제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참고, 또 참다가 마침내 기회가 왔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국제정세는 큰 변화가 있었고, 반파시스트진영은 갈수록 강해졌다. 이때 장개석은 더 이상 장단점을 분석할 필요가 없었고, 일본과 화평하려는 생각은 철저히 포기했다. 1941년 12월 9일은 장개석이 기세를 드러낸 하루였다. 이 날, 장개석 정부는 중국을 대표하여 정식으로 파시스트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2차세계대전은 이로써 새로운 페이지를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