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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장정(長征)"중의 혼인과 연애

by 중은우시 2008. 3. 10.

글: 진명원(陳明遠)

 

행군하며 전투하는 군인의 혼인을 따로 "군혼(軍婚)"이라고 부른다. 지난 세기 대혁명기간동안 "혁명은 연애보다 우선한다"는 구호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대로 "식색성야(食色性也, 먹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사람들이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나라고 혼자 가정을 가지지 못할 거냐". 군인은 중이나 비구니가 아니다. 수도사도 아니고, 수녀도 아니다. 애정도 혁명대열의 생활에서 필수품이었다. 그리하여 1934-1935년의 만리장정기간동안 혼인연애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어떤 것은 아주 감동적이다.

 

필자는 홍군의 2만5천리 장정에 참가했던 여성(과 그 남편)의 혼인연애사료를 수집정리했다. 아래의 명단은 완전하지는 않으나, 주요한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망라되었다.

 

(1) 장정이전에 이미  결혼한 경우(한어병음순)

 

채창(蔡暢)-이부춘(李富春)

진혜청(陳慧淸)-등발(鄧發)

진종영(陳琮英)-임필시(任弼時)

등영초(鄧潁超)-주은래(周恩來)

건선임(蹇先任)-하룡(賀龍)

건선불(蹇先佛)-소극(蕭克)

강극청(康克淸)-주덕(朱德)

하자진(賀子珍)-모택동(毛澤東)

김유영(金維映)-이유한(李維漢)

이백소(李伯釗)-양상곤(楊尙昆)

요사광(廖似光)-개풍(凱豊)

유군선(劉群先)-박고(博古)

전희균(錢希鈞)-모택민(毛澤民)

초월화(肖月華)-이덕(李德)

사소매(謝小梅)-나명(羅明)

증옥(曾玉)-주자곤(周子昆)

주월화(周越華)-하성(賀誠)

.......

 

(2) 장정도중 혹은 장정후에 결혼한 경우(한어병음순)

 

진진인(陳眞仁)-부연장(傅連暲)

등육금(鄧六金)-증산(曾山)

이정(李貞)-감사기(甘泗淇)

이계영(李桂英)-여택홍(余澤鴻)

이개분(李開芬)-주양재(朱良才)

유채향(劉彩香)-필점운(畢點雲)

유영(劉英)-장문천(張聞天)

마억상(馬憶湘)-안복생(晏福生)

담회명(譚懷明)-장충(張忠)

왕영화(汪榮華)-유백승(劉伯承)

왕정국(王定國)-사각재(謝覺哉)

왕천원(王泉媛)-왕수도(王首道)

오순영(吳順英)-마수량(馬樹良)

사비(謝飛)-유소기(劉少奇)

장금추(張琴秋)-진창호(陳昌浩)

장문(張文)-홍학지(洪學智)

종월림(鍾月林)-송임궁(宋任窮)

주동병(周東屛)-서해동(徐海東)

......

 

천신만고와 생사관문을 넘은 많은 혁명부부들은 깊은 애정을 유지한 경우가 많았다.

 

주은래의 처인 등영초는 폐결핵을 앓아 계속 각혈을 하였다. 주은래는 바쁜 와중에도 그녀를 자주 돌보았다. 초지를 지날 때에는 주은래가 열이 높아 정신이 혼미해진 적이 있는데, 등영초는 자신도 아프면서 그를 간호했고, 얼음덩어리로 몸을 차갑게 해주어서 체온을 내렸다.

 

주덕과 처인 강극청은 장정중에도 계속 함께 했다. 강극청은 생활에서 주덕을 돌보았을 뿐아니라, 그의 시위역할까지 담당했다.

 

임필시와 진종영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정해진 배필이었다. 장정때도 서로 격려하며 모든 과정을 겪었다. 임필시가 중병에 들었는데, 들것을 들 사람이 없어 전사 한 명이 그를 등에 들쳐 업고 걸었다. 진종영은 뒤를 따라가면서 두 손으로 그의 발을 들어주면서 높은 산을 넘고 또 넘었다.

 

장정도중에 유영은 장문천의 프로포즈를 거절했다. 그녀는 남녀혁명자는 애정이라는 감정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업무관계로 그들은 거의 1년간 아침저녁으로 함께 했고, 어떤 때는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나 옷을 벗지는 않았다. 홍군이 와요보에 도착해서 안정되자 두 사람은 결혼하고, 함께 정치의 비바람을 견뎌나간다.

 

왕영화와 유백승은 장정도중에 알게 되었고, 3대주력군이 회합하기 전날 간단한 혼례를 거행한다. 눈 하나만 남은 '군신'은 1972년 두 눈을 모두 실명하게 되고, 1973년에는 사고능력을 상실하며, 1975년에는 스스로 생활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도 1986년까지 살아서 향년 95세의 고령을 누린다. 반세기동안의 고난을 만일 현처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장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1935년 10월, 주동병은 섬북 영평진에서 오랫동안 그녀가 돌보던 환자인 서해동과 결혼한다. 예물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혼례에 참가하였다. 결혼후, 서해동은 다시 병상에서 30여년을 보낸다. 주동병은 다시 30여년동안 그를 보살핀다.

 

이정은 장정으로 인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감사기와의 사이에 친자식이 없다. 그러나, 20여명의 열사들의 유자녀들을 양자로 들여서 하룡으로부터 "두 명의 모범간부, 한 쌍의 혁명부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955년 해방군에서 정식으로 계급을 부여할 때, 이정은 유일하게 소장(少將)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