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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만주국의 정부기관 및 요인

by 중은우시 2008. 2. 19.

 

만주국은 군주국이고, 행정기구는 국무원이며, 그 수장은 총리이다. 수도는 신경특별시(新京特別市, 지금의 장춘)였다.

 

황제의 아래에 4부2원2국이 있었는데, 4부는 상서부(尙書府), 궁내부(宮內府), 제사부(祭祀府), 참의부(參議府)이며, 2원은 입법원(立法院), 국무원(國務院)이고, 2국은 심계국(審計局), 각외국(各外國)이었다. 국무원의 아래에는 각 위원회, 총무청(總務廳) 및 흥안청(興安廳)이 있었다. 총무청은 만주국정부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군사부(군사고문부), 민생부(금연총국), 문교부, 외교부, 사법부(최고법원, 최고검찰원), 실업부(나중에 흥농부와 근로부로 분리), 교통부(우정총국), 재정부(나중에 경제부), 후생부, 신경특별시(수도경찰청), 각성공서(각시, 현, 기공서). 각부장관은 부장이라고 부르나, 실제 권한은 일본인이 맡았던 차관의 수중에 있었다. 일본인은 국무원총무청장관을 맡았는데, 실질적인 총리역할을 했다. 총무장관은 구정덕삼(駒井德三)이 맡다가, 후임으로 성야직수(星野直樹), 무부육장(武部六藏)이 차례로 맡았다. 각부의 일본인 차관은 매주 화요일에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서 국가의 정책과 구체적인 사무를 결정했으며, "화요회"라고 불렀다.

 

만주국의 입법기관은 입법원인데, 제1대 입법원장은 조흔백(趙欣伯)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입법권한은 관동군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만주국은 명문의 헌법은 없었고, 각종 법률이 헌법을 대신했다. 만주국의 자문기관은 참의부인데, 수장은 의장으로 불렀고, 장식의가 담당했다. 만주국의 사법기관은 최고법원인데, 제1대 최고법원장은 임계가 담당했고, 최고검찰원장은 이반이었다. 궁정기구는 궁내부가 있는데, 희흡이 장관을 맡았따.

 

<<국본전정조서>>에 따라, 만주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신도교의 천조대신을 모셨고, 국가에 "건국신묘"를 두었다. 만주국의 궁내에 설치한 제사부는 천조대신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일본신도는 만주국에서 국교의 지위를 누렸다.

 

1932년 3월 1일 <<건국선언>>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만주국"을 건립했다. 3월 8일, 부의는 일본군에 의하여 비밀리에 장춘에 도착하여 9일 집정에 취임한다. 10일, 정효서를 국무총리, 장경혜를 참의부의장, 장식의, 사개석, 희흡등을 민정, 외교, 재정부장에 임명한다. 부의가 집정에 취임하는 날, 일본관동군사령관 본장번과 밀약을 체결하여, 만주국의 국방, 치안, 철로, 항만, 항공등을 일본이 관리하도록 약정한다. 일본인은 '만주국'의 관리가 되며, 이들의 임면권은 관동군사령관이 보유한다. 9월 9일, 일본정부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한 후, 9월 15일 정효서는 일본의 주만주국특명전권대사인 무등신의와 <<일만의정서>>를 체결하여, 일본 및 일본국민의 만주국내에서의 기득권을 보호하기로 하고, 무기한 군대주둔권을 얻는다. 각종 공개, 비공개의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만주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대권을 장악한다. 만주국은 독립국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일본침략세력과 중국봉건잔재세력이 상호 결탁하여 탄생한 허수아비정권일 뿐이다.

 

정부요인들을 살펴보면,

 

애신각라.부의 : 황제

 

정효서(1860-1938) : 만주국총리. 이홍장의 막료를 거처 청말인 1891년 일본으로 가서 주일대사관서기관, 주고베, 오사카총영사를 지낸다. 1894년 청일전쟁후 귀국한다. 중화민국건국후에도 청나라에 충성한다. 1923년에는 부의의 명을 받아 북경으로 가서 총리내무부대신을 맡는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복벽활동을 벌이고, 1931년후 부의에게 일본에 의탁하도록 권유한다. 1932년 만주국이 건립되면서 국무총리 겸 문교부총장을 맡는다. 1935년 하야하나, 계속 일본을 위하여 일한다. 1938년에 장춘에서 사망하다.

 

장경혜(1871- 1959 ) 참의부의장. 만주국총리. 장작림계열의 군벌출시 1924년 북양정부 육군부총장, 실업부총장을 지냄. 1931년후 친일파가 됨. 1934. 5. 이후 정효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됨. 1945년 소련군에 체포. 중국에 인도됨. 요녕성 무순전범관리소에 구금.

 

사개석(1878-1946) 외교부장관. 대만인으로 만주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후, 일본어를 배우고, 이등박문의 통역을 함. 일본명치대학 법률계 졸업. 귀국후 천진에서 장훈의 밑에서 일을 함. 1915년 일본국적을 포기하고, 중화민국국적을 취득. 장훈의 복벽사건때 가담함.

 

장식의(1885- 1956 ) 장작림 휘하의 군벌. 9.18사건후 일본관동군에 3개월간 연금. 일본ㅇ 투항하여 봉천성장을 맡음. 만주국건립후 민정부장관과 봉천성장을 맡음. 1945년 소련군에 체포, 중국에 인도. 1956년 무순전법관리소에서 병사.

 

조흔백(1890-1951).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생활. 명치대학 법학박사. 1926년 처자를 데리고 심양으로 귀국. 장작림의 동삼성보안사령부 법률고문을 맡음. 봉천친일파로 유명함. 만주국의 산파로 불릴 정도임. 만주국의 국명, 신경의 수도명칭도 그의 아이디어임. 봉천시장, 입법원장, 화북정무위원회고문등의 직위를 맡음. 1945년 일본투항후에 북평제1감옥에 수감됨. 다만 보석으로 풀려나서 지냄. 동경국제전범재판때 증언,증거제출을 거부함.

 

임계(1885- ? ). 만주국 제1대 최고법원장. 와세다대학 경제학과졸업.

 

이반      최고검찰청장

곽문림   제10관구사령관 중장

여몽령   통신대장 소장

유분      보병제3여단장 소장

장병철   헌병훈련처간사 소장

염전발   법무대신

장환상   참의

황부준   농무대신

원경청   하얼빈시장

우정원   경제부대신

우경도   근로부대신

조병심   강상군사령관 중장

곡병선   사평성 성장

이문룡    제4관구사령관 중장

소옥심    제2관구사령관 중장

동형(만주족) 국군사부참모장 소장

헌균(만주족) 제2관구처장 소장

조경창    강상군함대사령관

곡차형    교통부대신

조추항    3관구사령관 중장

왕효인    2관구군법처장 소장

왕현위    총무청차장

완진탁    외교부대신

왕지우    제1관구사령관 상장

주대로    제8관구사령관 중장

조위       제8관구참모장 소장

임광복    제3관구사령관 소장

유현량    제17여단장 소장

전명세    후생붇신

왕자연    빈강성 성장

곽약림    제11관구사령관 중장

제화정    수도경찰총감

 

여기에서 보다시피, 관리들 중에서 만주족은 거의 배제되어 있고, 친일적인 성향의 한족들이 주요한 직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실권을 지닌 차관은 일본인, 명목상의 장관은 한족, 그리고 부의와 만주족은 철저히 고립시키는 책략을 썼던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