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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국민당은 대륙의 국보를 어떻게 대만으로 옮겼는가?

by 중은우시 2008. 3. 21.

 

1948년 12월 27일, 국민당의 제1차문화재가 대만의 기륭(基隆)에 도착했다. 당시 남경에서 대만으로 옮겨온 문화재는 3차로 나누어졌고, 제2차, 제3차는 각각 다음 해 1월 9일과 2월 22일에 도착했다. 이들 문화재는 주로 당시 북경고궁박물원의 2972상자, 중앙박물원의 852상자의 서화, 자기, 옥기 및 중앙도서관, 북평도서관의 선본도서 및 외교부조약자료등 합계5000여상자였다. 대만당국은 이들 문화재를 기초로 "타이페이고궁박물원"을 건립하였고, 오늘날 남북 2개의 "고궁박물원"이 존재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문화재의 이전은 먼저 대일항전으로 남천(南遷)이 이루어지고, 나중에 내전으로 대만으로의 이전이 이루어졌다. 1948년 11월 서주회전이 끝난 후, 장개석은 남경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는 나중에 몸을 피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대만을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량의 황금, 기계설비, 심지어 공장까지 대만으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전시에 남경고궁박물원에 보관하고 있던 원 북경고궁에서 남으로 이전시킨 문화재정품과 남경중앙박물원, 국립중앙도서관, 중앙연구원의 수장품을 대만으로 이송시켰다.

 

1931년, 일본침략군이 동북지역을 장악하자,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당정부는 문화재남천계획을 세운다. 1933년부터, "문화재대이전"이 시작되는데, 주로 고궁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가 중심이었다. 진품은 12년에 걸쳐 북경에서 상해, 남경을 거쳐, 사천, 귀주등 후방으로 이송되었고, 항전이 끝났을 때, 다시 남경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폭발하고, 이 남천문화재들은 북경으로 되돌아가기전에 그중 정품들은 국민당의 기밀자료와 함께 대만으로 보내어지게 된다.

 

제1차문화재는 1948년 12월 20일 남경 하관을 떠난다. 운송을 책임진 해군상륙정은 "중정함(中鼎艦)"이었다. 당시의 국면은 이미 아주 불안정했고, 많은 사람들은 배를 타고 대만으로 난을 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궁박물원에서 70여년간 일했던 나지량 노인의 회고에 의하면, 해군부의 인원은 "중정함"이 기륭으로 떠날 때, 가족과 짐을 싣고 따라갔다. 일시간에 배는 사람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문화재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었다. 책임자인 항립무(杭立武)는 이런 혼란을 해결할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저, 해군사령관 계영청이 사람들에게 다른 배를 마련해서 가족들을 태워주겠다고 해서야 겨우 혼란이 진정되었다.

 

제3차문화재를 운송할 때는 이미 1949년 1월말이었다. 도망치는 것은 두달전보다 더욱 급박했다. 이번에 운송을 책임진 것은 "곤륜호"였다. 이 배가 도착하자, 해군부의 가족들은 앞다투어 배에 올랐다. 문화재상자를 실을 때, 이들 사람들과 뒤섞였다. 항립무는 이전의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고, 계영청을 찾았다. 배위에 탔던 사람들은 눈물로 호소하며 목숨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들에게 다음 배를 타도록 권하던 총사령관 계영청까지도 눈물을 흘렸다. 할수없이, 문화재의 안전이 약간 문제되더라도 이들을 모두 태우고 떠나게 된다. 거러나, 이들 인원이 배안의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게 됨에 따라, 일부 문화재는 싣지를 못해서 대륙에 남겨두게 된다.

 

문화재가 대만에 도착한 후, 먼저 타이중시의 사탕공장 창고를 빌려서 보관한다. 때마침 사탕을 만들지 않는 계절이어서 거기에 놔둔 것이다. 보관조건은 아주 열악했다. 1950년 4월이 되어서 타이중의 교외인무봉향 길봉촌의 창고가 완성되고, 문화재는 새로운 창고에 보관되게 된다. 1965년 11월 12일,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건립되면서, 국보는 마침내 적당한 보존과 전람장소를 갖게 된다.

 

대만으로 옮겨진 5000여상자의 문화재,자료는 모두 문화재전문가인 옹문호등이 골라뽑은 정품이었다. 타이페이고궁박물원의 진관지보로 불리우는 모공정(毛公鼎),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옥조각 "취옥백채", "육형석", 송나라의 여요자기, 전세서화, 청궁복식등이 그것이다.

 

모공정이 유명하게 된 것은 거기에 쓰여진 32행 497자의 명문이다. 청동기의 천하제일명문이라고 불리운다. 이는 서주말기 주선왕때의 기물인데, 50여킬로그램이 나간다. 모공정은 주선왕때의 대신인 모공이 주왕의 은덕에 감격하여 만든 것이다. 명문은 한편의 완전한 '책명"이고, 주선왕의 모공에 대한 임명과 격려를 담고있다. 주선왕은 모공이 나태하지 않고, 민의를 막지 않고, 과부홀아비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칭찬하면서 모공에게 주천자집안일과 내외대사를 처리하는 중임을 맡긴다. 이처럼 오래되고 완전한 문헌은 찾기 힘들다. 곽말약은 이를 "<<상서>>1편에 비길만하다"고 하였으니, 무가지보이다.

 

모공정은 1850년 섬서 기산에서 출토되었고, 섬서골동상인 소억년을 거쳐, 저명한 금석학자인 진개기가 많은 돈을 주고 사들였다. 그리고 밀실에 보관했다. 나중에 대수장가 섭공탁의 수중에 들어간다. 항전승리후 섭가가 기울면서, 문화재를 팔아서 생활했다. 모공정은 상해상인 진영인이 사들이고, 1946년 남경정부에 헌납한다. 국민당의 문화재와 함께 대만으로 가게 된 것이다.

 

<<쾌설시청첩>>은 고대 대서예가인 왕희지의 4행첩으로 모두 28자이다. 왕희지서예의 전형적인 대표작이다. 글자는 기세가 강하고, 필법이 표일하여, 건륭황제에 의하여 28개의 여주(驪珠)라고 찬양되었었다. 나중에 이 첩은 왕순의 <<백원첩>>, 왕헌지의 <<중추첩>>과 함께 삼희(三希)라고 불리운다. 현재 이 '일희'는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 있고, 다른 '이희'는 북경고궁박물원에 있다. 사실 이 '삼희'는 모두 대만으로 갈 뻔했다. <<쾌설시청첩>>은 황궁문화재를 조사하면서, 부의의 짐에서 찾아낸 것이고, 원본을 북평고궁박물원에 보관하였다. 1933년, 문화재남천과 더불어 남경으로 간다. <<백원첩>>과 <<중추첩>>은 원래 부의의 서모인 근태비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곽보창에게 팔아버린다. 1935년, 곽보창은 장상엄(나중에 타이페이고궁박물원 부원장이 됨)에게 감정을 받는다. 1949년 곽보창의 아들인 곽소준은 <<중추첩>>과 <<백원첩>>을 가지고 대만으로 간다. 장상엄을 만나서 이를 국가에 절반은 헌납하는셈체고 절반정도의 가격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 대만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당국에서 돈을 내지 않았다. 나중에 대륙에서 35만홍콩달러를 주고 '이희'를 사들였고, 북경고궁박물원에 보관한다. 이리하여, '삼희'는 서로 다른 고궁박물원에 나뉘어져 보관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