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국은 모두 알다시피 장개석(蔣介石)의 둘째아들이고, 장경국(蔣經國)의 동생으로 장씨집안사람이다. 비록 중국정치에서의 영향력이 부친이나 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쨌든 일세의 풍운인물이다. 다만, 그의 신세내력에는 남에게 말못할 고충이 있었다.
개략 1950년을 전후하여, 어떤 사람이 장개석과 장경국은 모두 혈액형이 O형인데, 장위국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연구를 시작했고,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혈육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의학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혈액형이 다르다는 것만을 가지고 친혈육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위국은 장개석과 혈액형이 다르고, 대계도(戴季陶, 장개석의 친구로 국민당원로)의 아들인 대안국(戴安國)과 혈액형이 같다"는 소문이 소리없이 퍼져갔다.
1949년, 대계도는 자살하고, 이후 장위국의 관직생활은 계속 순조롭지 못했다. 장위국은 그렇게 좋은 가족배경을 가지고서도, 관운은 좋은 편이라 할 수 없었다. 그는 소장에서 중장이 되는데 8년이 걸리고, 중장에서 상장을 다는데 15년이 걸렸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당시 대만국민당의 정계에서는 여러가지 억측이 떠돌았다: "장위국은 분명히 장씨집안의 친혈육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홀대를 받을리가 있겠는가. 그의 관직생활은 왜 이렇게 평탄치가 못한가."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이 사망하자, "장위국의 성은 대씨이고 장씨가 아니다"라는 것은 하룻밤만에 대만국민당의 당정계인사들 사이에서 핫이슈가 되어버렸다.
장위국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일까? 장씨왕조의 비밀을 털어놓다가 살해당한 강남 선생의 <<장경국전>>에 따르면, "이 아이의 내력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또한 누구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견해는 그의 모친은 일본여자이고, 어렸을 때 장씨집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부모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장위국이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의문이 있어왔다. 모친은 누구인가? 부친은 대계도인가, 장개석인가? 만일 장개석의 아들이라면, 왜 장위국은 장씨왕조에서 계속 주변을 맴돌았는가? 만일 대계도의 아들이라면, 왜 대계도의 생전에 그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장개석은 자기 아들(장경국)이 있는데도 왜 그를 양자로 삼았는가?
장위국이 중일혼혈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장개석과 대계도가 일본유학을 할 때 알게된 일본여자가 낳은 자식이다. 그러나, 이 일본여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나뉜다. 일설에 의하면 진연미지자(津淵美智子)라고 한다.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에 대하여도 설은 나뉜다. 당시 청나라정부는 일본정부당국에 손중산을 체포하도록 재촉하였는데, 외교관계에 따라 일본정부는 겉으로는 응락하였지만, 암중으로 손중산에게 통보하였고, "흑룡사(黑龍社)"를 파견하여 그를 보호했다. 장개석, 대계도는 자주 "흑룡사"에서 손중산과 만났다. "흑룡사"에서 그들은 젊고 예쁜 진연미지자를 만나게 된다. 진영미지자는 "흑룡사"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다. "흑룡사"는 표면적으로는 민간조직이지만, 실제로는 반관반민의 조직이었다. 일본인들은 손중산의 친구인 장개석과 대계도가 중국혁명의 골간이라는 것을 알고, 나중에 혁명이 성공하면 국가의 동량이 될 것으로 알았다. 이후 중일관계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인들은 두 사람을 지원했다. 이들 혁명엘리트들이 젊을 때 힘을 써서 그들을 배양하고, 일본인에 대한 적대심을 없애고, 그들이 일본에 호감을 갖도록 하고자 했다. 일단 이들 혁명세력이 힘을 얻게 되고, 새로운 중국정부가 성립되면, 이들은 반드시 일본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고, 동아시아에서의 발언권도 더욱 커질 것이다. 진연미지자는 바로 이렇게 일본정부에 의하여 중국유학생의 곁에 심어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흑룡사"의 일본인들이 고르고 고른 미녀였고, 장개석과 대계도는 한창 때였으므로, 첫눈에 진연미지자의 미모에 끌리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열렬히 따라다닌다. 진연미지자는 두 사람과 관계를 가졌고, 오래지 않아, 장위국이 일본에서 출생한다. 출생한 후에 중국으로 보내어져 장개석이 기른다. 이것이 하나의 견해이다. 또하나의 진연미지자의 신분에 관한 설은 그녀는 가이샤(藝妓)이며, 일본에서 대계도와의 사이에 대안국을 낳은 후, 대계도를 따라 상해로 왔고, 장위국을 낳았는데, 이후 중국의 시국이 어지러워 일본으로 되돌아간 후 다시 중국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계도는 양필(良弼)이라고도 하며, 자는 선당(選堂)이다. 원적은 절강성 오흥 대가촌이고, 사천성 광한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름을 여러번 바꾸었는데, 먼저 대전현(戴傳賢)이라고 하였고, 나중에 반청혁명에 가담한 후에는 대천구(戴天仇)라고 하여, 청나라와 불공대천의 원수임을 나타냈다. 다시 장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대계도라고 하게 된다. 이는 장사의 시조인 도주공(陶朱公)을 따른다는 취지이다. 손중산의 기요비서를 맡은 바 있고, 손중산이 죽은 후에는 장개석을 따랐다.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법명을 불공(不空), 불동(不動)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계도라고 부르는 경우가 가장 많다.
장위국의 생모에 대한 또 다른 버전은 <<진결여회고록>>에 쓰여 있다. 장위국은 애자(愛子)라고 부르는 일본아가씨와 대계도의 사이에 태어났는데, 애자는 아들을 데리고 중국에 와서 대계도를 찾았다. 대계도는 이미 결혼하였고, 자녀도 있어 그녀와 함께 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모자를 만나지 않았다. 애자는 화가나서 아들을 버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는데, 장개석이 이 아이가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친구의 혈육이라는 것을 고려해서,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1996년, 장위국의 80회생일에, 장위국은 <<연합보>>기자인 왕사순과의 40여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정리해서, <<천산독행-장위국인생여행>>이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개석이 대계도와 일본에서 함께 살 때, 대계도는 현지의 간호사인 중송금자(重松金子)를 알게 된다, 서로 알고 지내다가 금자가 임신을 한다. 그리고 민국5년 10월 6일에 아들을 낳는데, 이 아들이 바로 장위국이다. 금자는 장위국을 낳고 몇년이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 생부인 대계도의 정실부인인 유유항(鈕有恒)은 성격이 불같았다. 만일 남편이 외도하였다는 것을 알면 어떤 짓을 벌일지 몰랐다. 다행히도 같은 일본에 살고 있었지만, 이 사실은 부인에게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유항은 중송금자라는 여자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대계도는 그녀에게 이를 속이기 위하여 친구인 장개석에게 부탁하여, 장개석의 아들로 올리게 한다. 통통한 이 아이는 중국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 산전순태랑에 의하여 중국으로 데려가게 되고, 상해에서 장개석에게 넘겨진다. 장개석은 아이의 이름을 "위국"으로 짓고, 상해에서 알게된 부인 요씨에게 부양하도록 부탁한다. 당연히 장위국은 장개석과 중송금자사이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지만, 개략적인 내용은 앞의 버전과 일치한다.
이상의 주장들을 종합하면, 장위국의 생모는 신분이 미천한 일본여자이다. 그리고 그녀는 장위국의 일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장씨왕조의 권력중심에서 장위국의 생부가 누구냐는 것은 장위국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대안국, 장위국이 모두 장개석이 일본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나중에 대안국은 대계도에게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 장위국만 남겨놓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대안국과 장위국은 부모가 같은 친형제라는 것이고, 장경국과는 동부이모의 형제라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보면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점도 있다. 당연히, 대안국과 장위국은 모두 대계도와 일본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장위국에 따르면, 대안국은 대계도와 중국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며, 최소한 대안국과 장위국은 같은 모친의 소생은 아니라고 한다.
또 하나의 견해에 따르면, 장개석과 대계도는 함께 일본하녀와 동거했는데, 이때 대계도는 장기간 문란한 생활을 하여, 이미 악질을 얻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다음 해에 하녀가 아들을 하나 낳는데, 그가 바로 장개석의 둘째아들 장위국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대계도가 1943년 손중산탄신기념일에 중앙정치학교에서 강연할 때 한 말이라고 하며, 그곳 신문학과의 실습신문인 <<남천신문>>에 발표했다고 하는데, 사회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1986년, <<장위국보도>>가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장위국이 스스로 진술한 집안이야기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장위국에 따르면, 그는 국민당의 원로이자 전 고시원원장인 대계도의 아들이라고 한다" 1919년, 그가 4살 되었을 때, 장개석에 의하여 거두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장개석은 이미 장경국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왜 장위국을 양자로 받아들였을까? 이에 대하여는 모친의 명을 받아서라고도 한다. 원래 장개석의 모친인 왕채옥은 1887년 장개석을 낳은 후, 또 다른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서청(瑞靑)이다. 서청은 3살때 요절했다. 현지의 풍속에 따르면, 그도 장씨집안의 자식이다. 장개석이 아들 장경국을 낳자, 모친 왕채옥은 장경국을 서청에게 양자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장개석에게는 후사가 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장씨혈맥을 잇기 위하여 장개석은 다시 대계도의 어린아들을 받아서 양자로 삼은 것이고, 측실인 요씨에게 부양을 맡겼다. 이름은 위국으로 짓고, 아명을 건호(建鎬)라고 한다. 두 아들을 일경일위(一經一緯), 일풍일호(一豊一鎬)로 하여 짝을 맞추게 된다.
또 하나의 견해는, 장개석과 대계도는 일본여자와 동거하였는데, 당시에는 아직 친자감정이라는 것이 없어서, 낳은 자식이 누구의 자식인지 둘 다 알 수가 없었다. 대계도는 공처가여서, 이 아이는 장개석이 기르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장위국의 신세내력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의문이 많다. 1921년 3월 11일의 장개석일기를 보면, 장위국의 모친은 이해 봄에 죽었다. "아핌에 일어났다. (대)계도의 글을 받아서, 위아(장위국)의 생모가 난산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그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평생의 유감으로 여길 것이다. 이를 생각하니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이로써 볼 때 장위국의 생모는 대계도와 연락을 유지했던 것이다. 장개석도 장위국의 모친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장위국의 성장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훨씬 컸었다.
1989년 1월 11일, 장위국은 <,장경국총통서거1년의 느낌>>이라는 제목으로 타이페이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처음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장위국은 장개석이든 대계도든 누구의 아들이든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장경국의 신세내력에 대하여는 대만이 정계의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장위국 본인에게 있어서는 누구의 아들이든 스스로는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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