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진인각(陳寅恪) : 가장 박학다식했던 학자

중은우시 2007. 7. 6. 13:18

 

 

진인각(陳寅恪, 1890-1969)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했고, 경사(經史)등 고전을 읽었다.  13살때인 광서28년(1902년),  진인각은 형인 진형각(陳衡恪)을 따라 일본으로 가서 4년간 공부하게 된다. 소압홍문학원(巢鴨弘文學院)에 입학해서 금방 일본어를 익힌다. 17세에는 귀국하여 복단대학(復旦大學)에 입학한다. 1910년에는 국비유학생시험에 합격하여 독일, 프랑스로 유학한다. 베를린대학, 쮜리히대학, 파리고등정치학교에서 공부한다. 1914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하는데, 이번 유럽유학기간은 5년이었다. 1918년에는 강서성 관비유학생으로 자금지원을 받아 다시 출국하여 유학한다. 이 번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Pali Language)를 2년간 배우고, 1921년 9월, 다시 독일 베를린대학에 가서 동방고문자학과 중앙아시아고문자학 그리고 몽고어를 배운다. 이후 다시 취리히대학, 파리대학, 하버드새학, 베를린대학 동방연구소등을 옮겨다니면서 공부한다. 1925년에야 독일에서 중국으로 귀국한다. 이 세번째 유학은 7년간이었으며, 이때 그는 이미 37세의 나이였다.

 

진인각의 세번에 걸친 16년의 해외유학을 한 것이다. 그의 처음 목표는 "비교언어학"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고금의 언어를 익힌 것이다. 진인각은 언어의 천재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살펴보면, 진인각은 최소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의 4개 현대언어는 읽고, 듣고, 말하고, 쓰는 것이 모두 능통했다. 이외에 러시아어, 티벳어, 몽고어, 만주어, 한국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힌두어, 이란어, 히브리어, 돌궐어, 동투르크어, 회흘어, 토카르어(Tokhar), 서하어(西夏語), Kharosthi어등 20종 고금문자를 익현다.

 

당시 진인각은 학술계에서 중국의 "가장 희망적인 학자"라고 불리웠다. 그가 유학생활중에 남긴 독서노트가 지금까지도 64권 남아 있는데, 그중, 티벳어가 13권, 몽고어가 6권, 돌궐어가 1권, 회흘어가 14권, 토카르어가 1권, 서하어가 2권, 만주어가 1권, 한국어가 1권, 중앙아시아/신강어가 2권(그중 한 권에는 독일어로 투루판출토문물이라고 적혀 있음), Kharosthi어가 2권, 산스크리트어 10권, 팔리어 1권, 자이나교 1권(그중 산스크리트어 라틴자모로 쓴 <<일체유부율>>경문), 마니교 1권, 힌두어 2권이 있다. 러시아어1권, 이란어 1권, 히브리어 1권, 동투르크어 1권도 있다. <<법화경>>, <<천태범본>>이 각 1권이 있다. 이와 같이 남아있는 64권의 노트도 그가 쓴 전부는 아니다. 학술계에서는 진인각이 쓴 이런 노트들을 연구하면서, 그의 연구범위가 얼마나 넓고 그의 학문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독일에 유학했던 나가륜(羅家倫)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박학에서 정심한 것으로 발전한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진인각의 이같은 깊이있는 외국어실력은 고홍명을 훨씬 넘어선다. 여기에 그의 가학(家學)까지 더해지고(부친과 조부는 모두 청나라말의 유명학자), 또한 그는 놀라운 기억력까지 보유하고 있어서, <<13경>>은 모두 외우고 있었다. 그 외에 고금의 전전에 능통했고, 한문이외의 다른 여러 언어문헌에서 사료를 찾는데 능숙했다. 이런 실력은 확실히 광세기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인각은 구미에 오랫동안 유학하면서도 정식으로 학위(석사, 박사)를 취득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국외에는 아직까지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의 전공이 개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짜 지식을 위하여 공부했고, 여러 분야를 섭렵했다. 저명한 학자인 소공권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나는 일부 중국학자들이 구미대학에서 여러 해동안 공부하면서 그저 학문을 추구하고, 학위는 추구하지 않는 경우를 보았다. 그중 진인각 선생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진정한 학문을 지닌 사람은 석사, 박사의 직함이 필요없다. 불행한 것은 많은 유학생들이 학위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학교, 학과, 과정 심지어 논문제목을 선정함에 있어서까지, 어려운 것은 피하고 쉬운 것을 택한다. 그들은 학위는 얻겠지만, 학문은 별로가 되는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또 다른 일부는 외국에서 몇년간 구르다가 귀국후에 스스로 일찌기 어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가짜학위를 내세워서, 국내교육계와 기타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북경대학 국학연구소와 청화대학 국학연구원은 모두 현대과학적인 방법으로 국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실력을 갖춘 연구교수들을 모셨다. 채원배, 조운상의 두 총장은 고심끝에 뽑았는데, 처음에는 장태염(章太炎), 양계초(梁啓超), 호적(胡適), 섭덕휘(葉德輝), 나진옥(羅振玉), 왕국유(王國維)등 대학자들을 모셨다. 심지어 오복(吳宓), 이제(李濟)와 같은 뛰어난 성과를 나타냈던 학자들마저도 연구학자로 초빙받지 못했다(재주가 뛰어났던 이제도 겨우 강사로 초빙될 정도였다). 이를 볼 때 기준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수 있다. 청화국학연구원이 진인각을 연구교수로 모시기로 결정했다는 것에서도 그의 실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알 수 있다.

 

진인각은 부임후, 청화연구원의 연구생지도교수 겸 북경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불교전적과 변강사(邊疆史)에 대하여 연구, 저술활동을 했다. 그가 강의할 때면 여러종의 언어를 사용하고, 방증을 제시하였는데, 경전을 인용하기도 하였는데, 모두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문자의 출처는 아주 정확했고, 이어지는 설명도 아주 탁월했다. 이후 몇년동안<<청화학보>>, <<중앙연구원역사연구소집간>>등의 간행물에 40여편의 논문을 실었다. 당시의 연구원주임인 오복은 진인각을 가리켜, "전 중국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