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보의 이름은 종린(鍾麟)이며, 자가 영보이다. 섬서성 장안 사람이며, 1903년 8월 20일 태어났고, 1925년 4월 황포군관학교 4기로 입학하며, 대계도, 왕백령의 추천하에 중국국민당에 입당한다. 이구 국민혁명군제1사단(호종남 사단장)에서 근무한다.
1935년 여름, 당시 단장이던 그는 처가 외도를 했다고 생각하여 처를 죽여버리는 "단장고성살처"의 참극을 저지르고 장개석의 명령하게 "모범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77사변이 일어나면서 국민정부가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을 모두 현역에 복귀시킬 때, 원래의 계급장을 달고 다시 51사단장 왕요무를 따라 전투에 참전한다. 이 때 그는 "장영보" 또는 "장종령(張宗靈)"으로 개명한다. 항일전쟁때 그는 왕요무를 따라 일본군과 치열하게 격전을 벌인다. 1937년에는 51사단이 상해로 가는데 그는 153여단 205단을 이끌고 송호보위전에 참전한다. 그는 10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그가 지휘하는 단은 7번 돌격하여 일본군 800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
1938년, 무한회전에서는 설악이 지휘하는 제9전구군대가 역팔자진법으로 적을 유인하여, 만가령에서 일본군 106사단을 포위하였는데,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고지 장고봉을 점령하여, 오히려 전황이 위험하게 되었다. 이때 장령보는 결사대를 이끌고 야간에 좁은 길을 뚫고 지나서 장고봉을 다시 탈환한다. 이때 다리에 중상을 입는다.
1943년 상덕전투에서는 장령보의 돌격대는 상덕수비군인 74군 57사를 도와서 격렬하게 전투에 참전하고 일본군을 상덕성에서 몰아낸다. 1944년 5월, 장형회전에는 참전하지 않고 육군대학에서 교육을 받는다.
1945년 4월 지강보위전에서 장영보는 제74군 58사단을 지휘하여 철산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여 승리한다. 전투후에 3등보정훈장을 받고, 제74군 군장으로 중장계급을 받는다.
1947년 5월 14일, 장영보는 74사단을 이끌고 홀로서 방부로 진공하나, 진의, 속유가 이끄는 화동야전군 1종(섭비), 4종(도용), 6종(왕필성), 8종(왕건안), 9종(허세우)의 5개 주력부대에 포위를 당한다. 74사단을 결국 무너지고, 전멸하며, 장영보는 자살로 마감한다. 이것이 바로 맹량고전투이다.
1. 고성살처(古城殺妻)
장영보장군의 이름이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단장고성살처"사건때문이다. 사건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1935년 겨울, 당시 74사단 113단단장을 맡고 있던 장영보는 전선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권총으로 처인 오매란(吳梅蘭)을 죽여버린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부부간에 갈등이 이에 이르렀는가?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하여는 몇 개의 판본이 전해지고, 심지어 약간 극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안려진 것은 이렇다. 장영보는 소문을 들었는데, 처가 외도하고 있다고 의심을 하게 되었고, 이에 화를 참지 못하고 바로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이 판본의 근거는 대체로 장영보와 같은 부대에 근무하면서 접촉했던 오려천(吳戾天)이 1984년 섬서문사자료에 발표한 <<내가 아는 장영보>>라는 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장영보는 부대에서 소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구정에 휴가를 받아 서안으로 돌아갔고, 처자를 데리고 호현의 고향에 친척을 방문했다. 구정전날저녁때 처인 오매란에게 후원에 가서 야채를 캐서 부추만두를 만들라고 시킨다. 장영보는 오매란이 허리를 숙여 부추를 뜯으려고 할 때, 등뒤에서 총을 쏘아 죽여버렸다." 그런데, 이 판본에는 헛점이 있다. 1930년대에 추운지역인 서북지역에 이미 하우스채소를 재배했다는 말인가?
최근에 본 또 다른 판본에서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장영보 장군의 미망인인 왕옥령(王玉齡) 여사가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녀는 장영보가 결혼하기 전에 우회적으로 이 일을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장영보의 대답은 "그녀가 내 물건을 가져갔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영보장군과 교분이 깊고 그의 부하로 오래 근무했던 유광우가 왕여사와 얘기할 때 들었다는 답변은 더욱 직접적이다. "그녀는 장영보의 문서를 훔쳤다" 장영보는 당시 바로 홍군과 전선에서 대항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장영보도 무관할 수 없었다. 당시의 투쟁책략이나 수단으로 봐서, 이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증거가 결핍되어 있다. 보기에 관련자들이 모두 세상에 남아 있지 않으니, 이 수수께끼가 풀릴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2. 순직사인(殉職死因)
맹량고전투에서 국군 74완편사단이 전멸했고, 장영보 장군도 순직한다. 그러나 수십년동안 그의 사인은 계속 수수께끼였다.
"피격사망설"이 있는데, 이는 대륙의 관방에서 출판한 군사전사자료나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고급장교들의 회고이다. 예를 들면, 1996년 7월 공개발행된 <<제3야전군전사>>등이다.
"전패자결설"이 있는데, 주로 중화민국시대의 관방의 견해였다. 최근들어 대륙의 매체들도 일부 방증을 내놓고 있다. 예를 들염, 화동야전군 적공부장 오헌이 당시 쓰고 1947년 8월 1일 정치부가 출판한 <<장군74사의 조사연구>>, 장영보의 유언등이 있다.
"포로살해설"이 있는데, 장영보가 패전한 후 포로로 잡혔다가 6종의 특무단 부단장인 하봉산(何鳳山)이 연수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를 때려죽였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새로 나타난 견해는, 장영보가 당시 그저 중상을 입었을 뿐인데, 6종이 이동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맹량고전투가 끝난 후, 황백도, 이천하의 두 개의 완편사단이 지척에 있었는데, 화동야전군의 각 종대는 명을 받아 신속히 전장터에서 철수하면서도 여전히 장영보의 유체를 이틀간이나 들것에 실어서 나르다가 2일후에야 매장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이상한 것은 관련된 자료중에서 마지막에 장영보와 함께 있었던 제74사단지휘부의 포로인원의 증언이나 회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아마도 현장의 목격자들일텐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이 말을 하면 수수께끼가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왕패한장 장영보전>>에 보면 제74사 치중단 1연연장인 이회승, 74사단 부사단장 구유달의 회고에 의하면 장영보 장군은 자살하였다는 것인데, 두 사람은 친히 목격한 것은 아니다)
3. 유골행방
장영보 장군이 순직한 후, 그의 유체행방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다른 판본이 있다.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장영보의 유체는 당시 화동야전군 특무단사병들에 의하여 기남현의 야저왕이라는 곳에 묻었다는 것이다. 그후 어떤 사람은 남경으로 이장하였다고 하고(장개석은 장영보를 위하여 현무호반에 능묘를 만들어 두었는데, 남경해방후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의관총이라는 견해가 비교적 많다). 어떤 사람은 안휘 제현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1947년 8월 13일, 여기서 74사단사망장병추도대회가 열렸다).
하계성이 쓴 <<민국촛점인물추적>>(강소인민출판사)라는 책에서는 또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국국추격병이 야저왕을 점령한 후, 관을 캐내서 남경으로 옮겼다고 한다. 회음을 지날 때 이미 시체가 썩기 시작해서 관을 회음성남쪽공원의 북쪽에 묻었다는 것이다. 묘는 아주 크고 기세가 있으며 약 2층높이이다. 회음해방후, 장영보의 묘는 파헤쳐졌고, 유골은 처리를 거쳐 성립회음중학 북원서쪽 6호루의 생물실험실에 두고, 교학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문혁기간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2003년말, 상해포동의 "천일정원-매괴원"에서는 장영보장군의 미망인인 왕옥령 여사가 장영보장군 영혼장례식을 거행했다.
일본군들이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 했던 장군이 같은 민족간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원인은 깊이 생각하여야 할 바가 있고, 그 결과는 아쉬운 점이 많다. 장영보 장군은 직업군인으로서 보자면, 1개사단의 병력으로 자기보다 몇 배나 많은 적과 맞서 싸웠고, 소장의 계급으로(중장은 사후 추증된 것이다), 원수 1명, 대장 1명, 상장, 중장 수명과 싸우면서,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비록 패전하여 순직하였지만, 그의 군인으로서의 생애는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투에서 살아남고, 전투에서 죽어가는 것이 군인의 숙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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