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염석산(閻錫山) : 민국군벌중 유일한 불도옹(不倒翁)

중은우시 2008. 3. 9. 00:41

글: 유조흥(劉照興)

 

풍운이 수시로 변하고, 도시에 걸린 주인깃발이 자주 바뀌던 "민국시대"에, 염석산은 산서를 38년간이나 통치하면서, 권력을 놓지 않았었다. 그 중간에 비록 중원대전실패후에 짧은 기간동안 '하야'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산서의 군정대권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 주마등처럼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민국의 정치환경하에서,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안정적으로 집권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염석산은 노련하고, 심계가 깊었으며, 바람이 부는대로 배를 몰았다(見風使舵).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앞장서서 산서에서 그에 호응했다; 원세개가 '홍헌황제'에 오르자, 그는 가장 먼저 지지한 독군의 하나였으며, "일등후"에 봉해졌다; 단기서가 정권을 잡고, 무력통일을 기도하자, 그는 "남정"에 참가한다; 장훈의 복벽사건때에는 그도 서주의 감독군단회의에 참가했다; 직계(直係)가 굴기하였을 때는, 그도 조곤, 오패부를 적극지지했다: 풍옥상이 장작림과 연합하여 오패부에 승리를 거두자, 그는 즉시 석가장으로 출병하여 직계의 구원군을 차단하고, 오패부토벌에 앞장섰다; 이후, 오패부와 장작림이 다시 손을 잡고 풍옥상을 토벌하자, 그는 즉시 안문관에서 출병하여, 풍옥상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장작림의 세력이 쇠퇴하자, 그는 '혁명'에 참가하여, 스스로 '북방국민혁명군총사령관'이 되어, 장작림의 봉천군벌을 치게 된다....

 

손중산, 원세개, 단기서, 오패부, 장작림, 풍옥상, 장개석등의 인물들에 대하여, 염석산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지지하기도 했다가 반대하기도 했다. 염석산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결정했다. 시종일관하는 것이라고는 없었고,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 고려했다.

 

민국원년에서 민국17년까지 국민혁명군은 북경에 진주한다. 짧은 17년간 12명의 원수, 32번의 내각이 들어서고, 정국은 수시로 변하고, 군벌도 얼굴을 바꾸었다. 관리들도 아침에 저녁을 기약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가장 변화막측한 시기였다. 그러나 염석산은 마치 담벼락위의 갈대처럼 왔다갔가하였으나, 산서에 대한 통치는 태산처럼 굳건했고, 대권은 항상 그가 쥐고 있었다. 그는 산서의 토황제(土皇帝)였다.

 

국민당 신군벌통치시기에 염석산은 계속 조진모초(朝秦暮楚, 아침에는 진나라, 저녁에는 초나라)하였을 뿐아니라, 산서를 계속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한번은 북방의 여러 성을 통제한 적도 있었다. 장개석의 "4.12"반혁명정변후, 염석산은 산서에서 청당(淸黨) 반공을 시행했고, 다음 해에는 부대를 이끌고 제2차북벌에 참가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세력을 산서, 수원성에서 하북, 찰합이, 북경, 천진지역까지 넓힌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강대한 지방실력파의 하나로 성장한다. 나중에 장개석과 이익충돌이 생겨, 풍옥상, 이종인등과 연합하여 장개석을 토벌하려한다. 실패후에는 대련으로 도망가서(산서는 여전히 리모트콘트롤하고 있었다), 일제의 비호를 받는다. 1936년에 홍군이 황하를 건너 동으로 넘어오자 염석산은 병사를 출동시켜 저지한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하에 염석산은 공동항일정책을 취하고, 진보인사들이 희생구국동맹회를 조직하도록 지원하고, 스스로 '회장'을 겸직한다. "7.7" 노구교사변후, 박일파등 공산당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산서청년항적결사대(신군)를 건립하고, 재2전구사령관을맡아, 지휘부를 태원등에 두고 일본군에 대항한다. 나중에 다시 장개석의 제1차반공정책에 발맞추어 희생회와 결사대를 말살하는 "12월사변(진서사변)"을 일으킨다. 이후 일본군과 결탁하여, 상호불침범의 밀약을 맺고, 공동으로 반공활동을 벌인다. 항전승리후에는 장개석의 반공내전에 적극참가하고, 상당해방구에 병사를 진공시킨다. 그는 스스로 "3개의 달걀 위에서 춤춘다"고 하였다. 수시로, 공산당과 협력하다가, 공산당을 공격하였고, 일본군과 협력하다가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며, 장개석을 지지하다가 장개석을 반대했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결정했고, 자신의 이익을 기준으로 결정했다.

 

국공내전이 끝나가면서, 염석산의 산서통치도 끝이 나게 된다. 임분, 진중, 태원등의 전투를 통해서 염석산의 부대는 전멸한다. 해방전날 광주에서 행정원장 겸 국방부장을 맡았던 그는 대만으로 건너간다. 다음해에는 총통부 자정과 국민당 중앙평의위원이 되고, 타이페이에서 한거하다가 사망한다.

 

염석산은 궁벽한 지방의 작은 군벌에서 전국적으로 중요한 지방실력파로 성장한다. 그의 세력은 4성2시에 미쳤고, 화북, 경진을 지배했ㅆ다. 한번은 스스로 국가원수를 자칭한 바도 있었으며, 중국의 정국을 가늠하는 중요한 인물중 하나였다. 이것은 민국의 정계에서는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는 연속38년간 산서를 안정적으로 통치함으로써, 민국 군벌중 유일한 '불도옹(오뚜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