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연년
글: 반세진(潘洗塵)
진연년(陳延年): 죽어도 무릎은 절대 꿇지 않는다.
1927년 7월 4일 저녁, 장개석은 중공정치국위원 겸 강소성서기인 진연년을 비밀리 형장에서 사형을 집행하게 명하였다. 사형집행인의 칼 앞에서도 진연년은 여전히 늠름하게 서 있었다. 사형집행인들이 무릎을 꿇으라고 명을 내렸지만, 그는 대의늠름하게, "혁명자는 서서 죽는 것이지 절대로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사형집행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진연년을 땅바닥에 눌러앉혔지만, 그는 바로 다시 일어나곤 하였다. 사형집행인들은 어쩔 수 없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칼질을 해서 그를 죽여버렸다. 진연년이 희생된 후, 장개석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시신을 수습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나이 겨우 29살이던 진연년이 희생된지 1년도 되지 않은 1928년 6월 6일, 진연년의 26살된 친동생으로 당시 중공중앙위원겸 강소성위 조직부장을 맡고 있던 진교년(陳喬年)도 국민당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이리하여, 앞뒤 1년도 되지 않는 기간동안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의 두 아들은 모두 자신들이 믿는 신앙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버렸다.
진연년은 안휘 회녕사람으로 진독수의 장남이다. 1919년 12월 프랑스에 유학을 간다. 1922년 6월에는 조세염(趙世炎), 주은래와 함께 여구(旅歐)공산주의조직 - 중국소년공산당을 창건하고, 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장을 맡는다. 같은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니, 중공 여구지부 책임자의 하나이다. 1925년 6월에 등중하(鄧中夏), 소조정(蘇兆征)등과 함께 세상을 놀라게 했던 성항(省港)대파업을 이끈다. 1927년 4월, 진연년은 중공강절구서기를 맡는다. 1927년 6월, 중공중앙은 강절구를 취소하고 강소성위와 절강성위를 만들게 되는데, 진연년은 중공강소성위의 서기를 맡는다.
1927년 6월 26일 오전, 강소성위 성립대회에 참석했던 진연년은 보고서를 받는데, 비밀회의장소를 알고 있던 교통원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을 위하여, 진연년은 회의종결을 선포한다. 오후3시, 문건을 정리하던 진연년은 대량의 군경에 포위되어, 체포된다.
중공당조직은 진연년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즉시 그를 구하려고 한다. 여러 곳을 통하여 진연년등은 아직 국민당에 신분이 폭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관계를 동원해서 800위안을 내고 진연년을 구해내기로 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진연년의 친구이자, 상해아동도서관의 경리인 왕맹추가 진연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해서 호적을 찾아서 도와달라고 하게 된다. 호적은 다시 자기의 친구인 국민당중앙감찰위원 오치휘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이때 오치휘는 이미 공산당과 양립할 수 없는 국민당 우파의 핵심인물이었다. 일찌기 진연년이 무정부주의를 버리고 공산당에 가입한 후, 그는 "진연년은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저주했었다. 그는 호적의 편지를 받은 후 놀라면서도 기뻤다. 급히 상해경비사령관인 양호에게 서신을 보내어, '진연년은 그 부친보다 백배는 악독하다'고 하면서 앙호에게 즉시 죽여버리라고 했다. 진연년의 행방을 계속 찾아다니던 양호는 오치휘의 서신을 받고는 아주 기뻐하며 즉시 차를 몰아 용화간수소로 가서 진연년을 심문한다.
진연년은 옥중에서 다른 상황은 알 수도 없었고, 더구나 함께 체포된 강소성위 선전부장인 한보선(韓步先)이 이미 배신한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심문을 받을 때도 자기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양호는 마지막 방법으로 한보선에게 증언을 하게 한다.
진연년이 희생된지 얼마되지 않아, 그의 전우인 조세염도 배신자로 인하여 체포되어 살해당한다. 중공중앙은 진연년, 조세염등 열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1927년 10월 24일 간행물인 <<볼세비키>>에 "조세염, 진연년 및 기타 국민당망나니의 손에 죽어간 동지를 추도함"이라는 글을 싣고, "조세염, 진연년의 두 동지의 죽음은 중국혁명의 최대손실의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호지명(胡志明)의 소개로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다
1915년, 진연년, 진교년 형제는 부친인 진독수에 이끌려 상해로 와서 공부한다. 1년후, 두 형제는 모두 복단대학에 합격한다.
진독수는 두 친아들에게 아주 엄격하게 대했다. 그는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제 2명은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을 했다. 동창들 중에서 가장 의복이 남루하고, 얼굴이 초췌한 두 사람이었다.
진연년형제는 어려서부터 사회를 개조하려는 이상과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과 외국의 복잡한 사상환경하에서 그들은 무정부부의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부친이 옛날식의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생모를 버리고, 자신과 마음이 맞는 그들의 이모와 동거하고 결혼한데 대하여 아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부친과의 관계는 계속 좋지 못했다. 그리하여 진독수가 초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 것이 그들 형제에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두 형제가 무정부주의를 버리고 독실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은 프랑스유학이후이다. 1922년 6월, 진연년은 프랑스유학중 중국공산당 여구지부의 제1차대표대회에서, 조세염, 주은래등과 함께 위원에 당선된다. 9, 10월에 두 형제는 왕약비등과 함께 프랑스공산당에 참가한다. 그들의 입당소개인은 나중에 월남공산당의 당서기가 되는 호지명이다.
최초로 노신과 연락한 중국공산당원
1924년, 진연년은 명을 받고 귀국하여, 광동으로 파견된다. 거기서 양광구위비서, 조직부장 겸 선전부장이 되어, 양광구위서기인 주은래를 도와 일을 한다. 1925년봄, 주은래는 부대를 이끌고 동정하며, 진연년이 주은래의 양광구위서기직을 물려받는다.
1927년 1월, 노신이 광주의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진연년은 현지당조직의 주요지도자로서 이 정보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노신과 연락하고 친히 그와 면담한다. 이것은 노신이 최초로 공산당원과 만나서 연락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진연년, 진독수 부자의 다툼
중국공산당내에서, 진연년은 비교적 일찌기 혁명무장을 건립하고 장악하는 것을 중시한 고급지도자의 한 명이었다. 그는 주은래와 당, 단원을 황포군관학교에 보내어, 당의 군사간부를 양성하도록 결정한다. 1924년 11월, 그는 주은래를 도와 공산당원인 서성장을 대장으로 하는 철갑차대를 조직한다. 1925년, 철갑차대를 기초로 하여, 공산당원 섭정을 단장으로 하는 독립단을 조직한다. 광동구위는 군사지식이 있는 간부를 뽑아 농회로 보니고, 농민자위군을 확대한다. 광주공단군은 공인자위대로 확대개편된다. 성항파업노동자규찰대도 조직한다. 이는 모두 당이 직접 지휘하는 혁명무장세력이고, 공농혁명운동을 지원하고 공농이익을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6년 1월, 국민당의 제2차당대회이후, 국민당내 좌파와 우파간의 투쟁은 가열화된다. 진연년, 주은래등은 "우파를 타격하고, 중립파를 고립시키며, 좌파를 확대하는 방침"을 세우고, 국민당 제2차당대회에서 우파를 철저히 타격하고 제재하고자 한다. 그러나, 진독수의 반대에 부닥친다. 3월 20일, 장개석은 중산함사건을 일으키고, 공산당원을 습격한다. 진연년, 주은래, 모택동등은 반격을 주장하나, 진독수, 장국도등의 반대와 저지에 부닥친다.
진독수등은 국민당우파와 타협하고, 양보하는 방침을 정하나, 진연년은 그에 일관되게 반대한다. 그는 구위회의석상에서 날카롭게 진독수의 "공농군중의 역량을 믿지 못하고" 행동에서 시종 국민당우파와 투장해지 못하는 것은 혁명을 죽여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는 "나와 노친네는 부자지간이다. 그러나 나는 공산당원이다. 견결히 당의 입장에 서야 한다. 우경기회주의와 타협양보정책에 반대한다" 황포군관학교의 중공조직이 광동구위에 '당무정리안'에 따라, 학교안에서 국민당에 참가한 공산당원의 명단을 내놓을지를 물어봤을 때, 진연년은 딱부러지게, "하나도 국민당에 입장표명을 ㅐ서는 안된다. 특히 공산당원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사람은 평소의 태도를 유지하라, 국민당우파의 무리한 요구는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각지 당조직에 농민운동을 조직하고, 농민자위군을 건설하도록 하였다.
1927년 3월, 진연년은 광동대표단을 이끌고 광주를 떠나 무한으로 가고, 중공제5차대회에 참석한다. 4월상순, 중공중앙 정치국회의는 장개석을 반대하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중공의 호구공작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이입삼, 진연년, 섭영진을 상해로 보내어 집행하게 한다. 장개석이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킨 사흘째 되는 날, 진연년은 상해에 도착한다. 16일, 그는 이입삼, 주은래, 나역농, 조세염등과 중공중앙상해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주은래가 초안한 <<신속히 장개석을 토벌하자>>는 내용의 전문을 논의하여 통과시킨다. 그리고 중공중앙에 연명으로 건의하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으 후, 나역농은 무한으로 이동되고, 진연년은 상해에 남겨져, 절강구위서기를 맡는다. 4월 27일 중공제5차대회가 개최되고, 진연년은 중앙위원, 정치국후보위원에 선임된다.
진연년이 절강구위서기를 맡을 때, 상해는 국민당의 백색공포하에 놓여 있었다. 많은 공산당원, 혁명군중이 체포되고 살해되었으며, 당과 노동조합조직은 파괴되어갔다. 진연년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계획적이고 단계적으로 당조직과 노조조직을 재건했다.
진독수 후손의 현황
진독수는 1947년 사천성 강진에서 병사한다. 셋째아들 진송년(陳松年)이 여러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부친의 유해를 목선에 싣고 안경(安慶) 집현관 부근의 숲속에 안장한다.
장남 진연년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차남 진교년은 혁명부부였다. 상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진교년이 살해당할 때, 딸은 아직 강보에 쌓여 있었다. 나중에 혁명자녀를 구조하는 호제회에 보내어져 양육되는데, 이후 행방이 불명이다. 진교년의 처는 문화대혁명기간중에 박해를 받아 정신이상이 되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삼남 진송년은 해방전까지 처지가 안좋았다. 1958년, 모택동이 안휘를 시찰하면서 현지 지방지도자에게 진독수 후손의 상황을 물어보고, 모택동은 그들에게 살길을 마련해준다. 진송년은 이후 현지의 작은 공장에 보내어져, 통계원으로 일하게 된다. 11기3중전회이후, 진송년은 안경시 문사관관원이 되고, 나중에 안휘성문사관 관원이 된다. 1990년대초에 합비에서 병사한다. 진송년은 아들딸을 하나씩 두었다. 아들 진장기(陳長琦)는 합비공업대학에서 일하고, 딸 진장박(陳長璞)은 안경문문관리국에서 일한다.
진독수는 후처, 즉 전처의 여동생이자, 진연년의 이모인 고군만여사와의 사이에서도 일남일녀를 두었다. 바로 진학년(陳鶴年)과 진자미(陳子美)이다.
진학년은 일찌기 북경등지에서 공부한 열혈남아였다. 항전과 혁명에도 참가하나 진독수로 인하여,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해방전에 홍콩으로 갔고, 자녀 10명을 두었다.
진자미의 일생은 굴곡이 심했다. 문화대혁명때 반동파로 낙인찍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과 기름통을 타고 홍콩으로 건너가서, 생명을 구차하게 이어간다.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갔는데, 만년의 생활은 아주 비참했다고 한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민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웅십력(熊十力): 대단하고 폭력적인 국학대가 (0) | 2008.06.24 |
---|---|
황금영(黃金榮)의 해방후 생활 (0) | 2008.06.18 |
염석산(閻錫山) : 민국군벌중 유일한 불도옹(不倒翁) (0) | 2008.03.09 |
장위국(蔣緯國)은 누구의 아들인가? (0) | 2008.02.29 |
진인각(陳寅恪) : 가장 박학다식했던 학자 (0) | 2007.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