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공상희(孔祥熙)의 말년

중은우시 2007. 6. 22. 20:53

 

 

2차대전말기, 공상희(孔祥熙)는 거액의 달러공채를 횡령한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정계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945년 5월, 그는 부득이하게 행정원 부원장의 직무를 사직하고, 7월에는 다시 중앙은행 총재의 직무도 사직했다.

 

1946년, 공상희는 상해에서 자신의 재산을 정리한 후, 옮길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홍콩이나 국외로 이전시켰다. 1947년 여름, 공상희는 고향인 산서성 태곡(太谷)으로 갔다.

 

태곡에서, 공상희는 고향친척들을 위하여 융숭하게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일일이 작별한다. 충분한 준비를 거친 후, 먼저 부인인 송애령(宋靄齡, 손문의 부인 송경령,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의 큰언니)을 먼저 미국으로 보냈다. 그 자신은 이해 가을에 상해로 갔다. 며칠 후, 공상희는 장개석 및 국민당중앙에 전보를 보내어 "갑자기 부인이 미국에서 전보를 보내왔는데, 부인이 중한 병을 앓고 있어 상황이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장개석의 비준도 받지 않고 총총 비행기표를 사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공상희는 미국에 도착한 후, 뉴욕에서 멀지 않은 리퍼데일의 호화로운 빌라에 입주했다. 이 빌라는 일찌감치 사두었던 것이고, 그와 부인 송애령은 이곳에서 오래 거주했다. 이외에 그들은 뉴욕의 교외에 160여만달러를 들여 고급주택 하나도 매입했고, 동시에, 공상희는 뉴욕의 가장 번화한 시중심인 브로드웨이의 호텔방을 장기간 임대했는데, 1일당 임대료가 150달러였다. 이는 미국의 부자들도 부러워할만한 소비주준이었다.

 

국외로 나가게 되자, 할 일은 특별히 많지 않았다. 그의 부인 송애령의 병간호를 하는 외에는 하루걸러 한번씩 뉴욕으로 가서 그의 중국은행을 살펴보았다. 1950년, 대만의 장개석 "총통부"는 그를 "자정(資政, 정치자문역)"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멀리 미국에 있었으므로, 이것은 그저 명예직에 불과했다. 공상희는 스스로 관직이 없으니 몸이 가볍다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즐겼다. 그는 이 '자유의 낙원'에서 아무 걱정없이 말년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안정된 오아시스는 아니었다.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국민당에 제공한 미국원조자금중의 상당한 부분을 국민당의 고위관료들이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먹어버렸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트루먼의 직접 명령하에, 미국 FBI는 공씨, 송씨들의 미국재산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상희에 대하여는 비밀리에 감시를 붙였다. 이로 인하여 공상희는 매일 불안하게 지내야 했다. 나중에 공상희는 미국친구를 하나 찾았고, 미국친구가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

 

먼저, 공상희와 미국친구는 여러 방면의 막후활동을 했고, 마침내 방법을 찾아냈다. 미국상원외교위원회 및 미국재무부에서 '증명'과 비슷한 자료를 공포했다. 여기에는 미국에 있는 중국은행을 포함한 모든 화교의 예금은 5000만달러를 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트루먼이 1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을 부인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공상희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일련의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뻘, 부친뻘은 역대로 표호, 상호를 운영하여 가산이 부유했었다. 그러나, 이 수십년동안 통화팽창과 전란이 빈번하여 조상의 재산은 대부분 사라졌다. 본인이 국내의 각 공상사업체에 투자한 자본금도 이번 대륙의 함락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민국이래의 내전과 대륙의 함락으로 공씨집안의 손해는 엄청나다. 이리하여 향후 생활하는데 필요한 자금정도만 남았을 뿐이다" 아주 감상적으로 얘기했고, 마치 진짜 재산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하였다.

 

이런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FBI의 감시와 조사도 은연중 종결되었고, 공상희는 위기를 넘긴 것이다.

 

1954년, 장개석은 대만에서 제2회 소위 "국민대회"를 소집했다. 공상희는 옛꿈을 되살릴 기회가 왔다고 느끼고, 대만으로 돌아가 "부총통" 경선에 참가할 생각을 했다. 조심스럽게 추진하기 위하여 대만성주석을 지냈던 위도명(魏道明)을 먼저 보내서 탐색해 보았다.

 

이때의 장개석은 더이상 공상희에게 흥미가 없었다. 그는 일찌감치 미국에 망명한 동서를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대만에 장씨왕조를 다시 건립하기 위하여, 장개석은 태자인 장경국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고,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국민당을 개조했으며 인사를 다시 했고, 진성(陳誠)등의 인물을 중용했다. 이들로 하여금 장경국을 보좌하게 한 것이다. 이런 국면이 형성되자 공상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위도명이 대만에 오자 장개석은 왜 왔는지를 금방 눈치챘다. 그래서 급히 진성과 장경국으로 하여금 이 공상희의 대리인을 막게 만들었다. 진성과 장경국은 신문에 글을 실어서, 공상희를 향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위도명과 같은 인물도 그들의 주구라고 함께 비난했다. 위도명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끼고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서 공상희에게 보고했다.

 

공상희가 다시 나서려는 희망은 철저히 부숴졌다. 이로 인하여 그는 큰 타격을 받았다. 예전에 장개석을 위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으며, 비록 성과는 없었을지라고 공로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장개석은 전혀 옛정을 고려치 않고 그저 아들만 생각하고 있으니, 생각하면 할 수록 황당한 일이었다. 이후 공상희는 다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마음 속의 정치적 욕망은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다시는 불이 붙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평소에 그는 그저 공익활동에만 참여했고, 자선기구에 기부하고, 대학에 장학기금을 건립하는 등등의 활동만 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인상은 나이들어 황혼녘에 접어든 사람이라는 것과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이가 점차 들어가면서, 공상희는 고향을 생각하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점차 강해졌다. 그는 혼자 조용히 남게 되면, 그의 고향 산서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한 후에 그는 대만으로 돌아갈고 한다. 그러나, 장개석이 환영해줄지에 대하여, 그가 보통평민의 신분으로 대만에 돌아가는 것이므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1962년 10월, 공상희는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갔다. 장개석은 공상희에 대하여 환영도 거절도 하지 않는 입장을 보였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장경국의 세력이 커졌고, 나이많은 공상희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상희는 장경국의 윗사람이었고, 이런 사람이 많을 수록 장경국에게는 불편했다. 그래서 장개석은 그저 공상희에 대하여 예의상의 방문과 담화를 했고, 그에게 "국민당중앙평의위원회평의위원"이라는 실권없는 직책을 주었을 뿐,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장개석의 태도는 공상희에게 많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만에서의 생활환경이 아주 친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만에서의 생활은 미국에서처럼 자유롭거나 편안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공상희는 대만에서 그럭저럭 3-4년을 머문후 다시 미국에 가서 병치료한다는 핑계로 1966년 2월 28일 대만을 다시 떠난다. 그리고는 다시는 대만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공상희는 옛친구들과 작별의 악수를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한 후, 공상희와 송애령은 함께 롱아일랜드 로카스트밸리의 한 빌라에 입주한다. 그는 일체의 환상을 버리고,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병치료하고, 휴양도 한다. 생활은 아주 조용하고 편안했다.

 

1967년 7월 22일, 공상희는 침대에서 일어난 후,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신문을 보고 있는데, 돌연,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집안 사람들은 급히 그를 뉴욕의 병원으로 보냈다. 의사들은 그의 병세를 잠시 안정시키기는 했으나, 8월 10일 다시 악화되었고, 8월 16일 뉴욕병원에서 사망한다. 이 때 그의 나이 8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