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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강건성세(康乾盛世)는 고구마때문이다.

by 중은우시 2008. 1. 16.

작자: 미상

 

최근 들어 "강건성세"는 핫이슈이다. 텔레비젼이나 미디어에서도 자주 방송할 뿐아니라, 일부 역사학자들도 이를 고취시키고 있다. 마치 통치자의 영명함이 중국에 번영과 창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사실이 정말 그러했던가? 역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시기에 무슨 과학기술발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화적으로 번영했던 것도 아니며, 사상적으로는 정체되고 퇴보했다. 공상업은 정부의 억제를 받아 발전하지 못했고, 명나라때부터의 중국상공업과 수공업의 번영은 이 시기에 이르러 크게 쇠퇴한다. 이전과 비교하여 유일하게 발전한 것은 인구의 현저한 증가뿐이다. 이는 이전 역사상 최고인구기록의 4배에 달할 정도이며, 이로써 번영한 것처럼 보이는 광경을 보였던 것이다.

 

왜 이 시기에 인구가 이렇게 늘어났을까? 청사학자들은 영명한 청나라의 통치가 가져온 결과라고 한다. 그들이 드는 첫번째 이유는 청나라의 강역이 늘었다는 것이다. 청나라가 확장한 강역은 중국에 얼마나 많은 인구증가요인이 되었을까? 청나라 전성기의 영토면적은 1300만평방미터이다. 명나라때는 920만평방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청나라와 명나라의 강역을 비교하자면, 청나라에서 늘어난 것은 몽고와 신강북부지역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원래 주민이 적게 사는 곳이고, 이것이 인구증가의 주요한 요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청나라는 명나라에 비하여 동북과 서남의 강토는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국토면적만 고려한다면 청나라와 명나라의 인구는 비슷한 것이 마땅하다.

 

청사학자들이 드는 두번째 이유는 청나라통치자들이 근면했고, 수리와 농업을 중시했다는 점을 든다. 중국인구를 살펴보면, 성세로 불리우는 "문경지치", "정관지치"때는 6000만에 불과했고, 가장 많은 송나라와 명나라중엽도 1억에 불과했다. 일단 중국인구가 8000만에 도달하면, 사람과 토지간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났고, 쉽게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결국 중국의 토지가 양육할 수 있는 인구는 한도가 있다는 것이고, 농업생산은 "땅이 많다고 많이 생산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력수준의 제한을 받는 것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농업생산을 비교하면, 생산방식은 변한 것이 없다. 농업생산에서 유일하게 바뀐 것이 있다면 바로 고구마등 미주지역에서 도입한 작물이 중국에서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고구마의 보급이 바로 강건성세를 만들어 냈다고 본다.

 

고구마는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고구마에는 많은 전분과 각종 비타민이 들어있으며, 적응력이 강하고 가뭄에도 견디며, 구황작물로 아주 유효하였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미이다. 나중에 여송(지금의 필리핀)으로 전해졌다. 국제적으로 고구마가 중국에 도입된 시기를 명나라만력연간(1594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를 도입한 사람은 바다를 건너가본 적이 있는 중국상인인 진진룡(陳振龍)이다.

 

진진룡의 조상은 복건성 장락현의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필리핀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현지에 고구마가 있는데 맛이 좋고 달았다. 그리하여 몰래 그 종자를 사서 푸저우(福州)로 가져왔다. 근교에서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아주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마침 복건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서, 오곡이 모두 부족했다. 진진룡은 그 아들 진경륜으로 하여금 당시 복건순무 김학증에게 고구마를 바치고, 고구마를 널리 보급하게 된다. 이후부터 복건지역에는 가뭄이나 기근을 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은 푸저우에 선서정(先薯亭)을 세워서, 고구마를 도입한 진진룡과 이를 보급한 김학증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명나라말기에 고구마는 이미 화남지구에 널리 심어졌고, 점차 북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명말청초에는 전란의 영향으로 고구마의 재배기술에 대한 보급이 비교적 늦었다. 강희때가 되어서 고구마재배기술은 비로소 전국에 보급되게 된다.

 

고구마가 중국에 준 영향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경지면적의 확대이다.

 

데이타를 보면 청나라때의 경지면적은 전황조에 비하여 4배나 늘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청나라정부가 개간을 장려한 정책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거의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청나라이전의 중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민족이고 땅이 그렇게 많은데도 개간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경작가능면적'이다. 경작가능면적은 토지 자체의 질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경작하는 작물이 더 관련된다. 이 고구마는 적응력이 강해서 쌀, 보리를 심을 수 없는 산지에도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경작하지 못했던 많은 토지가 경작가능토지로 바뀐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의 경작가능면적이 4배나 늘어난 것이다.

 

동시에 고구마의 경작은 거꾸로 토양의 개선을 가져왔다. 원래 척박하던 토지가 보리나 쌀을 심을 수 있는 토지로 바뀌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어느 정도 쌀과 보리의 경작면적도 늘여주었다.

 

농업사회에서 토지는 농민이 생활을 의지하는 가장 근본이 된다. 그리하여, 경작가능토지가 있으면 분명히 그것을 차지하려는 사람이 있게 된다. 중국인이 동북지방으로 진출한 것이 좋은 예이다. 청나라는 만주팔기의 이익을 위하여, 강희7년에 '요동지역에 출입을 금지"하는 봉쇄정책을 썼다. 산해관일대에 버드나무를 심어 담장을 만들고, 중간에 밧줄을 연결시켰고, 만주군대가 주둔했으며, 엄밀하게 지켰고, 한족들이 요동으로 드나드는 것을 금지했다. 이 정책을 가지고도 한족이 요동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노인과 아이를 데리고 동으로 유관을 나서거나 발해를 배타고 건너서 벌이나 개미처럼 몰려갔다" 왜 그런가? 한인들은 정치적인 체포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향을 등지고 황량한 요동으로 갔는가? 왜냐하면 그 곳에 가면 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작할 토지만 있으면 부지런한 중국인은 어디든지 달려간다. 이는 무슨 영명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청나라정부가 동북을 봉쇄하는 정책을 썼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청나라정부의 개간장려정책은 경작가능토지를 늘이는데 그다시 유효하지는 못했었다.

 

둘째는 생산량의 제고이다.

 

고구마의 도입은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냈을 뿐아니라, 보리, 옥수수등 기타 작물과 섞어심기나 간작등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경작제도의 내용이 풍부해졌고, 토지이용률이 높아졌으며 양식의 증산에 큰 기여를 했다.

 

중국고대에서 토지이용률을 높이는 주요한 방식은 복종제(復種制), 윤작복종제(輪作]復種制), 간작(間作), 혼작(混作)등 몇가지 방식이었다. 복종제는 하나의 토지에 1년에 여러번 재배하여 수확하는 것이다. 윤작은 계획적으로 서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다. 이는 동일한 작물을 계속 재배하는 연종제(連種制)와 구별된다. 위진시대이전에는 두곡(豆穀)윤작제가 확립되었다. 간작제는 어느 한 작물의 생장기간동안 동기간에 두 자기 작물을 파종하거나 남은 공간에 보충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이다. 일찌기 한나라때부터 시작했다; 혼작제는 동일한 토지에 여러 작물을 심는 방식이다. 중국농민은 일찍부터 이런 경작제도가 장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양광과 토지, 수리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토지이용율과 생산량을 늘이는 방식이었다. 일정한 조합은 토양의 비옥도를 증가시키고, 농업생산의 지속성을 보장해준다. 일정한 조합은 잡초를 없애고 병충해를 감소시키는데 도움을 주어 농업의 안정된 생산과 높은 생산량을 보장해준다. 고구마, 옥수수의 도입은 여러종을 심거나 간작제를 하는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고구마의 위 두가지 특징을 살펴볼 때, 청나라때의 경작가능면적과 인구가 4배나 늘어났다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리고 청나라중후반에 왜 전란과 기근이 있었지만 중국인구는 여전히 3-4억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강건성세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청나라 말기는 왜 성세라고 부르지 않는가. 아쉽게도 중국의 역사는 모두 통치자의 역사이다. 한번도 농민이 어떠했는지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더구나 고구마의 도입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구마가 중국에 인구성세를 가져왔지만,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비록 중국인구가 4억에 달하였지만, 청나라는 쇄국정책을 쓰고 과기문화를 훼멸시켰다. 그리하여 중국사회발전을 정체시켰다. 청나라의 낙후와 열강에 수탈당한 것은 바로 이 성세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명나라말기에 중국의 과학기술과 경제는 서방국가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군사적으로도 서방과 싸울만했다. 그러나 이 강건성세를 거치면서 중국은 서방에 한참 낙후되게 된다. 서방식민자의 눈에 강건성세시의 중국은 찻잎을 많이 생산하는 아프리카나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