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1694년 프랑스의 가짜중국공주사건

by 중은우시 2007. 12. 28.

 

169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는 조야를 뒤흔든 스캔들이 발생했다.

 

이 당시 프랑스는 한창 "중국붐"이 조성되어 있을 때였다. 중국은 당시 유럽인들이 보기에 아주 신기한 나라였다. 110여년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에까지 널리 읽히고 있던 <<마르코폴로여행기>>에서는 중국에 가면 도처에 보석과 황금이 널려 있다고 적혀 있었다. 서역과 비단길을 건너서 서방인들이 볼 수 있었던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는 그들에게 아주 신비한 물건이었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막 벗어난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중국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1694년의 어느 날, 프랑스 궁중에 한 여인이 뛰어들었다. 이 여인은 떠듬거리는 프랑스어로 자신의 신세내력을 말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녀가 입을 열자 모두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녀는 중국인이었다. 이는 유럽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중국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보통의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에 따르면 자신은 공주였다. 즉 강희황제의 딸이다. 그녀는 강희제에 의하여 일본의 왕자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가는데 그 길은 네덜란드해적이 출몰하는 곳이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바다에서 해적들에게 포로로 잡히였다. 그녀의 모친은 그녀를 따라 함께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불행히 바다에서 죽었다. 이 불행한 금지옥엽인 공주는 해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유럽까지 오게 된다. 그런데, 이 해적선은 도중에 프랑스 배에 붙잡히게 된다. 당시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전쟁중이었으므로 프랑스인은 배에 있던 사람과 화물을 모두 몰수한다. 이 "강희제의 딸"도 이렇게 프랑스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도시에 정착한 이후에야 비로소 그 도시의 이름이 "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아주 기이하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였다.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바로 파리사회의 오리엔트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식은 즉시 사방으로 퍼져갔으며 큰 파장을 불러왔다. 파리와 프랑스의 궁중에서도 호기심, 허영심에 가득차 있을 때였느�, 마침 "중국공주"가 나타났으니 이것은 그들에게 재미있는 소재를 제공해준 것과 같았다.

 

궁중의 귀족과 부인들은 즉시 이 중국여인을 서로 데려가려고 싸웠고, 중국여인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들은 서로 이 중국여인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중국여인에게 좋은 의복,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주어, 그녀는 인생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의식주에 관심을 쏟는 이외에 궁중의 귀족들은 이 중국여인의 영혼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신을 믿지 않는 중국여인을 천주교를 믿도록 만들게 되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다행히 이 중국여인은 중국종교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고, 그들이 권하자 바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런데, 그녀를 개종시키는데 아주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있던 귀족부인들은 그녀가 이렇게 쉽게 설득당하자 아주 많이 실망하였다.

 

이 사건이 이처럼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자, 당시 파리에서 약간 중국어를 알고, 중국에 대하여 관심이 있던 사람들의 무리도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요즘 말로 하자면 "중국-프랑스우호협회"와 같은 곳이었다. 아쉽게도 이들의 중국어는 모두 스스로 익힌 것이었고, 거의 중국인을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중국여인은 본 적도 없었다. 그들은 중국여인을 만나기를 갈망했지만, 이들 가난한 학자들이 그녀를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당시 중국에서 20년간 생활하고 중국어를 잘아는 예수회의 전도사인 신부(神父)가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는 한 귀부인의 남편이 소개하여, 강희의 딸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만남으로 일이 커졌다.

 

신부는 공주를 보고는 중문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 공주는 한 마디도 못알아들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중국어"라고 주장하는 말로 대답했다. 이 신부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이 여인이 하는 말은 전혀 중국어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주는 자기가 하는 말이 중국어라고 우겼고, 신부가 하는 말은 전혀 중국어가 아니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야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은 중국공주라는 그녀의 말을 믿을 뿐이었다. 신부는 화가 났지만 방법이 없었다.

 

비록 중국공주에게 패하기는 하였지만, 이 신부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체면을 잃은 것은 별 것아니었지만, 그의 경건한 명예와 인격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보았다. 중국에서 20년이나 있었지만, 눈 앞의 여인은 아무리 봐도 중국인의 모양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디어를 짜냈다. 집으로 돌아가서 중국어로 된 문서를 가지고 와서 그녀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공주는 한 글자도 알아보지 못하므로, 글을 읽을 수 없었고, 결국 마각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가짜공주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문서를 꺼내들고는 아래위도 가리지 않고 빠르게 그리고 소리내어 읽어갔다. 신부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고수를 만났다고 느꼈다. 이 여인이 읽은 것은 물론 중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읽은게 뭔지 누가 알겠는가? 그녀가 아주 자신있게 읽어내려갔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중국어를 이해하고 판단해줄 수 있는 제3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황하에 뛰어들더라도 ㄲ끗이 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부의 억울함은 더할 수 없이 컸다.

 

어떤 일에도 끝은 있게 마련이다. 나중에 중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아지고, 진정한 중국인이 등장하면서, "강희의 딸"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프랑스작가 르 콩트가 이 사건을 적을 때에도 이 여인은 여전히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

 

르 콩트는 그의 글에서 탄식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또 다른 문화와 동일시할 때 그렇게 집착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가 중국문화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었고, 1차자료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당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성행하던 "중국"이라는 곳에 집어넣었고, 그렇게 손쉽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멀쩡한 프랑스여인이 왜 중국여인이라고 사칭했는가? 나중에 그녀가 신문을 받을 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자, 그녀는 아주 애절하게 답변했다고 한다. 그녀가 일찌기 가난하고 이름없는 프랑스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프랑스인이라고 하였으면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중국인으로 변신하자 일거에 유명인사가 되고, 복이 굴러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