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도광제(道光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중은우시 2005. 8. 7. 19:50

도광제의 이름은 민녕(旻寧, 즉위전의 이름은 綿寧이었으나 피휘를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돌림자를 바꿨음)으로 건륭47년(1782년)에 출생하였다. 도광제는 청나라 황제중 유일하게 황후의 적자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도광제는 가경제의 둘째 아들(皇次子)로서, 생모는 시타라씨(喜塔蠟氏)이다. 시타라씨는 부도통, 내무부총관을 지낸 허얼징어(和爾經額)의 딸이다. 건륭 39년(1774년)에 건륭제는 영염(가경제)에게 시타라씨를 적푸진(정실부인)으로 삼게 하는데, 이 때 영염의 나이 15세때였다. 가경이 즉위하면서 시타라씨는 황후가 되는데, 137일간 황후로 있다가 병으로 죽는다. 이 때 민녕의 나이 16세였다. 가경제도 민녕을 특별히 아꼈다.

 

민녕이 32세인 가경 18년(1813년)에 민녕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즉, 천리교(天理敎)의 교도들이 환관의 도움을 받아 황궁에 난입하는 사건이 돌발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 해에 민녕은 가경제를 따라 목란위장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더 이상 사냥을 계속할 수 없어 먼저 황궁에 돌아와 있었고, 천리교도들이 황궁에 침입할 때 상서방에서 마침 글을 읽고 있었다. 임천(林淸)을 수괴로 하는 천리교 무리들은 자금성의 동화문과 서화문으로 들어와서 양심전으로 향했는데, 이 때 민녕은 스스로 조총을 들고 나와 침입한 천리교도에게 쏘아 두명을 죽였을 뿐아니라 , 즉시 황부에 고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고, 저수궁에 가서 황모를 안심시키며, 친히 시위를 이끌고 서장가 일대를 수색하였다. 민녕이 돌발사건을 당해서 보여준 침착한 태도와 용기있는 행동은 가경제에게 뿐아니라 많은 신하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경제는 북경에 돌아오는 길에 보고를 받고는 즉시 민녕을 지친왕(智親王)에 봉하고, 그가 사용한 총에는 "위열(威烈)"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경 25년(1820년) 7월 18일 61세의 가경제는 가을사냥을 위하여 원명원을 출발하여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햐했다. 황차자 지친왕 민녕, 황사자 서친왕(瑞親王) 면석(綿淅)이 황제를 수행하였다. 7월 24일에 승덕 열하행궁에 도착하엿는데, 황상의 몸이 좋지 않았는고, 다음날인 7월 25일에 사망하였다.

가경황제의 사망에 대하여는 병사라는 설 이외에도 번개를 맞아서 죽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만일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도 절대 정사에서는 그대로 기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민녕이 황위를 계승하는게 당연한 것으로 보였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옹정제에서 시작한 비밀입저방식은 건청궁의 정대광명 편액뒤에 황태자 즉 후임황제를 지명하는 유지를 담은 귤갑을 남겨야 하는데, 가경제가 죽은 후에는 건청궁의 정대광면뒤에 귤갑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이상한 것은 당시 피서산장에 있던 사람들이나, 북경에 있던 왕공들 중 누구도 사람을 북경 자금성으로 파견하여 정대광명편액뒤를 살피러 보낸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가경황제의 유지가 발견되지 않자, 황자들과 신하들이 당황하게 된다. 이 때 내무부대신인 시언(禧恩)은 예친왕 춘잉(淳穎)의 아들인데, 황차자 민녕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하나, "군기대신인 퉈진(托津)과 다이쥔윈(戴均元)은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고 망설였다. 시언이 강하게 주장하였으나, 중신들을 설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도 시언이 감히 나서 황위계승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하나의 의문이다.

 

셋째, 효화황후는 북경에서 의지를 작성하여 오백리가급으로 피서산장으로 보내는데 그 내용은 황차자 민녕을 황제에 즉위시키라는 내용이다. 가경제는 두 명의 황후를 두었는데, 민녕의 모친인 시타라씨가 그 하나이고, 후에 뉴후루씨를 효화황후로 올린다. 뉴후루씨에게도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황삼자 면개와 황사자 면석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 두 아들은 민녕과 황위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을 수 있는 두 황자였다. 그런데, 민녕은 효화황후 그리고 두 동생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녕이 생모인 시타라씨가 사망한 후 효화황후를 생모처럼 따랐으며 동생들과도 관계가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이 때 효화황후 뉴후루씨가 가경제의 유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친아들중의 하나가 아닌 민녕을 차기 황제로 하라는 의지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민녕은 그 황태후의 의지를 받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박고 절을 하며 감격해 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청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황태후가 후임 황제를 결정하는 권한은 없었다. 만일, 황제가 남긴 유지와 달랐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 이 부분도 하나의 의문이다.

 

넷째, 가경제가 남긴 작은 금합은 피서산장을 찾을 때 한참을 나오지 않다가, 가경제의 시위중의 한 사람의 주변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가경4년 4월 10일 묘시초, 민녕을 황태자에 봉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 소금합을 퉈진과 다이쥔윈이 찾아서 열쇠가 없자 먼저 열어보니, 그 안에 가경제의 유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도 의문은 있다. 왜 금합이 정대광명편액뒤에 있지 않았는가? 왜 금합이 가까운데 있지 않고 시위의 주변에 있어서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찾았는가? 퉈진과 다이쥔윈은 왜 금합을 모두가 있는데서 열지 않고 먼저 자물쇠를 부수고 열어보았는가?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도광제가 즉위하는데 대하여 반대한 세력은 전혀 없었다. 모두 도광제를 차기 황제로 추대하였다. 황실종친인 시언, 두 황자의 생모인 황태후, 다른 황자, 신하들까지 모두 도광제가 황제가 되는데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고, 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한바탕의 해프닝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