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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소위 "강건성세(康乾盛世)"를 해부한다.

by 중은우시 2008. 2. 13.

글: 진명원(陳明遠)

 

여러해 동안 "강건성세"에 대하여 칭송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깊이 생각해았다. 이제, 필자의 실사구시적인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소위 "강건성세"는 강희20년(1681년)에 부터 건륭퇴위후 태상황에 등극할 때(1796년)까지 115년간 지속된 시기를 말한다. 어떤 학자들이나 작가들은 이 시기를 백년간의 휘황한 역사로 칭송하기도 하고, 어떤 정치학자들은 정치, 경제, 문화등의 측면에서 중국전통사회를 최전성기에 이르게 함으로써 역사적인 기적을 이룩했다고도 평가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상은 도대체 어떠한가?

 

만주족의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와서 중원을 점거한 이후, 실제적으로 몽고족의 원나라가 중원을 차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화문명에 대한 훼손과 전면적인 후퇴를 가져왔다. 강희, 옹정, 건륭등의 통치자들은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실행하고, 명나라이래로 진행되었던 서학동점(西學東漸)을 중단시켰으며; 대내적으로 문자옥(文字獄)을 일으키고, 과학기술 문예사업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그러므로, 소위 "강건성세"시기의 중국은 점차 서방에 낙후되기 시작하였고, 자랑할만한 가치는 없는 것이므로 이를 민족의 영광이나 자부심으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반드시 청산하여야 하고, 역사적교훈을 얻어야 하는 일이다. 강건성세는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남기고 있으며 여전히 중국의 현대화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피비린내나는 민족간의 충돌이 존재하였다.

 

문화적 소양이 거의 없던(심지어 문자도 막 사용하기 시작한) 만주족 통치자들은 북경을 점거한 후, "유발불유두, 유두불유불(留髮不留頭, 留頭不留髮,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려면 목을 자르고, 목이 잘리지 않으려면 머리카락을 잘라라)"는 정책을 시작했고, 피비린내나는 잔혹하고 포악하게 집행하였다. 청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는 "녕여우방, 불여가노(寧與友邦, 不予家奴, 이웃나라에 줄지언정 집안노비에게는 주지 않겠다/ 이는 차라리 외래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넘길 지언정 한족에게는 넘기지 않겠다는 의미임)"라고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청나라정권은 한족을 포함한 전국의 각민족이익을 대변한다"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양주십일(揚州十日, 만주족이 양주를 10일간 도살한 사건), 가정삼도(嘉定三屠, 가정을 세번 도살한 사건), 강음세성(江陰洗城, 강음을 피로 씻은 사건), 강소절강일대(곤산,평호,사포,해염,해녕,금화 포함), 강서전체, 광주도 몰살의 화를 입었고, 사천성은 전체 성의 인구가 멸절된 바 있다. 역사상 어느 왕조가 중화민족에 이처럼 커다란 재난을 조성한 적이 있는가? 누구나 비난할 폭행은 아마도 20세기중엽의 일본침략자의 대도살만이 겨우 비견할만 할 것이다.

 

1712년(강희51년) 4월, 청나라조정은 "영불가부(永不加賦, 영원히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의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는 근 100년에 걸친 도살, 토지침탈등 야만적인 정책후에 부득이하게 내린 "인정(仁政)"이다.

 

청나라는 전국정권을 탈취한 후 오랜 기간동안, 정복한 중화민족을 노예로 취급했으며, 야만적이고 피비린내나는 민족압박정책을 시행했다. 만한불통혼(滿漢不通婚, 만주족과 한족은 통혼하지 않는다)을 강조하고, 민족을 분리시키는 장벽을 쌓고, 한족으로 하여금 동북지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몽고족 평민이 한족땅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중국역사상 가장 엄중한 민족차별정책이다.

 

청나라초에 여기저기서 불거진 "반청복명"과 청나라 말기의 "구제달로회복중화(驅除虜恢復中華,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는 것으로 손문이 내세운 구호임)"에 이르기까지, 중화민족은 만청황조에 반항하는 투쟁을 쉬지 않았었다.

 

"강건"시대는 명나라에 비하여 퇴보하였다.

 

청나라가 중원을 점거한 후 사회는 크게 퇴보하였다. 유목민족의 누습, 농노제의 낙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야만적인 "권지운동(圈地運動, 만주족이 한족의 땅을 빼앗은 것을 가리킴)"은 중국의 생산력을 많이 퇴보시켰다. 사회에는 "주인과 노예"만 있을 뿐이었다. 우민정채을 추진하고, 노예의식을 심었으며, 비열과 유약을 가르치고, 구차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국민성을 길렀다.

 

당시의 사회경제상황을 보면 강희 40년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청나라가 들어선지 50년이 흘렀다. 사해의 안에는 날로 빈곤이 늘고, 농지는 비어버리고, 기술자고 비고, 시장도 비고, 관료도 비었다. 곡식은 질이 떠어지지만 먹기 어렵게 되었고, 베도 질이 떨어지지만 입기 어렵게 되었으며, 배는 다니고 시장은 모이지만 물건이 없고, 관료는 관직에 있어도 집안을 꾸리기 힘들다. 그러니 네가지가 모두 비었다. 금전은 그래서 유통되지 못한다. 중산층 집은 달포가 지나도록 돈한푼 베하나 보지 못하니 유통될 수 없다. 농민은 얼어죽고, 물건은 모두 적었다. 풍년에도 흉흉하니, 일반사람들과 장삿꾼들이 돈을 만질 수 없다. ...아침에는 연기가 오르지 아니하고 추우면 몸을 울크리고 펴지를 못한다. 오중의 사람들은 남자가 아름다우면 배우로 못생기면 노예가 된다. 여자는 예쁘면 첩으로 못생기면 노비가 된다."

 

"탄정입묘(丁入)" 정책은 농민들을 척박한 토지에 묶어놓는 결과를 낳았고, 산업화의 싹을 잘라버렸다.

 

곁에서 보는 사람이 오히려 잘보기 마련이다. 영국특사였던 매카니는 건륭후기에 사신으로 온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북방 혹은 만주 오랑캐가 정복한 이래로, 최소 과거 150년동안, 개선된 바도 없고, 발전도 없었다. 혹은 더 정확히 말자하면 퇴보가 있었다. 우리가 매일 예술과 과학분야에서 전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실제로 반야만인으로 변해갔다"

 

매카니가 보기에 강건성세의 진상은 "곳곳마다 놀라울 정도로 빈곤했고" "사람들의 의복은 남루하거나 심지어 나체로 다녔으며" "거지처럼 낡아빠진 군대" "우리가 버린 쓰레기도 이들이 서로 주워먹으려고 했다" 영국사신 매카니는 당시에 아주 민첩하게 청나라의 쇠락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청나라를 "낡아빠진 거대한 함선"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더 이상 규율과 안전이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청나라를 진흙으로 만든 거인이라고 비유했고, 중국인이 반야만인으로 퇴보한 시기라고 평가했다.

 

"강건"의 공상업은 이전 황조에 못미치고, 서방에는 낙후되었다.

 

송나라의 공상업은 아주 발달했었다. 몽고의 원나라를 지나면서 크게 파괴되었다가 점차 회복하였으며, 명나라때는 다시 발전을 이루었다. 철생산량은 북송의 두배반에 이르렀고, 면포가 베를 대체하여 방직품의 주요제품이 되었다. 철. 조선, 건축이건, 비단, 면포, 자기이든 모두 세계의 선진제품이었고, 공업생산량은 전세계의 절반(어떤 사람은 심지어 2/3)이상이었다. 이는 농업생산량이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도 높았다.

 

그런데, 소위 강건성세에는 인구가 명나라때보다 수배에 이르렀음에도, 철과 포(布)의 두가지 대표적인 공업제품의 생산량이 명나라때의 수준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건성세의 말기에 이르러, 중국의 공업생산량은 전세계의 1/10에 불과하게 되고, 200년전의 명나라때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번영의 질이나 양의 면에 있어서 소위 "강건성세"는 명나라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국내만 비교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비교해볼 수도 있다. 유럽이 르네상스이후 계몽운동, 체제개혁,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증기기관차, 방직기계, 기차, 윤선, 기계제조, 현대공장이 줄줄이 들어섰다. 상대적으로 낙후한 러시아도 피터대제시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로부터 배워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노후한 만청황제는 망존자대(妄尊自大)하여, 문을 닫아걸었다. 이 "강건성세"에 거의 발명이나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술혁신도 없었다. 서방의 상선과 병선이 들어와서 이들의 썩어문드러지고 녹이 슨 대문을 두들길 때까지는.

 

인구급증은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강건시기를 '성세'로 치켜세우는 이유는 많은 정도에 있어서 인구가 급증했다는데 있다. 명나라의 전국인구는 6000만정도로 안정되었다(왕세정의 기록에 의하면, 명나라인구의 최고숫자는 6330만이다). 전란후의 회복기를 거쳐, 강희61년(1722년)에는 1억을 돌파하고, 건륭55년(1790년)에는 3억을 돌파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청나라통치자들의 근정(勤政)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더욱 주요한 원인은 명나라말기에 도입된 고구마, 옥수수등 생산량이 높은 작물이 전국의 농촌에 보급되었기 때문에 "인구팽창"이 일어난 것이다.

 

청나라의 초기에 세금을 거두는 방식은 인두세였다. 이 결과, 지방관리는 사실대로 인구를 보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구를 많이 보고할수록 세금도 많이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강희가 "영불가부"의 정책을 내세운 것은 바로 지방은 경지면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인구수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방관리들은 사실대로 인구수를 보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을 태평성대의 표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민족노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토지세금이 균등하지 않아서, 부자들은 각종 방법으로 많은 땅을 가지고도 세금은 조금내고, 가난한 자들은 송곳박을 땅도 없는데도 많은 책임을 부담했다.

 

역사가 증명한다: 인구급증은 좋은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 사회의 부담을 증가시키고, 중국의 이후 공업화시기의 인구비율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우수한 노동력이 증가될 여지를 막아버렸고, 현대화의 과정에 저해가 되었다.

 

날로 부패하는 팔기체제

 

청나라가 전국을 점령한 것은 주로 "팔기체제"에 의지해서이다. 만,몽,한 팔기는 청나라정권의 핵심역량이었다.

 

민족차별하의 청나라관료제도는 무능하고 부덕하며 재주없는 만주 몽고의 왕공, 귀족관료를 오랫동안 고위직에 머물게 하였다. 조정의 정권을 장악한 고관대작과 각성의 순무총독은 대부분 만주몽고귀족이었다. 이들은 멍청하며 부패했다.

 

강희황제가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 전투에서 팔기군의 군기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었다. 군사력이 예전만 훨씬 못했다. 이후 팔기군과 팔기자제는 더욱 교만하고, 나태해져갔다. 그들은 권세에 의지하여 저지르지 않는 일이 없었고, 나쁜 짓이면 모두 했다. 군기가 무너졌을 뿐아니라, 훈련도 하지 않았다. 생활은 부패하여, 마약을 흡입하고 도박을 하며, 기녀와 어울렸고, 백성들을 쥐어짜고, 유린했다. 일찌기 용감하고 날쌨던 팔기병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그저 백성이나 괴롭히는 어르신군대가 되어버렸다. 팔기자제는 한량으로 집안을 망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이미지는 새장을 들고, 기원을 기웃거리며, 잔치에는 끼어들고, 금붕어를 기르며, 귀뚜라미싸움을 시키고, 노래나 부르는...'무지하고 후안무치하며 두려움이 없는 '기생충'으로 변모했다.

 

나중에 청나라조정은 전쟁을 할 일이 있으면, 주로 녹영병(綠營兵, 팔기이외에 한족을 모아서 만든 군대인데 깃발이 녹색이었음)을 썼다. 60만녹영병도 쇠퇴하는 사회환경하에서 급속히 부패했다. 군수물자를 빼돌리고, 비적과 결탁하며, 중간에 착복하기도 하였으며, 여러가지 폐단이 많았다. 그저 일반 백성들에게나 힘을 쓰는 허수아비군대로 전락했다. 가경황제가 황태자였을 때, 일찌기 건륭황제를 따라 열병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본 것은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나가지 않고, 말을 타니, 사람이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는" 난장판이었다.

 

아편전쟁에 이르러서는, 팔기, 녹영, 향용(鄕勇), 단련(團練)이 모두 쓸모없게 되었다. 수십만 청나라군대는 만여명의 영국원정군에 패했다. 중국은 이로부터 여기저기서 얻어맞는 국면에 처해지게 된다.

 

문자옥

 

청나라가 문자옥을 일으킨 것은 원래 반청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특징은 권력자의 문자에 대한 곡해에서 시작하고, 증거도 권력자의 문자에 대한 곡해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 글자 혹은 시 한구절이 일단 황상을 비방하거나 청나라정권을 풍자하는 것이라고 인정되면 바로 형벌을 받았다. 만청황조 초기에 순치, 강희의 "문자옥"은 그저 개별적인 현상이었다. 옹정제에 이르러서는 폭력적인 문자검찰제도로 변모한다. 문자옥의 조류에서 가장 미친 듯이 일으킨 사람은 소위 '문화를 애호한다'는 건륭황제였다.

 

문자옥에 관한 사료는 아주 많다. 아래에서는 건륭제때 일어난 전형적인 문자옥들만을 열거해보기로 한다:

 

첫째, 1753년, 건륭이 여러차례 강남순유를 떠난다. 이로 인해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강서 무주의 천총인 노로생(盧魯生)은 당시 공부상서 손가금의 명의를 빌어 건륭에게 다시는 강남으로 가지 말 것을 권유하는 글을 쓴다. 글이 아주 애절하여 전국에 널리 암송되었다. 이 사건이 발발하고 나서 노로생은 천능지형에 처해지고, 두 아들은 참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하옥된 사람만 1천여명에 이르게 된다.

 

둘째, 1755년, 내각대학사인 호중조가 <<견마실시초>>를 쓰는데, 거기의 싯구중 "일파심장논탁청(一把心腸論濁淸)"이라고 되어 있었다. 건륭은 이 시가 고의로 "탁(흐림)"을 "청(맑음)"의 앞에 두었으니,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참형에 처한다. 광서순무인 만주족 악창(鄂昌)은 호중조의 시를 보고 화답하는 시를 지었는데, <<새중음(塞中吟)>>이다. 그 시에서 몽고인을 "호아(胡兒, 오랑캐)"라고 썼다. 건륭은 악창 자신이 몽고인이면서 같은 민족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자살을 명한다.

 

셋째, 1764년, 태주지주인 뇌굉전이 북경의 관리에게 승진부탁을 하면서 보낸 서신에 "점장교병, 불실군기(點將交兵, 不失軍機)"라고 적었는데, 건륭제는 이 글이 모반을 꾀하는 글이라고 보고 목을 치게 했다.

 

넷째, 1778년, 강소성의 시인이자 원 한림원서길사인 서준(徐駿)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저인 <<일주루시>>에는 "청풍불식자, 하고난번서(淸風不識字, 何故亂飜書, 맑은 바람아 너는 글자도 모르면서, 왜 책은 어지럽게 뒤적이는 것이냐)"라는 문구가 있었다. 건륭제는 이를 청나라 만주족이 글을 모르는 무식함을 비꼰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거배홀견명천자, 차파호아포반변(擧杯忽見明天子, 且把壺兒抛半邊, 술잔을 들다보니 갑자기 맑은 하늘이 보여서, 주전자를 한켠에 버려두었네)" 여기서 "호아(壺兒, 주전자)"는 "호아(胡兒, 오랑캐)"를 빗댄 것으로 보아서, 정부를 비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서준은 부관참시당했으며, 자손과 지방관리는 모두 참수되었다.

 

다섯째, 건륭이 아주 좋아하던 내각대학사 심덕잠이 죽었다. 원래 심덕잠은 건륭제가 지은 시를 고쳐주고, 건륭은 시가 잘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를 불러 몰래 대신 시를 쓰게 하기도 했었다. 심덕잠이 죽은 후에 건륭은 그의 가족으로 하여금 심덕잠의 시집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건륭을 대신하여 썼던 시까지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건륭의 허영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마침 그 시에는 흑모란에 대한 시가 있었는데, 시의 한 구절이 "탈주비정색, 이종야칭왕(奪朱非正色, 異種也稱王, 붉은 색을 빼앗으니 올바른 색은 아니다. 잡종도 왕을 칭하는구나)"라는 내용의 주(朱)는 명나라왕실의 성이므로 청나라가 명나라를 빼앗은 것을 비방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심덕잠도 부관참시당한다.

 

여섯째, 1781년, 집에서 쉬고 있던 전 대리시경 윤가전의 저서에서 그 자신을 "고희노인(古稀老人)"이라고 자칭했다. 건륭은 "내가 스스로 고희노인이라고 하고 있고, 이미 천하에 알렸는데, 그가 어찌 스스로를 고희노인이라고 자칭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고, 목매어 죽도록 하였다.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건륭이 만들어낸 "문자옥"은 전제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