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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오늘

북경사람들이 사실 가장 비배타적이다

by 중은우시 2007. 9. 21.

글: 서강(胥鋼)

 

북경인과 외지인 각자의 특쟁과 관계는 사람들이 줄곧 논의해왔던 주제이다. 사실 북경사람들은 대도시사람이면서 수도사람이며, 국내외를 불문하고 비슷한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즉, 현지인과 외지인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북경인은 누구인가?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북경인이 아마 외지인일 것이다. 진정한 북경토박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서 북경도 다른 모든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이민으로 계속 사람을 보충받는 도시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보자면 일반적으로 본인이 북경에서 출생했다면 바로 북경사람이 되는 것이다.

 

북경인의 특징이 무엇인가? 아마도 특징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아마도 담막(淡漠, 담담하고 냉막하다) 또는 청고(淸高, 맑고 고아하다)? 아니면 뭘하든간에 입만 열면 어르신(爺)..? 물론 지금은 이렇게 부르지 않는다. 다만 전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무슨 능력은 없으면서 아주 잘난척 한다는 것이다. 북경성은 역대로 외지인들이 통치하고 관리하였다. 북경에는 무슨 관리든 다 있고, 무슨 경우든 다 만난다. 다만, 북경인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지도 않는다. 보지 못했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그거 거기에 놔두면 된다. 북경은 장룡와호가 많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 있다. 다만,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서로 왕래는 없는 것같고 서로 부러워하지도 않는 것같다. 북경인들은 호기심이 결핍되어 있다. 마치 연극을 보는 것처럼 누가 노래해도 다 된다. 나는 마찬가지로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다. 북경인들은 살아가면서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것같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북경사람들은 진취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북경사람들의 생활환경이 비교적 느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죽어라고 해야하거나 죽어라고 피해야할 생활상의 스트레스가 없다. 그래서 일종의 타성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하에 게으른 기질이 몸에 배었다. 다른 사람과 다투겠다는 마음을 버리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관계를 맺으려면 자기가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적극적으로 접대하고 선물을 주어야 하고, 자존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건 너무 피곤하다. 북경사람들은 이것저것 고려한 후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이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북경인들은 비교적 담막하다. 겉으로 보기에 오만한 것같다. 다른 사람과 너무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싫어하고, 부탁받는 것도 싫어한다. 이것은 그들의 생존환경과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북경(일반적으로 모든 대도시)의 생활서비스는 이미 사회화 되었다. 기본적으로 생활상의 수요는 돈으로 모두 살 수 있다. 사회서비스도 각종기구가 있어서 다 해준다. 이미 관계를 유지하여야만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 그다지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 직장에 출근한다는 것이 그 자체가 일종의 업무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리듬이 빠르고, 스트레스가 비교적 크다. 만일 퇴근이후에도 다른 일로 이런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북경사람들은 비교적 가벼운 관계를 좋아한다. 즉,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바로 군자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같다(君子之交淡如水)는 관계인 것이다.

 

어떤 때에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어떤 관계에 연루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교분을 맺는데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왜냐하면 일단 어떤 사람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분을 맺게 되면, 만일 그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지만, 일부 행위나 관점을 네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에는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상대방이 이미 친구가 되었다면 더 이상 피차를 나누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북경사람들에게 자기의 공간이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어서 피곤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원래의 의미에서의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북경이 대도시이기 때문에 형성된 관계모델이다. 북경사람들은 자기의 생활공간을 가지기를 원하므로 서로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자 한다. 다만, 외지인들은 왕왕 이런 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북경인들이 냉막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북경인들은 아마도 천성적으로 우월감을 타고났을 수도 있고, 이런 우월감이 뼛속까지 배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외지인들은 아마도 북경인들이 왜 이렇게 우월감을 지니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북경사람들이 외지인보다 총명한 것도 아니고, 외지인보다 부지런하지도 않지만, 세상을 많이 보았고, 통이 좀 더 크다. 그러나 이것도 전체적으로 본 것일 뿐이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고, 지역이 성격을 결정한다. 사실 이것은 북경인들의 생활지역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북경에서 오래 거주한 외지인들도 북경지역의 이런 영향을 받게 된다.

 

내몽고인들은 왜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가? 그것은 바로 광활한 초원 위에서 사람은 적고, 생활환경이 열악하니 사람들은 항상 야수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고, 사람들은 방목을 위하여 자주 이사다녀야 한다. 그래서 이동이 간편한 몽고파오에 사는 것이다. 다만 몽고파오는 야수를 방비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방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초원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적인지 친구인지 모름로, 사람들은 왕왕 술을 먹게 하여 그 사람의 성격을 알아낸다. 만일 아주 호쾌하게 술을 마시면 바로 마음이 맞는 사람이고 뭔가를 숨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음모의 느낌을 갖게 하고, 비교적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만일 이 사람이 술을 먹고 취하지 않는다면, 그가 적일 때 매우 위험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술을 마심으로써 그 사람의 인품을 판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취해버리면 무장이 해제되는 것이어서 잠재적인 위험도 그만큼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몽고인들을 명랑하고 호방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반대로, 남방에서는 인구밀도가 높고, 집은 적과 추위를 막을 수 있으며, 동시에 자기의 프라이버시도 보호할 수 있다. 정자누각에서는 금기서화를 즐길 수 있어, 전혀 다른 경치이다. 또한 매우 세심한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이것도 환경이 조성한 것이다.

 

농촌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뭉치기"를 아주 좋아하고, 고향의식이 강하다.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두 눈에 눈물이 그득..." 왜냐하면 한 마을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가족과도 같고 수백년전에는 한가족이었던 것이며, 모두 친인척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면 단결해야 하고, 공동으로 대적해야 한다. 한 사람이 손해보면 다 같이 손해보는 것이고, 한 사람이 성공하면 모두 성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고향사람집에 가는 것은 마치 자기집에 가는 것과 같이 편하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 집에 가서 들어가면 식사를 같이 하고 또한 더럽다고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처럼 생각하는게 되고, 농촌에서 배척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역문화이다. 이러한 존재환경이 바로 농촌인들의 이런 의식을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북경사람들의 성격은 북경인들의 특유한 것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북경이라는 대도시의 생활환경이 결정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외지인이라는 것은 아주 추상적인 개념이다. 프랑스 파리사람들은 왕왕 파리 이외의 사람들을 시골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볼 때, 많은 국가는 모두 수도와 시골의 관계문제가 있다. 다만 미국에서는 뉴욕이 다른 나라의 수도와 비슷하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분명히 국가가 수도에 준 일부 특수한 우대정책 때문이고, 국가의 인재가 집중되고, 수도를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우월감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외지인들이 수도로 가서 발전하고자 하는 것도 아주 자연적인 현상이다. 이전에는 계획경제의 통제를 받아서 북경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 수도와 외지의 차이는 갈수록 커졌다. 그래서 북경인들의 우월감이 조성된 것이다. 다만 그때는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북경에 들어오는 외지인이 적었고, 비록 북경에 들어온 외지인이라 하더라도 모두 대학생이어서 현지의 엘리트인물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계속 중앙정부의 부서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근무대우도 북경현지인들보다 높았다. 그래서 이런 우월감은 자연히 북경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있게 하였다.

 

다만, 북경이 점차 개방되면서, 북경시 상주인구는 이미 1300만명에 달하였다. 여기에는 유동인구가 포한되지 않은 것이다. 이 1300만의 사람들 중에서 진정 북경에서 출생한 사람은 아마도 절반 조금 넘을 것이다. 북경은 국가의 수도로서 발전기회가 아주 많은 대도시이고, 대량의 사람들을 북경으로 끌어들였다. 많은 외지인들은 북경으로 가서 발전하는 것을 자기의 꿈으로 생각한다.

 

당연히 출국은 더더욱 그들의 꿈일 것이다. 다만 언어문제도 있고, 현지의 주류사회에 쉽게 융합되지 못하는 점이 있어서 항상 상대적인 빈곤감과 2등국민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자기가 취득한 재산은 고향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이지만, 국외에서는 자기의 성취를 자랑할 곳이 없다. 왜냐하면 현지에서는 그저 겨우 먹고살만한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만족감이 없는 것이다.

 

북경은 다르다. 어쨌든 자기 국가의 수도이고,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잘 발전하면, 특유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부모를 모셔올 수도 있고, 음식, 주택, 차량, 오락등에서 자기의 성취를 드러낼 수 있다. 이는 조상을 빛낸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고, 행복감과 만족감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바 있지만, 사람의 스트레스는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사람의 만족도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어릴 때 자기를 가난하다고 얕보던 고향사람들에게 자기의 성취를 자랑할 수 있는데서 오는 만족감이다. 어떻게 들으면 편협한 듯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사실 외지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생 대학원생등 북경유학인원. 일반적으로 이들은 각 부서, 대학에 분배된다. 그중 일부는 나중에 사업을 하기도 한다; 북경에 와서 장사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원이 있다. 그리고 민공, 청소원도 있다. 물론 일부 불법인원도 있다. 북경은 땅이 넓고, 사람도 많고 들어오고 나가기가 쉬우며, 취업기회와 발전기회도 많은 도시이다. 북경인들의 외지인들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것은 확실히 이유가 있다. 그중 북경의 위법범죄사건중 외지인들이 저지른 것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사실 사건을 저지르는 사람은 외지인들 중에서 극소수이다. 가만 외래인구이므로 특히 현지인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이해할만하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현지인의 범죄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면서, 외지인들의 범죄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취급한다. 사람들의 기대에서 외지인들은 관광객이 되기를 원하지, 파괴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한줌도 안되는 나쁜 사람들이 외지인들의 명성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북경의 일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고, 모든 북경사람이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 북경인들은 상대적으로 통이 크고, 배타적이지 않다. 북경아가씨가 외지대학생에게 시집가는 일은 아주 많다. 그녀들은 그들이 사업심이 강하고, 일을 감히 벌이는 정신을 좋아한다. 외지의 젊은이들도 북경아가씨의 통큰 점을 좋아한다.

 

북경인들은 단결되지 않고, 고향개념이 없다. 어떤 직장에서 북경인들이 단결해서 외지인들을 못살게 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반대로, 북경인은 기회가 있다면 외지인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북경인들은 모두 외지인들과 평화롭게 잘 지내는 편이다. 비록 그다지 열정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이다. 바로 지역이 성격을 결정한 것이다. 북경인들은 배타적일 필요가 없다. 듣기 안좋을 수는 있지만, 북경은 항상 외지인들이 지배했다. 다만 북경인들은 여기에 대하여 불비불항(不卑不亢, 비굴하지 않았음)하면서 포용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외지인들이 금방 북경인에게 융합되도록 하였는데, 한족의 융합능력을 잘 보여준다. 이런 능력은 바로 관용이다. 만일 계속 배타적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하여 분명히 격렬한 사회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만일 많은 북경사람들이나 다른 외지사람들이 어느 도시로 가서 생활하고, 그 도시에서 건설을 한다고 해도 좋고, 현지 사람들의 밥그릇을 빼앗아먹는다고 해도 좋다. 네가 그곳 현지인이라면 북경인들이 외지인을 대하는 것보다 관용적으로 대해주겠는가? 그래서, 외지인에게 있어서 북경을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좋은 도시로 생각한다는 것은 네가 북경을 사업을 벌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으며 가장 나쁘지 않은 도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전국의 대부분 도시보다 가장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북경으로 와서 발전하기로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대다수의 북경사람들은 외지사람의 후대이다. 외지인의 자녀도 북경인이 된다. 북경사람들이 외지인을 환영한다고 말하므로써 자신의 흉금을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화의 과정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호적제도를 폐지하는 것도 필연적인 추세이다. 이전의 자유도 필연적인 추세이다. 다만, 이는 각지의 도시발전이 비교적 균형을 이룬 다음에 시행해야 한다. 북경과 외지가 여전히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면 외지인들이 북경으로 와서 생활하려는 것도 필연적인 추세이다(홍콩인들과 상해인들이 북경으로 오는 일은 적지 않은가). 다만, 도시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하여, 북경의 인구를 통제하는 것도 정상적이다. 북경으로 이주해온 세대는 북경에서 고향과 같은 느낌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식들은 스스로 북경사람이라고 느낄 것이다. 제1대의 이민은 분명히 이런 심리적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은 출국하여 창업한 제1세대 이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북경인 혹은 외지인들에 대하여 좋게 말하거나 나쁘게 말하거나 의미가 없다. 북경인과 외지인을 대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다만, 외지인의 북경진입문제는 계속 남아있게 될 것이다. 가장 핵심은 어떻게 이 문제를 볼 것인가에 있다. 사실 양호한 마음가짐만 있다면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느 곳에 가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지역데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북경사람이라고 아무 것도 없이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고, 네가 외지인이라고 아무 것도 없이 자비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그가 북경인인지 아닌지 외지인인지 아닌지에 따라 그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어디 사람이냐에 따라 사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는 것도 아니다. 색안경을 끼고 북경인과 외지인을 보면 안된다. 모두 중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