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북경티비채널3 - 매력과학
북경시 밀운현 고북구진에 위치한 하서촌(河西村)은 조하(潮河)의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하서촌의 명칭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마을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산꼭대기에는 봉화대가 있다. 장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꾸불꾸불 이어져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바로 이 수 평방킬로미터의 작은 마을 애 124개의 성씨가 있다고 한다.
하서촌의 성씨가 정말 소문과 같이 다른 곳과 다른 것인가? 혹시 이것은 순전히 우연인가? 자그마한 자연촌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성씨가 모여 살게 되었는가? 만일 정말 그렇게 성씨가 많다면, 이들 성씨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기자는 하서촌 촌민위원회로 갔고, 촌간부에게 상황을 알아보았다. 마침 촌민들이 회의를 하고 있어서, 촌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기자가 10명의 촌민과 얘기를 했는데, 이들 열 명은 성씨가 모두 달랐다. 백가성촌의 소문이 괜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촌민들에게 물어서 얻은 결과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마를에 진짜 그렇게 많은 성씨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기자는 촌지부서기 장옥산을 찾아갔고, 그로부터 전마을주민이 등기된 명부를 빌려보았고, 수를 헤아려 보았다.
기자가 하서촌 촌민의 명단을 전부 살펴봤고, 서로 다른 성씨를 하나하나 통계내었다. 최종적으로 얻은 데이타는 다음과 같다: 전마을주민은 1700여명인데, 성씨는 모두 127개이다. 그 안에는 "동(桐)", "색(索)", "파(巴)"와 같은 희귀성씨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기자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자료를 보면, 중국의 다른 성시에서도 성씨가 백개를 넘는 마을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그중에서 천진의 동승촌이 가장 많아서, 116개 성씨가 있었다. 그런데, 이 120개가 넘는 하서촌에 대하여는 여하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설마 이 마을이 단기간내에 형성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또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는가?
백가성촌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하여 현지 농민의 인도하에 기자는 고북구진의 왕장청을 찾았다. 현재 53세인 왕장청은 하서촌 토박이였다. 수십년동안 그난 현지의 각종 역사를 발굴하고 있었다. 하서촌의 "백가성"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그는 기자에게 말했다. 이전에는 현지 마을주민들이 아무도 이곳에 성씨가 많은 것을 주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여기에 주의하게 된 것은 완전히 하나의 우연이었다.
작년, 마을의 하서중심소학을 짓기 위하여 시공대의 대장이 춘위원회를 왔다가 벽에 걸려있는 한집한집의 호주의 성씨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을 보고는 헤아려보니, 5,6십가지가 되었다.
시공대장은 이 내용을 왕장청에게 얘기했다. 그는 즉시 통계를 내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120여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하서촌은 하룻밤만에 '백가성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왕장청의 대답은 그저 이전에 왜 하서촌과 '백가성'을 연결시키지 않았느냐에 대한 해답은 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많은 성씨가 모여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왕장청도 답을 찾지 못했다.
기자가 대량의 자료를 살펴본 후에 알게 된 것은 중국의 다른 성시에도 이와 비슷한 백가성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형성원인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천진의 동승촌은 50년대에 형성되었는데,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왔다가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는 것이다. 절강의 이십팔도진은 원래 오가는 상인들이 아주 많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해남의 한 백가성촌은 바다를 떠도는 것이 싫어진 어민들이 정착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다른 성시의 "백가성촌"을 형성한 원인중에서 어떤 경우에 하서촌이 해당하지는 않을까?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자는 저명한 성씨연구학자인 왕대량 교수를 찾았다. 왕교수는 중국의 백가성촌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그리고 친히 북경 밀운의 고북구진을 찾은 바 있다.
왕대량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 백가성촌은 개락 10개 정도인데, 이들의 형성원인은 각각 다르다. 군사적인 경우, 경제적인 경우, 그리고 특수원인인 경우가 있다. 다만, 하서촌은 성씨의 수량상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경우이다.
왕교수에 따르면, 현재 찾을 수 있는 백가성촌은 대부분 형성된 연대가 비교적 최근이다. 즉, 5,60년대의 일이다. 그런데,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수천년전에 하서촌에는 이미 도시가 출현했다.
이왕의 연구에 따르면, 천년역사를 지닌 자연촌은 많은 경우 몇 개의 큰 성씨들로 구성되고, 조상대대로 전해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성씨가 비교적 단일하다. 다만, 하서촌처럼 역사가 유구하면서도 100여개가 넘는 성씨가 모여사는 경우는 확실히 아주 드물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동시에, 기자는 또한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전국범위에서 현재 이미 알고 있는 백가성촌을 도무 지도에 표시하다보니 발견한 것인데, 이들 마을은 대부분 비교적 편벽한 곳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왕대량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이들 지방은 현재 낙후되어 있지만, 그것이 원래부터 낙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 이런 지역은 바로 과거에 이곳이 교통요지이고, 일찌기 번화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왕교수는 자기의 초보적인 추정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하서촌의 이들 성씨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 마을로 몰려들었을 때, 당시의 사회환경은 아마도 백가성촌의 형성원인과 밀접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
비록 하서촌이 지금은 이미 수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만일 성씨가 서로다른 촌민들이 모두 최근 수십년내에 이주해온 것이라면, 하서촌 백가성의 유래는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백가성촌의 형성원인과 차이가 별로 없다. 즉, 경제생산의 필요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다만, 만일 시간상 불일치한다면, 하서의 "백가성"촌 형성의 진정한 원인은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기자가 인터뷰하는 대상을 모든 성씨가 마을에 나타난 시간을 확정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렇다면, 어이서 단서를 찾을 것인가? 이때, 기자는 촌민의 족보에서 시작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성씨종족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다시 왕장청을 찾았을 때, 그의 대답은 아주 실망스러웠다. 촌의 각 집안의 족보는 이미 모두 없어지거나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문자기록이 없으므로, 연장자의 기억에서 단서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기자는 마을의 나이많은 노인들을 찾아갔다. 그들로부터 무슨 가치있는 정보를 얻을까 기대를 했다.
왕장청이 이끌어주는대로 기자는 먼저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왕장청의 장인어른 94세의 반씨어르신을 찾았다. 반씨어르신의 기억에 따르면, 조상의 원적은 산동성 대유수라고 한다. 자기의 조상이 청나라때 군대에 들어갔다가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은 이미 제5대라고 한다.
기자가 다시 마을의 7,80된 노인들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조상은 모두 명청시대에 하서촌으로 왔다고 말했다. 하서촌의 이들 노인들이 제공한 정보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서촌의 백가성의 유래는 앞에 언급한 천진, 절강등 몇 개의 백가성촌의 형성원인과 공통점이 없었다. 그렇다면, 수백년전에 하서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성씨를 지닌 가족들이 이곳으로 몰려온 것일까?
고북구진 "백가성촌"의 유래를 탐구하기 위하여 전문가는 기자에게 먼저 이들 성씨가 하서촌으로 온 시기를 확정한 후, 다시 당시의 사회상황을 참고하면, "백가성촌"이 형성된 진정한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마을 노인들의 회고에 따라 대부분의 성씨인구가 현지로 온 시기는 명청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따.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고북구(古北求)의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사건은 명나라때의 장성 수리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혹시 백가성촌의 형성원인과 관련이 있을까?
밀운현지를 살펴보니, 하서촌에 관한 기록이 있었는데,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한시기이다. 기원전 127년 한무제는 이 곳에 "해성(奚城)"을 설치했고, 위치는 현재의 하서촌중심소학이다. 명나라에 이르러, 저명한 장군인 척계광(戚繼光)이 고북구진지역에서 장성을 수복한다. 이곳은 군사중요도시로 변모한다. 하서촌은 고북구진의 중심이었으므로, 지리적위치가 더욱 중요했다. 기록에 따르면 하서촌은 유림영(柳林營)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볼 때 이곳은 이전에 군대가 주둔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에서 쉽게 이 마을이 당시에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되어서, 하서촌의 군사작용은 계속되었고, 피서산장의 건축으로 고북구 지역은 열하피서산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하서촌에는 구문제독부와 같은 상급의 군사기관이 설치된다. 주둔군대의 수요에 따라, 마릉네는 많은 관사가 건설되고, 관리들의 가족들이 거주했다.
청나라 강희연간에 감숙, 청해에서 마진량(馬進良)이라는 총병이 왔다. 그는 현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 그가 데려온 사병들이 대대로 눌러앉았다.
이들 역사기록은 기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연상하도록 만들었다. 하서촌이 역사상 이처럼 중요한 군사요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전국각지의 군대가 이 곳에 주둔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이 마을에 이처럼 많은 성씨를 남기게 된 연유가 아닐까?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주둔군대의 정상적인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량의 상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 왔을 것이라고 한다. 하서촌위원회의 문앞에 있는 거리에는 일찌기 146개의 상점이 있었고, 어떤 것은 지금도 남아 있다.
여기까지 조사하자, 기자의 추정은 확인이 되었다. 하서촌 백가성의 형성은 확실히 군대주둔과 관련이 있다. 전문가의 해석을 가지고 다시 고북구진을 방문하여 왕장청에게 답안을 얘기해 주었다. 동시에 다시 그로 하여금 최후의 의문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바로, 고북구지구가 당시에 군사요지였고, 각마을에 모두 주둔하였다면, 왜 단지 하서촌만 백가성촌이 되었는가?
왕장청은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후, 하서촌은 조하의 강변에 있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므로, 이용할 토지가 아주 적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부로 일을 하러 나갔고, 많은 젊은이들이 외지에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이것이 아마도 하서촌에 적지 않은 새로운 성씨가 추가된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이번 백가성촌 유래를 탐방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는 계속하여 기자에게 사실 중국에 성씨에 대한 연구와 통계에서 공식데이타가 얼마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에 현재 도대체 몇 가지 성씨가 존재하는지에 대하여도 확실한 숫자가 없다고 한다. 현재 비교적 권위있는 견해에 따르면, 3천 내지 4천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사중에는 자신이 15000개의 성씨를 찾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씨의 내력과 배후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천천히 찾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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