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현장(玄奬)의 서천취경(西天取經)

by 중은우시 2007. 8. 23.

글: 맹헌실(孟憲實)

 

현장의 서천취경(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간 것)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장이 서역으로 떠난 동기에 대하여는 오래 전부터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인도로 떠나기 전에, 일찌기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배움을 구했다. 불교사원도 방문하고, 고승대덕고 만났다. 이렇게 하였음에도, 그의 마음 속에 든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태종의 금지령을 위반하면서까지, 인도로 결연히 떠난 것이다. 그가 서역 고창국(高昌國)의 국왕 국문태(鞠文泰)에게 남긴 서신에서 자신이 인도로 가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즉,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지 수백년이 되었고, 불경도 많은 것은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으나, 용어가 서로 다르고, 의미가 차이가 커서, 이해가 서로 다르게 되었다. "논란이 많이 일었고, 수백년이 되었지만, 해결이 되고 있지 않으니, 이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수당시대에 정치는 통일되었으나, 불교내부의 분쟁은 끝나지 않았었다. 현장법사는 이 논쟁을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중국에서는 불가능했다. 중국에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마저도 번역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이 모두 갖추어 져 있지 않고, 내용에 빠진 것이 많아서 한스럽다. 그리하여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고난과 위험을 감수하며, 서방으로 가서 부처가 남긴 법을 구하고자 맹서한 것이다" 현장이 해결해야 할 것은 불교의 교리문제였다. 불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불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점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불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현장은 국내에서건 인도로 가는 것이건 모두 부귀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분명하다. 고창국에서 국왕 국문태가 현장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고창국에 남아서 중생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것은 황제의 스승이 되는 일이었고, 당연히 호화부귀가 뒤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창국이 강제적인 방법을 썼지만, 여전히 현장을 굴복시키지 못한다. 그는 원래의 계획을 견지하였고, 중도에서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현장이 불경을 얻어 되돌아오자,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당태종은 현장에게서 정치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환속하여 정치를 하라고 권했다. 현장은 다시 이 호화부귀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다.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고, 인간의 불성을 연구하는 것이 당시 불교세계의 중요한 과제였다. 득도를 하기 위해서는 부귀영화는 버릴 수 있었다. 현장의 행동은 당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현장이 성공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비단길은 비록 동서방의 무역으로 유명하지만, 현장이라는 구도자의 족적은 이 비단길에 문화적인 색채를 더해 주었다. 그렇다. 현장도 아마 최종답안을 얻지 못했는지 모른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생활에서 부닥친다. 아마도 인성, 불성등등은 원래 답안이 없는 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현장의 족적은 우리에게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물성에 있지 않고, 사람이 정신적인 추구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생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최종답안을 얻어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추구 그 자체에 있다.

 

오늘 날, 현장의 행동이 널리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하여 감히 낙관할 수 없다. 만일 현장이 오늘 날 살았다면, 아ㅏ 자주 "학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힐문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을 수 있다. 현장의 시대에는 어쨌든 불교를 믿는 중생이 많이 있었고, 일반 대중들이 불교에 대하여 이해하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불교에 좋은 점이 있다고 인정해주었다. 그래서 현장과 같은 승려에게 존경심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현장과 같이 부귀영화를 버리고 아무런 쓸모없는 곳에 몰두하는한다면 너무나 이상하지 않겠는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제외하더라도, 학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학문으로 이득을 얻는 자는 곳곳에 널려 있지만, 최소한의 경업(敬業)정신도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진리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학문이 가치절하되었으므로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과 사회의 부유계층과도 단절되었다. 학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학문을 얘기할 때는 얼굴에 달갑지 않는 표정이 나타나니, 이제 배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싫어하게 될 수밖에 없다. 현장정신을 본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장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정말 어렵게 되었다. 구도의 길은 황량하다.

 

현장이 당시 걸어갔던 구도의 길에서, 최근들어 요란한 행사가 많이 벌어졌따. 각지의 여행자들도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고, 돈황 천불동의 때묻은 역사를 찍어갔고, 병림사의 석양에 지는 낙조를 찍어가고, 천년을 가라앉지 않는 전함같은 교하성을 찍어가고, 마음의 역정이 한가닥 연기인 듯 한나라의 장성도 찍어간다. 현장이 걸어갔던 길은 현재 어떻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서, 비단길에 관해서, 현장의 구도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긴 하는 것일까?

 

고창국의 국문태는 현장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고창성은 현장이 다녀간지 천년이 지났을 때, 전쟁으로 소멸되었다. 이 천년동안 이름을 날리던 비단길의 고성은 현재 겨우 벽과 담장만 남아서 소리없이 역사를 전해준다. 쿠차(龜玆)고국의 모습도 지금은 크자르석굴벽화에 많이 남아 있지만, 현장이 지나갔던 작리대사,는 현지 조그만큼 남아 있는 벽화도 이미 황사로 절반은 묻혀버렸으니, 더 할 말이 없는 듯하다. 자연파괴와 문화변천으로 비단길의 경관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장의 시대는 이제 역사로 물러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산하와 인류행동의 지속을 보고 있다. 공그르, 무스타그도 여전히 그대로 서 있고, 천산, 곤륜도 여전히 기세가 대단하게 서 있다. 샘물은 솟아올라 천년을 흐르고 있고, 천년이 지나도 허물어지지 않은 봉화대는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슬픔과 기쁨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천산에 눈이 휘날리는 계절에, 사람과 말이 다니는 산골짜기 길도 눈에 덮여 있을 때, 예전에 다니던 그 길에서 우리는 여전히 봄날이 산을 넘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로 출토된 옛날의 행수(杏樹)는 그의 자손들이 지금도 사람들에게 달콤한 살구를 제공하고 있을 것이다. 높은 산의 흐르는 물가에 나그네가 쉬도록 마련된 돌맹이는 천년이전에 지나갔던 또 다른 나그네의 체온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인류의 문화는 승계되는 것이다. 도로가 아마도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현대화된 교통공구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선인들이 닦아놓은 도로의 노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통하여, 우리는 여전히 서북의 역사적인 풍모를 목도할 수 있고, 바람에 말라버린 역사를 볼 수 있으며, 옛도로가 전해주는 인간세상변천의 각종 규칙을 알아볼 수가 있다. 고대유적의 곁에는 현대도시가 솟아오른다. 양자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순간 너의 머리에는 역사흥망성쇠의 발걸음이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현장이 돌아간 이후, 현장의 배경과 구도의 길만 소리없이 우리의 눈에 남아 있다. 홀연 필자는 마음속에서 나오는 소식을 듣는다. 구도의 길에서 구도자의 족적을 쫓는 것도 역시 하나의 구도가 아니겠는가?

 

필자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중생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질적인 행동은 중생의 행복과 관련되므로 이익을 쫓는 행위를 하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결국 정신생활은 기형이 되어 버렸다.  동시에 우리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동물이 될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사유공간이 갈수록 좁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생활도 물질생활에 완전히 매몰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장정신의 전인으로서 우리는 조상을 잊지 않을 것이다.

 

구도의 길은 예로부터 시끄러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역사를 가지는 것은 모든 사람의 타고난 권리이다. 그것은 소박하지 않은 정신상의 재산이다. 사람은 이것으로 인하여 가치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