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수우(黃守愚)
한 시기가 "태평성세(太平盛世)"인지여부를 판단하려면, "민생(民生)"을 기준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전통문화는 반드시 탈태환골하여야 한다. 그래야, 중국문화가 살고, 중국민족이 살 수 있다. 전통적인 정치문화의 본질은 강탈이다. 중국전통문화는 "민주"에 맞지 않고, 그저 봉건황제제도에나 맞을 뿐이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권력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황제 한 사람이 자유를 가지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집안노비(家奴)"인 것이다.
이연(李淵), 이세민(李世民)은 모두 중국인이 아니다. 그리고 돌궐에 의탁하여 매국노로 전락했던 인물들이다. 당나라는 정통성이 없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위정권(僞政權)이다. 이세민은 지방깡패두목출신으로, 형을 죽이고, 부친을 핍박해서 황제위를 차지한 대역무도한 인물이다. 소위 "정관지치(貞觀之治)"는 허위이다. 이세민이 국가를 통치하면서 사용한 수단은 "내부투쟁" "구교구(狗咬狗, 개가 개를 물어뜯다)", "모래섞어넣기"등이다. 이리하여 백성을 통치하는데 사발위의 모래알처럼 만들고 동아병부(東亞病夫)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천하를 다스리는데 다음과 같은 10자의 비결을 사용한 것이다.
분권(分權) : 권한을 나눠준다.
내투(內鬪) : 내부에서 항상 투쟁하게 한다.
장징(奬懲) : 상과 벌을 사용한다.
환계(換屆) : 임기가 끝나면 사람을 바꾼다.
불측(不測) : 예측불허하게 조치한다.
당나라의 관리들은 부패가 극심하고 세금이 과중해서, 인간지옥이었다. 절반의 백성이 도망치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당현종은 흡혈귀였다. 백성의 고혈을 잘 뽑아내는 자들을 중용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죽고싶어도 죽을 수 없고,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하였다. 개원(開元) 연간에 양극화가 극심해서 가난한 자를 죽여서 부자를 배불리었다. 조직폭력배와 관청이 결탁하여 권력은 제약을 받지 않고, 기득이익집단은 세금도 내지 않고, 가난한 자들만 국가의 모든 세금을 부담했다.
이세민은 돼지사육의 고수였다.
이세민의 능력은 비범했다. 20세에 반란을 일으키고, 29세에 형을 죽이고 부친을 협박하여 황제위를 차지했으며, 여러 신하를 잘 다루었고, 천하를 통치했다. 강토를 넓혔고,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날렸으니, 고래에 드문 인재이다.
이연이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의 천하를 차지한 것은 유방이나 주원장이 천하를 얻은 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이연은 그 자신이 귀족출신이고, 반란이전에도 이미 상당한 지위와 명망을 누리고 있었다. "창업"과정에서도 반란세력내에 다른 "핵심"이나 "거두"가 나타나지 않았고, 반란군내에는 위계에 따라 상하간 질서가 유지되었다.
유방이나 주원장은 달랐다. 천하를 얻는 과정에 장수들은 거의 홀로 한 지역을 책임졌다. 이리하여 여러 "핵심"이 나타났다. 그들도 황제가 될 능력과 야심이 있었고, 언제든지 독자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유방이나 주원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이연이 천하를 얻은 후에 아들 이세민만이 야심을 지니고 있으므로, 공신들을 많이 죽일 필요는 없었다. "창업"과정에서 이연은 수나라의 관작에 인색했던 풍기를 일신하여, 수시로 사람들에게 돈을 하사하고, 관작을 내렸다. 그리하여 천하의 주현(州縣)의 수나 관료의 편제가 수나라때보다 배는 늘어났다.
이연시절에 관리들의 대다수는 수나라때의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옷"만 바꿔입었다. 그리하여 이연이 재위할 때, 정치는 아주 부패했고, 집정자들은 백성들로부터 고혈을 짜내고, 무리를 지어 자신의 배를 불렸다.
"일인득도, 계견승천(一人得道, 鷄犬昇天, 한 사람이 득도 하면 닭이나 개까지 하늘로 올라간다. 한 집안에 고관직에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친척들도 모두 한자리씩 차지하는 경우를 가리킴)", "입류(入流, 옛날에 관직에 나가는 것을 말함)하는 자들은 모두 기득이익집단의 자손들이었다. 예를 들어, 당나라때, 이부의 책임자의 아들이 병부에서 일하면서 밥을 먹고, 병부의 책임자의 아들은 호부에서 일하면서 밥을 먹고, 호부의 책임자의 아들은 다시 이부에서 일하면서 밥을 먹는 식으로 서로 교차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곤 했었다.
고대에는 "음습(蔭襲)"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부친이 국장까지 지냈으면, 아들은 과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말기의 재상인 이봉길(李逢吉)의 아들인 이덕유(李德裕)는 과거제도를 싫어했다. 그래도 부친의 후광으로 관직을 이어받아 관료의 길로 들어섰고, 나중에 재상에까지 올랐다.
그러므로, 이연의 정치유산을 우리가 계승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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