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림하(塔里木河)는 중원으로 흘러서 도도한 황하와 면면한 장강과 서로 섞일 수는 없다.
타림하가 기른 서역문화는 문명의 새처럼, 지혜의 꽃처럼 중원문명의 정원으로 날아왔고,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일시간에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형국이 되었으며 흥성하고 번영하는 국면을 형성하였다.
대당시대는 대융합의 시대였다. 대당의 문명은 중국과 외국에 빛났으며, 천년을 비추고 있다. 이는 바로 대당왕조가 흉금을 넓게 가져 사방팔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해납백천(海納百川, 바다는 수백의 강물을 모두 받아들인다)의 기도를 유지한 결과이다. 사방에 위세를 떨쳤던 대당제국은 중국인에게는 자랑스럽고, 세계가 부러워하며, 역사를 휘황하게 하였다.
영국학자인 웨일스는 그의 <<세계약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방인들의 심령이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몽매와 암흑을 헤메고 있을 때, 중국인의 사상은 개방적이었고, 겸수병축(兼收倂蓄)하였으며, 탐구하기를 즐겼다"
웨일스는 유럽중세기와 중국성당시기의 문명차이를 비교할 때 이 말을 했었다.
당나라때는 중국역사의 전성시대였다. 당나라의 문명성과는 세계가 주목하는 것이었다. 바로 웨일스가 말한 것처럼, 개방된 사상, 겸수병축과 탐구를 좋아하는 정신은 당나라문화의 강장제이며 자양제였다. 당나라는 먼저 중원과 서역의 각 민족문화에서 장점들을 취하였고, 동시에 비단길을 통하여 유라시아의 각국과 문명교류를 시작했으며,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열정과 새로운 것을 구하는 격정으로 충만했다. 당나라때 다원적 문화와 백화제방의 국면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때문이다. 이러한 문화배경하에서 서역문화는 중원으로 진입했다.
고도 장안은 건축이 거대하고 기세가 당당했으며, 당나라 최대의 도시였고, 동방에서 가장 유명한 국제적 대도시였다. 이곳에는 한당의 풍채가 가득했으며, 일종의 한당정신(漢唐精神)이 싹텄다. 기상이 장대했으며, 국운은 창성했다.
당나라 정치, 경제, 문화중심인 수도 장안은 거주인구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약 30만호였다. 631년 당태종이 동돌궐을 무너뜨린 후, 돌궐귀족등 만호를 장안에 안치시켰고, 그들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시행했다. 일찌기 북위때부터, 낙양에 붙잡혀왔던 서역인이 만호를 헤아렸다. 당나라때, 장안과 낙양의 두 도성에서 오고가는 무리들 중에서 서역의 호인(胡人)들이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서 말하는 호인이라 함은 주로 타림하유역의 여러 나라와 신강경내의 소수민족을 가리키고, 총령서쪽 천산이북의 중앙아시아 소무구성(昭武九姓)의 호인들을 가리킨다. 일부분의 인도사람과 페르시아사람도 포함된다. 당시 서역소수민족은 동방의 낙원을 그리워했고, 도성장안은 여러 사람들이 가보고자 하는 성지였다. 그리하여 장안에는 수많은 서역의 호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어떤 때에는 20만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섬서 유림은 일찌기 한나라때부터 쿠차(龜玆)의 이민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귀자현을 설립했다. 타림하 중류의 온숙인(溫宿人)들은 섬서 건현으로 많이 건너왔다. 그래서 건현은 일찌기 온숙령이라는 현이름을 가지기도 하였다.
상술한 만호의 돌궐인과 당나라이전에 와서 머문 서역인을 제외하고도 당나라를 도와서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장안에 머문 수천명의 막북 회흘인도 있다. 그리고 대규모로 이익을 추구하는 호인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중에는 허리에 수만금을 두르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도 있었으며, 바로 장안에서 처자식을 얻고 장기간 눌러앉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관료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우전왕 위지승은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도와 반란을 평정한 후, 장안에 머물렀다. 위지청은 장안에 거주하였는데, 덕종때 관직이 장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질로 붙잡혀 온 자도 있었따. 타림하유역의 우전, 쿠차, 소륵, 선선등의 국가는 모두 인질신분으로 장안에 사람을 보냈다. 적지 않은 인질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외에 장안에 종교를 전파하러온 서역승려들도 있었다. 중원에 공부하러온 서역의 학자들도 있었다. 수량이 비교적 많았던 부류는 장안에 와서 예술에 종사하던 노래, 춤, 극, 환술(잡극)을 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을 따라서 장안으로 와서 식당, 점포, 술집도 열었고, 노래하고 춤추는 서역상인과 서역아가씨도 있었다. 그들은 금방 당나라문화에서 아주 빛나는 한 부분을 이루었다.
토번의 세력이 강성했으므로, 안서사진이 하나하나 함락되었고, 하서일대는 토번에 잠식당하였다. 그리하여 중원과 서역의 교류가 중단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안에 머물던 서역의 무리들은 돌아갈 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장안에 머물게 된다. 당나라는 전문으로 이들을 담당하는 기관을 만들어 이드를 관리하고 생활상 편의를 제공하였다.
당시에 남아 있던 서역인들은 약 4천명인데, 그 중에 어떤 노인들은 이미 장안에 40여년을 산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처자식이 있고, 집과 논이 있었다. 서역인들이 한족여인을 처로 삼은 경우도 적지는 않았다.
이처럼 많은 서역인들과 이처럼 복잡한 직업관계, 그리고 장안에 집중되어 있는 관계로 당나라의 도성에서 이들은 문화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문헌의 기재에 의하면, 일찌기 한영제(漢靈帝)는 "호복(胡服), 호장(胡帳), 호상(胡床), 호좌(胡座), 호반(胡飯), 호공후(胡箜篌), 호적(胡笛), 호무(胡舞)를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경성의 황족 귀족들은 모두 앞다투어 이를 따라했다고 한다. 이로써 볼 때, 영제는 한나라때 이미 서역문화와 사회습속을 전면적으로 중원에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경성의 귀족 황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당한 규모를 형성하였다. 당나라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전대의 많은 양호한 전통을 계승했을 뿐아니라, 이민족문화에 대하여 더욱 개방적이었고, 화이(華夷)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겸수병축하였다. 그리하여 국제상업무역, 각종인종, 각종종교, 동서방문화가 모두 장안이라는 동방의 대도시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하게 되었고,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서역소수민족들이 장안에 들어와 사는 숫자가 늘어나면서, 장안의 호화(胡化)의 풍속도 아주 유행하게 된다. 서역의 풍습, 복장, 음식, 건축, 회화, 음악, 가무를 좋아하는 자가 궁중과 귀족에 그치지 않고 민간의 주민들에까지 퍼져간 것이다.
장안의 건축은 아주 특색이 있는데, 화려하면서도 거대하다. 불교의 전래로 인하여 서역불교의 사탑, 석굴건축이 장안과 낙양에 나타났고, 불사가 줄을 지어 서게 되었고, 불탑도 도시의 곳곳에 나타나게 된다. 심지어 로마 비잔틴의 여름궁전을 여름에 혹서기를 가지고 있는 장안으로 옮겨왔다. 건축형식은 여전히 누각과 처마양식이었다. 궁전내에는 사방에 물을 모아두고 물레방아를 돌리며, 물이 흩날리게 하고, 자리에는 얼음을 두어, 이 곳에만 오면 한여름에도 시원한 가을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현종은 여름궁전(凉殿)을 지은 후, 경성의 귀족들도 뒤따라 비슷하게 흉내냈고, 호화주택을 지었다. 집안에는 자우정자(自雨亭子, 스스로 배내리는 정자)를 만들었다. 처마위에서 비가 사방으로 떨어져서 한여름에도 시원한 가을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더욱 심한 것은 유행을 추구하기 위하여, 일부 귀족은 서역민족의 장봉(帳蓬, 텐트)을 도시안으로 가져온 것이다. 성격이 호방하고 낭만적이었던 이백도 뒤떨어지지 않고, 자기의 정원에 두 개의 파란색 장봉을 만들었다. 당태종의 아들인 이승건마저도 호풍(胡風)에 빠져서, 서역인들을 모방하길 좋아했고, 서역어를 할 망정 중국어는 하지 않았다. 그는 황궁의 빈터에 큰 장봉을 세웠는데, 그 자신은 돌궐 칸의 모양으로 분장했고, 장봉앞에서 친히 익힌 양새끼고기를 잘라서 씹어먹곤 했다. 그를 모시는 노복들도 역시 서역인의 복장을 했다.
호복은 장안에서 아주 유행했다.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색깔이 선명하고 뒤집을 수 있는 목칼라, 좁은 소매, 목에 꽉끼는 서역복장을 유행으로 삼았다. 이 측면에서 당나라 사람들은 자유롭고 소탈했다. 복장에서도 기괴하고 이상한 복장을 즐겼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감히 했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서역복장은 확실히 멋있는 점이 있었다. 남자들이 입으면 강건해 보이고, 여자들이 입으면 몸매가 드러나서 곡선미가 있었다. 장안의 부녀들은 풍만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해서 옷도 넓고 헐렁하게 입었다. 허리가 가늘고, 곡선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몸에 꽉끼고 소매가 좁은 서역복장과 헐렁하고 화려한 당나라복장을 결합시켜서, 치마를 허리에서 묶음으로써 "분칠한 가슴이 반쯤 드러나니, 숨은 눈인가 하노라" "가슴 앞에 흰 눈이 오래 남아 있다"는 심미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호복 이외에 장안에서는 전모(氈帽, 펠트모자)를 쓰고, 서역신발을 신었다. 서역모자에는 호정번모, 권첨고모, 백피모, 혼탈(전유)모등이 있었다. 비단으로 만든 것도 있었고, 모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모자의 꼭대기는 뾰족한 모양이었고, 꽃무늬나 주보로 장식했다. 서역신발은 일반적으로 가볍과 간편한 것이었는데, 주로 피혁으로 만들었다.
궁중의 여인들은 서역인들의 말타는 법을 배웠다. 몸에는 서역복장을 했다. 머리에는 유모(帷帽)를 썼는데, 군모(裙帽)라고도 했다. 즉, 얼굴을 드러내고 삼면에 실을 늘어뜨린 형국이다. 몸에는 꽉끼는 좁은 소매옷을 입었고, 발에는 가죽신발을 신어서 아주 소탈하고 영기발랄한 모습이었다. 이는 외재적인 장식만 모방한 것은 아니었고, 이런 모방으로 초원민족의 호승심, 진취심까지도 가져왔던 것이다.
장안여인의 화장에서도 서역화가 두드러졌다. 그녀들은 미간에 화전(花鈿)을 붙였는데, 이를 화자(花子)라고 하였다. 눈썹의 끝머리에는 서역에서 나는 식물원료로 붉은 색을 칠하였고, 얼굴에는 연지를 발랐다. 연지(臙脂)의 원래 이름은 언지(焉支)였는데, 하서(河西)지방에서 나는 것으로 색채가 선명한 식물원료로 만든 화장품이었다. 흉노족들은 하서에서 한나라군대에 격패당하여, 이 땅을 빼앗긴 후에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연지였다. 그리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언지산을 빼앗겼으니, 우리 부녀들이 앞으로는 색깔이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로서 볼 때 서역인들은 연지없이는 생활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연지는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검은 색깔로 눈썹을 칠하고, 붉은 색으로 입술을 칠하는 서역의 화장원료와 화장법은 중원의 여인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입술에 붉은 칠을 할 때도 서역여자들은 입술 전체를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중원의 여인들은 조그맣게 바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앵도소구일점홍(櫻桃小口一點紅, 앵두처럼 작은 입에 한 점의 붉은 색)"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고, 이처럼 무궁무진한 매력이 있는 루즈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전 세계로 퍼져갔다. 입술에 루즈를 바르는 것은 현대인들이 고대인들보다 훨씬 심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화장법은 서역 내지 인도, 페르시아로부터 건너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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